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13화 (113/122)

113. 29화 도전 (4)

‘예전에도 느낀 건데, 공부하기 정말 딱 좋단 말이야.’

아공간 안에는 공부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카산트 대륙의 절경을 뒷배경으로 설정을 해 두어서 공부하는 중간중간에 바람 소리와 새 소리가 ASMR마냥 적절하게 울려 퍼졌다.

“음, 생각보다 양이 얼마 안 되네?”

나는 아카이브를 실행시킨 뒤, 총장님께서 보내 주신 도서들을 쭉 훑어봤다.

‘글쓰기 교본’이라고 적힌 책은 제목 바로 아래에 학습 단계가 쓰여 있어 어떤 순서로 읽으면 좋을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교본은 입문, 초급, 중급 그리고 고급까지 총 4단계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초 단계라서 책이 얇은가 보다. 그럼 슬슬 읽어 볼까?’

손가락으로 입문 교본을 클릭하자 책 모양의 홀로그램이 책상 위에 생성되었다.

<글을 쓰는 목적으로는 기록, 사상, 감정의 표현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결국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제아무리 잘 쓰인 글이라고 한들 누군가에 의해 읽히지 않는다면 작가의 생각을 끄적거려 놓은 작은 일기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본이든 서론에는 배움의 목적과 의의 따위가 적혀 있기 마련이다.

나는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글의 내용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읽어 나갔다.

글쓰기 입문 교본은 그 구성이 현실 세계의 교재와 아주 유사했다.

우선, 글의 기본 단위인 문장을 잘 쓰는 법을 필두로 주제 설정과 개요 작성 그리고 단락을 구별 짓는 법까지 기초를 상세히 다뤘고 이후, 소설, 수필, 설명문, 논설문 등처럼 여러 종류의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어떻게 작법을 가져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으로 끝맺음을 맺었다.

‘중간중간에 연습 문제가 있어서 유용했어.’

교본은 배운 개념을 점검할 수 있게 각 단원 뒤에 연습 문제가 있었고 모범 답안만 수록해 놓은 해설지도 따로 있어서 내가 적은 문장과 글이 규격에 맞게 쓰였는지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흠, 나쁘진 않긴 하지만 솔직히 조금 싱거운데?’

입문 교본을 완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시간.

지난 7월에 선발 시험을 통과한 이후, 지능 레벨 6을 달성해 이해하는 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스탯 레벨 3이나 4 정도만 되어도 하루면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입문 단계라 심오한 내용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카산트 대륙에서 손꼽히는 현자로 불리는 총장님께서 저술하신 교본치고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바로 초급 교본으로 넘어가자.’

가상 공간 안에서는 3시간이 흘렀으나 바깥 기준으로는 45분가량 지난 것에 불과해서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뭐야, 이게?”

초급 교본 파일을 실행한 뒤 책을 살펴보던 나는 특이한 구성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책 서두에 개념들이 정리된 것은 입문 교본과 똑같았지만, 2/3가량이 모두 연습 문제로 구성된 게 입문 교본과 차이가 있었다.

‘이론은 입문 교본 때보다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기는 하네.’

내가 사는 곳으로 비유하면 입문 교본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학생을 위한 거라면 초급 교본은 학부생들이 읽기에 적합한 책으로 보였다.

중급과 고급 교본은 아직 펼쳐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이런 경향으로 볼 때, 석박사 논문 수준으로 개념을 다룰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내용이 어려워졌다 한들, 지능 스탯을 꾸준히 높인 내 앞에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나는 거침없이 교본을 읽어 나갔고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론 공부를 마무리했다.

<다음 글을 10줄 이내로 요약하시오.>

‘지금부터는 문제만 풀어야 하나 보다.’

개념이 집약된 단원을 모두 공부하고 나니 이후부터는 문제 풀이의 연속이었다.

첫 문제는 이르젠 제국의 전근대 역사를 기술한 산문을 10줄 이내로 요약하는 것으로 입문 단계에서 몇 문제 풀어 본 거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우, 깜짝이야.”

요약문을 작성한 뒤 손목을 풀기 위해 잠시 펜을 내려놓으려던 그때, 글을 적은 페이지가 밝게 빛나더니 페이지가 자동으로 넘어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어드바이저가 켜지더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미르헨 총장님은 초급 교본부터는 마법을 걸어 놔서 자동으로 채점이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동 채점이라고?”

<예, 답안지가 푸른빛을 띤다는 것은 통과라는 뜻이고 붉은빛을 띤다는 것은 합격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래? 그럼 시험을 한번 해 볼까?”

어드바이저의 설명을 들은 나는 다음 문제에다 아무렇게 휘갈겨 적은 뒤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쓴 글에서 붉은빛이 떠오르더니 글씨가 모두 지워져 버렸다.

“와, 틀렸다고 가차 없이 지워 버리네?”

빈칸 채워 넣기나 3줄짜리 짧은 답안이야 지워져도 크게 영향이 없었지만, 10줄 이상의 답안을 써야 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야 학생들이 답안을 작성할 때 신중해질 거라고 여겨서 그런 것 같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미르헨 총장님입니다.>

“후, 일리가 있는 말씀이긴 하지만, 너무 가혹하잖아. 그나저나 넌 이 책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야?”

<총장님께서 아카이브에 파일을 전송하시면서 저희에게 따로 매뉴얼을 보내 주셨습니다.>

미르헨 총장님은 내 학습을 돕기 위해 교본에 관련된 정보를 시스템에 보내 놓았다.

“오케이, 이만하면 설명도 충분한 것 같으니까 들어가 봐.”

