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30화 미션 그리고 또 미션 (1)
‘파랑새랑 닐스의 모험이 노벨상을 받은 작품일 줄은 몰랐어.’
노벨 문학상을 탄 작품 목록을 살펴보니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책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시집, 철학 도서 그리고 자서전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이 수상작으로 뽑혔지만, 명색이 소설 작가인 만큼 읽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필요한 책들을 모두 구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책을 읽기 전에 스캔 먼저 해야지.’
책상 위에 준비한 책들을 가지런히 놓은 다음 아카이브를 실행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홀로그램으로부터 푸른 빛이 쏘아지더니 책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30%…… 50%…… 80%……
각각의 책 위에는 작업 진행률을 알려 주는 프로그레스 바가 떠 있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네.’
10권의 책을 스캔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분, 한 권에 2분꼴로 이전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속도가 빨라졌는데, 이는 션 교수님께서 틈나는 대로 시스템을 업데이트해 주신 덕분이었다.
<사용자님의 요청에 따라 일루션을 실행합니다.>
스캔 작업이 끝난 것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가상 공간에 접속했다.
“아카이브를 켜 줘.”
가상 공간 안에서는 듣는 사람이 없었기에 편하게 말해도 됐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아카이브를 실행하겠습니다.>
지시를 들은 시스템은 아카이브를 실행시켰고 얼마 있지 않아 책 모양의 홀로그램이 테이블 위에 생성되었다.
나는 책을 읽기에 앞서 스캔이 잘 떠졌는지 확인했다.
션 교수님께서 신경 써서 만든 프로그램이 오류를 일으킬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일을 일일이 켜 보며 샅샅이 살펴보았다.
‘슬슬 읽어 볼까?’
파일 점검을 마친 나는 ‘파리대왕’이라 적힌 파일을 클릭한 뒤 실행시켰다.
파리대왕은 영국의 작가인 윌리엄 골딩이 쓴 것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 중에는 인지도가 높은 축에 속했다.
파리대왕은 6살부터 12살 사이의 아이들이 핵전쟁을 피해 무인도에 정착한 후 살아나가는 스토리로 얼핏 봤을 땐 톰 소여의 모험처럼 모험, 성장 소설로 여겨지기 쉬우나 어린아이들이 형성한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본능, 야만성 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번 기회에 사논 책들이나 다 읽어야겠다.’
예전에는 뻔한 이야기처럼 보였던 소설이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새롭게 다가왔다.
나이가 들어 소설을 보면 어렸을 적보다 경험이 쌓인 상태여서 더 깊이 있는 독서가 가능하다는 흔해 빠진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만큼 등장인물의 감정선과 주변 배경을 묘사하는 방식 그리고 독자에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서사를 어떤 식으로 전개하는지와 같은 테크닉들에 주안점을 두고 독서를 했다.
‘교본에 나왔던 문장들이랑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아.’
글쓰기 교본에는 학생들이 참고할 수 있게 총장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적은 예시 문장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단계가 올라감에 따라 예시 문장의 수준도 높아지는 것을 고려하면 저자인 윌리엄 골딩의 글솜씨가 총장님과 같은 수준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중급 교본에 나온 문장들과는 격차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리고 장편 소설이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재미와 작품성을 동시에 갖춰야 해서 다소 어렵게 쓰인 문장들도 공부를 한다는 기분으로 정성을 다하여 읽었다.
‘뭐야? 분석하면서 읽었는데도 1시간밖에 안 걸렸잖아?’
나는 요약, 분석문을 작성할 것을 대비하여 책 줄거리와 독서를 하며 느낀 점들을 중간중간 메모하며 읽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는 10pt로 4장을 적으라는 시스템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종이에 메모한 분량만 2장이 넘는 것을 확인한 뒤로는 독후감에 대한 걱정은 모두 떨치기로 했다.
예상보다 미션 수행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원래는 한 권을 읽을 때마다 30분간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지만, 현재 컨디션을 봤을 땐 2, 3권 정도는 쉬지 않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흐름을 탔을 땐, 밀고 나가야 하는 법.
나는 곧바로 다음 파일을 켠 뒤, 공격적으로 책을 읽어 나갔다.
* * *
월요일이 되었다.
어젯밤,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교수님은 나와 대화를 나눈 후, 연구원들을 닦달하여 최대한 빨리 내가 요청한 사안을 처리하려 노력했고 결국 자정이 되기 전에 작업을 완료했다.
비록, 현실 세계의 기기에 파일을 옮길 수 있는 기능은 추가하지 못하여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가상 공간에 컴퓨터와 똑같은 형태를 띤 기계를 배치해 주셔서 문서 작업을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만 대충 그려 줬을 뿐인데, 내가 사용하는 거랑 크게 차이가 없었어.’
나는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했을 때 뜨는 화면들을 최대한 정교하게 그려 교수님께 드렸었다.
단순히 겉 형태만 구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에 화면 안에 보이는 글자와 문양들 옆에 첨부해야 하는 기능들을 상세히 적어 놓았다.
건축으로 치면 일종의 도면과 같은 역할을 기대하며 열심히 끄적였지만, 한편으론 과연 이것만 가지고 워드 프로그램을 개발하실 수 있을까, 의심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 기우였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말이다.
‘하긴, 지구에 있는 개발자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카산트 대륙에서 가장 인정받는 공학자가 못 만드는 게 이상한 일이지.’
이세계의 지식이 지구의 것보다 족히 수백 년 이상은 앞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 만에 개발에 성공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진우야, 진우야!”
“어, 채원아. 나 불렀어?”
