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30화 미션 그리고 또 미션 (2)
“따로 신청한 적도 없는데, 마지막 날에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게 무슨 소리야?”
나는 따로 상담을 받을 계획은 없었지만, 날짜가 이미 정해졌다는 박건희의 말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상담을 하든 말든 그런 건 관심 없어. 다만, 꼭 하고 싶다면 한 달 뒤에나 가능하다는 걸 알려 준 거뿐이야.”
박건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 날짜를 누가 정한 건데?”
“아까 말했잖아, 네가 늦장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날은 꽉 찬 상태야.”
‘나한테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는 거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자의 눈으로 녀석의 심리 상태를 알아본 결과 나에 대해서 적대적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상담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없는 상황이라 놈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든 상관이 없었으나 이대로 순순히 순응을 한다면 이후에도 계속 귀찮게 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적절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상담 날짜를 선착순으로 정했다는 말이야?”
“그런 건 모르겠고 상담을 할 건지 말 건지만 빨리 말해. 곧 있으면 선생님 오실 시간이야.”
그는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시계를 가리키며 재촉했다.
“선생님께서 상담 일정을 선착순으로 정했을 것 같진 않고 설마, 네가 멋대로 내 날짜를 정한 거냐?”
“네 지레짐작 따위에 놀아날 생각은 없어. 대답이 없으면 상담은 안 하는 걸로 할게.”
“야, 거기서.”
나는 자리로 돌아가려는 녀석을 붙잡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아까부터 태도가 왜 그래?”
“진우야, 그냥 무시해 저런 속 좁은 애랑 이야기 나눠 봤자 뭐 해.”
채원이는 박건희를 향해 경멸스러운 눈빛을 날리며 나를 만류했다.
‘씨발, 쌍으로 왜 지랄들이야.’
박건희는 내심 윤채원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계속 나를 옹호하자 속이 뒤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만 손해 보는 거면 모르겠는데,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일 처리 방식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
“풋, 평소에 학교 일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정의로운 척은 왜 하는 거야?”
“헛소리 그만하고, 그거 이리 줘 봐.”
나는 녀석의 손에 있던 종이를 가볍게 낚아챘다.
“씨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박건희는 씩씩거리며 서류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복싱을 연마한 내 몸에 손끝 하나 닿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흠, 예상대로네.”
“내, 내놔!”
“맨 처음 상담받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너잖아? 이거 딱 보니까 네가 임의대로 상담 순서를 정한 것 같은데?”
드르륵-
대화가 한참 열기를 띠고 있던 그때, 선생님께서 조회를 하기 위해 교문을 열고 들어왔다.
“거기 뒤에, 그만하고 다들 자리에 앉아.”
“야, 빨리 내놔.”
“싫은데?”
나는 선생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들고 있는 종이를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래 봤자, 너만 손해니까 얼른 주는 게 좋을 거야.”
잠시나마 당황한 기색을 보였던 박건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등등해졌다.
특별반을 전담한 선생님이 마침, 자신의 1, 2학년 담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 자식이 진짜.”
“애들아, 빨리 앉으라니까.”
담임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여전히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에 언성이 높아졌다.
“죄송합니다, 반장이 일을 공정하지 않게 처리하는 것 같아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멍청한 새끼, 그렇게 말해 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다.’
내가 본인에게 불리하게 진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태연자약했다.
박건희는 특별반 담임을 맡은 김성환 선생님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고 있었다.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할 뿐만 아니라 교내에서 열리는 영어, 수학 경시 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편의를 많이 봐주곤 했다.
작년에 1학년 대상으로 열렸던 영어 경시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1등이 다름 아닌 박건희였다.
“혹시 상담 때문에 그러는 거야?”
김성환은 박건희에게 최근에 시켰던 일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 괜찮으시면 방금 진우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 해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박건희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 미리 선수를 치며 들어왔다.
하지만, 담임은 손을 저으며 가만히 있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잠깐만 건희야. 일단 진우 이야기를 먼저 들어 보자.”
“네? 아, 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야?’
그는 선생님께서 자기편을 들지 않자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진우야, 계속해라.”
“네, 선생님. 오늘 반장이 저에게 오더니 상담을 받고 싶으면 마지막 날에 받으라고 통보를 하길래 미심쩍어서 서류를 잠깐 살펴봤습니다.”
나는 신청 현황이 표시된 종이를 선생님께 보여 드리며 말을 이어 갔다.