<네. 알겠습니다.>

어드바이저는 짧게 대답한 뒤 사라졌다.

‘불만을 가져 봤자 나한테 좋을 건 없어, 일단 문제들이나 풀자.’

글쓰기 교본을 공부하는 건 어디까지나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한 밑 작업이었기 때문에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문제들을 풀어 재꼈고 10시간이 지나서야 초급 교본을 덮을 수 있었다.

‘잠깐 쉬었다가 하자.’

얇은 입문 교본과 달리 초급 교본은 500P에 달했고 문제에 할당된 지면만 450P에 달하여 문제 풀이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300개가량의 문제 중, 틀린 게 10개가 채 되지 않아서 허비되는 시간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휴우, 다시 시작해 볼까?”

브루스 단장에게 배운 호흡법으로 기력을 회복한 나는 중급 교본을 실행시켰다.

책의 구성은 초급 교본과 같았으나 이론의 깊이와 문제의 난이도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나는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보려 했지만, 진도 빠지는 속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느렸다.

이론 파트야 개념이 살짝 어려워진 정도라 별 어려움 없이 넘어갔던 것에 비해 문제 파트에 돌입하자 문제 하나하나가 쉬이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나름 신경 써서 적은 답안지가 삭제되기 일쑤여서 어떤 문제는 다섯 번 이상 썼다 지웠다 한 것도 있을 정도였다.

‘두 시간이나 지났는데 10문제밖에 못 풀었잖아?’

원래는 아침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문제를 풀어 어떻게든 중급 교본을 끝내려고 했지만, 두 시간 동안 고작 10문제밖에 풀지 못하자 쌓여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일루션을 종료하고 침대에 누웠다.

‘우선은 다른 미션들을 진행하고 다시 풀어야겠어.’

중급 교본의 문제 자체는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으나 채점 기준이 비약적으로 올라 초급 교본 때는 합격으로 처리될 글도 삭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다른 미션으로 필력을 상승시킨 뒤에 문제 풀이에 들어가는 게 여러모로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몸을 뒤척이다가 동이 다 틀 때쯤이야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어제 하루 종일 미팅을 하고 책을 읽어서 피곤해서였을까, 눈을 떠 보니 벌써 오후 1시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른 일은 제쳐 두고 스탯 창부터 켰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미션이 생성됩니다.>

<목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 10권을 읽고 책마다 요약 및 분석을 하십시오.(분량: A4 사이즈에 10pt로 4장>

<보상: 필력 경험치 +50%>

‘카산트 대륙에 A4 규격의 종이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뭘 이런 미션을 주지? 그냥 취소하고 다른 게 있나 알아볼까?’

<사용자께서 살고 계신 곳을 참고하여 미션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드바이저는 내 생각을 읽고 답변을 보내왔다.

‘하긴, 카산트 대륙에서나 가능한 것을 미션으로 주면 애당초 진행이 안 되겠지. 하, 그래도 요약, 분석을 하라는 건 오버인 것 같은데…….’

요약, 분석이라고 해 봤자 독후감을 조금 더 심도 있게 쓰면 되는 거라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하지만 독서를 하는 것에 더하여 이에 대한 요약, 분석 작업을 하려고 생각하니 거부감이 강하게 몰려왔다.

어제 가뜩이나 답안지를 작성하느라 글 쓰는 게 물린 상황이었는데, 또 글을 쓰라고 하니 귀찮았던 것이다.

물론, 컴퓨터를 활용하여 작업하면 이틀 안에 마칠 수도 있겠지만, 가상 공간에 비하면 시간 효율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판단이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미션을 취소하시면 일주일 동안은 생성이 불가하오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우 진짜…….”

미션을 바꾸기 위해 취소 버튼을 누르자 안내문이 떴다.

나는 안내문을 말없이 보다가 션 교수님을 호출했다.

[아르마이스 님 부르셨습니까?]

교수님께 메시지를 보낸 지 10초도 채 되지 않아서 화면이 떠올랐다.

“어, 바로 연락을 받으시네요?”

[오늘부터 2주일 동안은 방학이라 바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교수님께 연락을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나는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가상 공간 안에서 키보드를 활용한 워드 작업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워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방식과 키보드 도안만 보내 주시면 가상 공간 안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안에서 글을 쓰거나 메모를 할 때도 활용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나요?”

독후감을 쓰는 것 외에도 답안지 작성에도 활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교본 때문에 그러시는 거군요.]

“총장님이 말씀을 하셨나 보네요.”

[아카데미 업무로 총장님과 자주 마주치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저도 그 교본들로 공부를 해 봐서 아르마이스 님이 겪는 고충이 무엇일지 짐작이 갑니다.]

션 다이스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시스템을 업데이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르마이스 님이 요청하신 사안은 6시간 안에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가상 공간에서 했던 작업물을 사시는 곳에 있는 기기에 연결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어, 그게 정말인가요?”

가상 공간에서 한 워드 작업을 컴퓨터와 노트북에 옮길 수 있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좋아하실 걸 알았다면 진즉에 해 드릴 걸 그랬습니다. 안 되겠습니다. 지금 당장 채비를 해서 연구소로 가야겠네요.]

션 교수는 들뜬 내 모습에 한시라도 빨리 작업에 착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 안으로는 업데이트를 해 드릴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교수님.”

‘우선, 책들 먼저 알아봐야겠다.’

교수님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스마트폰을 꺼내어 노벨 문학상을 탄 도서들을 검색했다.

‘우리 집에 있는 것들도 꽤 되네.’

그동안 틈틈이 책을 사 둔 덕분에 3권만 추가로 구입하면 됐다.

나는 외출복으로 환복한 후, 집 근처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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