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31화 일사천리 (1)
“저, 선배님…….”
“어떤 말씀이든 편견 없이 들을 테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규석 선배는 선뜻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날 보며 이야기할 것을 권했다.
“번역에 관련된 부분은 저에게 일임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후배를 황당해하며 쳐다봤다.
“제가 쓰게 될 책에 대한 번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유능한 번역가들을 힘들게 구한 선배님의 노고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의사 표현을 할 때는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흠……. 보통 때라면 작가님의 결정을 당연히 존중해야 마땅하지만, 비즈니스 측면에서 봤을 땐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 될 것 같아 우려가 됩니다.”
“우리 말로 읽을 땐 깊은 맛이 나던 책도 번역이 잘못되면 그저 그런 책으로 전락하곤 합니다.”
“그걸 잘 아시는 분께서 왜 그런 선택을 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이규석 선배는 답답했는지, 커피 옆에 있던 냉수를 들이켜며 말했다.
“선배님, 소설이 출간된다면 성공을 가장 바랄 것 같은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그야, 당연히 글을 쓴 장본인인 작가님이시겠지요.”
“선배님 말씀처럼 저는 이번에 쓸 장편 소설에 사활을 걸 작정입니다. 이전에 썼던 웹소설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요.”
나는 선배님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번역만큼은 믿을 만한 번역가에게 맡겨야……. 혹시, 주변에 괜찮은 분을 알고 계셔서 말씀을 꺼내신 겁니까?”
선배는 내가 괜한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질문을 던졌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어.’
원래는 외국어에 능통한 지인에게 부탁한다는 식으로 말을 지어 내려 했지만, 완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장편 소설의 특성상 언젠가는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매사에 진중하게 행동하는 선배님의 모습을 봤을 때 거짓말을 한 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동안 쌓은 신뢰가 손상될 수 있어서 정공법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번역은 제가 하려고 합니다.”
“작가님께서요?”
“예, 제가 어렸을 적부터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오랫동안 했었거든요.”
나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그러신가요.”
이규석 선배는 황당한 나머지 내 말에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본 바로는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설마, 외국어 번역이 정말 가능하신 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내 말을 들었을 때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버럭 할 수도 있었지만, 1년가량 가까이에서 날 지켜봤던 선배는 판단이 쉽게 서지 않았다.
“작가님께서 쓰실 소설이 영미권을 포함한 여러 문화권의 나라에 출판될 계획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당장 옆 나라 중국과 일본의 인구만 합쳐도 15억 이상인데, 영어 번역본만 출간하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지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의 비중도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인도 사람들이 쓰는 힌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요.”
“어떤 언어든 상관없이 일정 규모 이상의 국가라면 출판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선배님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말씀하시는 것만 보면 방금 언급된 언어들은 구사할 줄 아시나 봅니다.”
“선배님을 설득하려면 직접 보여 드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군요.”
“작가님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복싱과 웹소설을 전업으로 하시는 분이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는 않네요.”
“그럼 번역가님들과 연락은 유지하되 제가 번역한 것을 보고 판단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흠…….”
상당히 합리적인 절충안을 내놓았음에도 선배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이규석 선배는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듣는 수밖에 없겠네요.”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작가님께서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도와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에 저희 쪽에서 일방적으로 일을 진행했다가는 작가님께서 스트레스를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복잡했던 마음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번역본을 보고 의견을 드리면 참고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는 번역을 맡겨 달라는 내 말에 지적하고 싶은 점들이 여럿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의견을 들어줬다.
‘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번역까지 한다라……. 5년이 아니라 10년, 20년을 해도 시간이 부족할 거야. 하지만 어쩌겠어. 본인의 의지가 이렇게 굳건한데, 괜히 첨언을 해 봤자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야.’
그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현자의 눈으로 선배가 어떤 상태인지 훤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긴말은 필요 없어. 최대한 빨리 성과로 보여 드리는 게 불신을 없애는 가장 빠른 길이야.’