“상담 신청 여부도 묻지 않고 저를 맨 마지막 날에 배정한 부분도 이상했지만, 그것보단 가장 처음 상담을 받는 게 반장이라는 점에서 일이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 들 수도 있겠지만, 반장으로 선정된 학생들은 본인이 원하는 시기에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
“……그렇군요.”
선생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흠, 내가 잘못 봤나?’
처음 이 부분을 지적했을 때만 해도 녀석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박건희가 쩔쩔맸던 이유는 애들의 눈치가 보여서였지, 본인의 부정행위가 드러나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날 맨 앞으로 뒀겠냐?’
박건희는 나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런 그의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를 했네요.”
“아니야, 내가 공지를 안 한 건데 뭘. 반장에 있는 친구들은 특별반 운영 관련해서 수고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네가 이해해 줘라.”
“네, 선생님.”
담임이 나서서 사건을 무마하려는데 더 이상 항의를 하는 건 무의미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자리에 돌아가 앉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박건희의 목소리가 내 귓등을 때렸다.
“선생님 말씀 잘 들었지? 오해인 거 밝혀졌으니까 나한테 사과해.”
“뭐?”
“건희야, 그만해라.”
박건희의 뜬금없는 요청에 나와 선생님은 거의 동시에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억울해서 그렇습니다. 강진우가 애들 앞에서 제가 부정한 일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말하는 바람에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고요.”
“그래서 내가 대신 아니라고 설명을 해 줬잖아. 그리고 진우도 자기 잘못을 인정했으니까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만 들어가.”
‘아이 씨발, 왜 자꾸 저 새끼 편을 드는 거야?’
박건희는 보통 때와 다른 담임의 반응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어 속에 있는 생각들이 표현되진 않았지만, 흥분으로 인해 새빨개진 얼굴과 거칠어진 호흡은 그가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웬만해선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거 안 되겠네. 야, 박건희.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는 잘못 없는 줄 알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박정환, 민성훈, 최민영, 이세연. 얘네들도 다 우연이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담임은 박건희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거론한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우선적으로 상담을 받게 안배가 돼 있었는데, 이는 박건희가 뒤에서 손을 써서 가능한 일이었다.
방금 호명된 녀석들은 과거에 박건희와 스터디를 했거나 평소에 아부를 떨었던 놈들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담임이었던 김성환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박건희는 자신을 총애하던 담임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이 이상 일을 끌었다가는 망신을 당할 거라는 것을 깨닫고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멍청한 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진우랑 적이 되진 말았어야지.’
김성환은 박건희네 부모님하고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녀석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국체전과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로 교장, 교감 선생님은 물론 이사장님까지 나를 좋게 평가하고 있어서 박건희를 거들었다간 되려 본인이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동문 후원금까지 학교에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좋은 여론이 형성된 상황이었고 기부금 대부분이 특별반 운영 기금으로 쓰이기로 결정된 이후로는 나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한 담임이었다.
‘진우 덕분에 수당도 올랐는데 앞으로 잘 챙겨 줘야겠어.’
성문고에서 특별반을 부활시킨 이후, 할 일은 늘었지만, 이에 대한 보상은 충분하지 않아 선생님들은 공공연하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성문재단은 성문고등학교 외에도 서울 시내에 중학교와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재정적으로 쪼달리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영비 대부분을 외부에서 영입한 강사들에게 지불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내부 직원을 차별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기부를 했으니 선생님들 입장에선 내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한 번만 봐줄 테니까 잡음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
“네, 선생님.”
박건희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진우야. 상담 날짜 관련된 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강사님께 방과 후에 따로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드려 볼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근데 사실 저에게 상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학기에 상담을 받은 적도 있고 진로도 확실히 정해 놔서요.”
“상담을 늦게 받게 돼서 스트레스를 받은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담임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담이나 이런 걸 떠나서 반장이 저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나서 따지던 거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중간에 명쾌하게 처리해 주신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선생님께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렸다.
“하하, 이런 걸 가지고 감사는 무슨. 앞으로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담임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담임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수모를 반드시 갚아주겠어.’
박건희는 고교 생활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의지했던 선생님이 자신보다는 나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기회가 생기면 복수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나중에 여건이 조성되면 확실히 밟아 줘야겠어.’
나는 현자의 눈으로 녀석이 적대적인 감정을 거두지 않았음을 파악하고 있었고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감각적으로 알았다.
문학부 동아리에서 녀석과 비슷한 김호준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우야, 괜찮아?”
“응, 난 아무렇지도 않아.”
사태가 수습되고 자리에 앉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채원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 * *
다음 날, 늦은 오후.
‘드디어 끝났다.’
나는 마지막 책에 대한 요약, 분석문을 작성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