“칫,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정말 못 들었어?”
그녀는 여러 번 아는 척을 했는데도 대답은커녕 반응조차 하지 않자 삐져 있는 상태였다.
“미안해, 소설 관련해서 뭐 좀 생각하느라 네가 온지도 몰랐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뭐…….”
채원이 본인도 글쓰기에 몰입할 때면 주변 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내 말을 금방 이해해 줬다.
“아, 맞다 이번에 소설 하나 쓰기로 했다면서?”
“선배님이 알려 줬나 보네?”
이규석 선배와 채원이네 집안은 오랫동안 알고 지난 사이라서 상호 간에 왕래가 종종 있는 편이었다.
“혹시, 내가 알면 안 됐던 건 아니지?”
“응,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손을 저으며 채원이를 안심시켰다.
“장편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들었어.”
“맞아, 그것 때문에 주말 내내 쉬지도 못하고 계속 일만 했어.”
“벌써 집필에 들어간 거야?”
“나도 그러면 좋겠다.”
“하긴, 지금 연재하고 있는 작품도 많은데 무리긴 하겠다.”
채원이는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 연재야 예전부터 쭉 했던 거라 스트레스를 받거나 그러지는 않아. 그것보단 다른 게 문제지.”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웹소설만 조금 써 봤지, 일반 소설은 거의 안 써 봤잖아. 그래서 지난 주말부터 소설도 사서 읽고 급하게 준비하는 중이야.”
“내가 처음 소설 쓸 때 만들었던 작법 노트가 있는데, 한번 볼래? 최근에 추억 삼아 살펴보니까 지금 봐도 유용한 게 많더라고.”
“나야, 좋지.”
내 나름의 계획이 이미 다 서 있는 상황이라 굳이 채원이의 노트를 볼 필요는 없었지만, 거절했다가는 괜히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어서 노트를 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노트가 집에 있으니까 내일 아침에 줄게.”
“고마워, 채원아. 네가 신경 써 주니까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고맙긴, 친구끼리 당연히 도와줄 수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되게 피곤해 보인다.”
“이것저것 하느라 잠을 좀 설쳤거든, 저 채원아 미안한데 조회할 때쯤에 깨워 줄 수 있어? 잠깐 눈 좀 붙이려고.”
“응, 시간 맞춰서 깨워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자.”
나와 채원이는 평소에 일찍 등교하는 편이라 조회까지 40분가량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럼, 부탁할게.”
나는 이 말을 끝으로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일루션을 켜 줘.’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일루션을 실행하겠습니다.>
션 교수님께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 준 덕분에 미션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한결 수월해졌지만, 정작 내가 책을 다 읽지 못하여 워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어제 10권의 책을 모두 읽어야 했지만, 중간에 부모님과 외식을 하는 바람에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제 많이 읽어 놔서 다행이다.’
그나마 외식에 돌아온 이후로는 독서에 열중하여 9권의 책을 완독했고 남은 1권도 절반만 더 읽으면 돼서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집에 돌아가면 곧바로 워드 작업을 할 생각이었기에 학교에서 책 읽기를 마무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삐익-삐익
“뭐, 뭐야?”
가상 공간에 접속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시스템은 외부 위협을 경고하는 알람을 울려 대기 시작했다.
일루션이 실행되면 깊은 수면에 빠진 것과 유사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외부의 충격에 취약해지기 쉬웠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대비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시스템은 누군가가 나를 자극하면 외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송하여 가상 공간 내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게끔 작동되었다.
‘누군가 했더니 박건희잖아?’
화면을 보니 박건희가 엎드려 있는 나를 가리키며 뭐라 하고 있었고 채원이는 이런 그를 막아서며 날 보호하는 중이었다.
“진우 자고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다시 와서 이야기해.”
“선생님께서 오늘 점심 전까지 제출하라고 하셨어.”
“그럼, 수업 끝나고 쉬는 시간에 물어봐도 되잖아.”
윤채원은 박건희를 노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쉬는 시간에는 따로 해야 할 게 있어서 안 돼.”
“그건 네 사정이고 어쨌든 지금은…….”
“채원아 무슨 일이야?”
나는 눈을 비비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마냥 질문을 던졌다.
“내일부터 특별반 학생들 대상으로 상담이 이루어지는데, 원하는 학생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나 봐.”
“상담이면 뭐 진로나 입시 상담 같은 걸 말하는 거야? 하아 난 또 뭐라고…….”
녀석이 난리를 피운 탓에 일루션을 종료하고 급히 나왔건만 막상 사정을 들으니 허탈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한국대 경영학과였고 수시가 아닌 정시로 입학할 계획이어서 상담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네가 늦장을 피우는 바람에 한 달 후에나 상담이 가능할 것 같아.”
박건희는 손에 쥐고 있는 조사지를 흔들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상담을 맡은 사람은 외부에서 초청된 유명 강사로 개인 상담을 받으려면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했다.
그러나 특별반에 속한 학생이라면 공짜로 상담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먼저 상담을 받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건희는 희망 날짜를 적는 칸에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가장 마지막 날을 기입해 버렸다.
‘저런 놈은 애당초 특별반에 왔으면 안 됐어.’
박건희는 불과 1달 전만 해도 특별반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부동의 전교 1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족을 포함한 친인척 대부분이 전문직 종사자라는 게 소문이 나면서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게 컸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에다가 스타 웹소설 작가인 내가 등장하자 아이들은 녀석에 쏟던 관심을 모두 내게로 돌렸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학우들의 환호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박건희였지만, 막상 관심을 빼앗기게 되자 박탈감과 열등감에 허우적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