작년에 국가 대표 선발전을 준비할 때도 관장님께 ‘일루션’을 활용한 가상 스파링 훈련에 대해 말씀을 못 한 적이 있었다.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간단한 런닝과 이미지 트레이닝만으로 대비를 하고 있다는 말에 관장님께서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내 기량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오른 것을 확인한 뒤로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일단 믿어 보자는 마인드로 바뀌셨다.
“제 말이 얼토당토않게 들린다는 건 잘 압니다. 그래도 끝까지 믿음을 가져 주시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까지 해 오셨던 것들이 있는데, 고작 한두 마디로 작가님을 의심하겠습니까? 저,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계획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네, 선배님. 일을 진행하다가 차질이 발생할 것 같으면 곧장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선배님께서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셔서 하는 말씀인 걸 알았으나 내 뜻이 받아들여진 이후로는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았다.
이후, 우리는 일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다가 식사까지 함께한 뒤 헤어졌다.
* * *
시간은 흘러 월요일이 되었다.
학교를 마친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공간에 접속했다.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아카이브를 실행합니다.>
나는 아카이브를 켠 뒤 고급 교본 파일을 클릭했다.
‘오늘은 기필코 미션을 끝내야겠어.’
선배님과 헤어진 후, 주말 내내 미션 수행에 전념했지만,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최근에 웹소설 미션을 수행한 덕분에 필력 레벨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고급 교본의 문제들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처음 문제를 풀었을 때처럼 10번 이상 오답 처리가 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매 문제마다 두세 번의 답안 수정이 이루어져서 진도가 빠지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답안도 적게는 A4 2장에서 많게는 A4 8장으로 초, 중급 교본들에 비교해서 훨씬 많은 분량을 요구했기에 한 문제 한 문제 풀어 나가는 게 만만치가 않았다.
“후우, 지겹다 진짜. 언제까지 이것들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거야?”
교본을 펼쳐 문제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틀 동안 고생한 덕분에 남은 문제가 많지는 않았지만, 한참을 또 풀어야 한다 생각하니 욕지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차피 할 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불평불만을 해 봤자 손해를 보는 건 나였다.
나는 기기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발, 이제 좀 끝내자.’
아공간을 기준으로 15시간이 지났다.
정신없이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문제까지 모두 풀고 채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문제의 경우 답안을 다섯 번 고친 상황이라 여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통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와아! 끝났다!!”
답안지에 푸른빛이 발해지는 것을 확인한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탄성을 질렀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스탯이 변화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Y/N>
‘고급 교본을 완독해서 주는 보상이네.’
미르헨 총장님이 저술한 교본들은 책 자체만으로 실력 향상이 커다란 도움이 되어서 중급 교본부터는 완독하는 것만으로도 스탯이 오르곤 했다.
‘흠, 경험치 +50%라…….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중급 교본을 풀 때보다 2배 이상의 노력과 힘을 들여 문제를 풀었음에도 경험치를 주는 것으로 보상은 끝이 났다.
그러나 레벨이 높아질수록 스탯을 올리는 게 어려운 것을 감안하면 50%의 경험치가 불공평하다고 볼 순 없었다.
<사용자께서 미션을 완료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목표: 미르헨 총장의 교재를 공부하십시오.>
<보상: 필력 LV UP.>
<보상을 적용하시겠습니까? Y/N>
“왜 안 나오나 했다.”
고급 교본까지 모두 마쳤으니 시스템이 미션 완료를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Y 버튼을 눌러 보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명작을 쓰는 데 지장이 없겠지?’
일전에 미르헨 총장님께서는 명작을 쓰기 위해서는 필력 레벨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논의한 바로는 최소한 LV 9, 넉넉잡아 LV 10에 도달해야 한다고 했는데, 현재 나의 필력 레벨은 10을 기록하고 있었다.
‘정말 역대급으로 힘들었던 것 같아.’
글쓰기 교본을 공부하는 것부터 추가 미션 수행까지, 여태껏 진행했던 그 어떤 과제들보다 까다롭고 지루했다.
그러나 미션이 어려웠던 만큼, 주어진 보상도 남달랐고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한 토대도 마련했기 때문에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총장님께 바로 연락을 드려야겠다.’
나는 장편 소설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을 찾아보겠다는 총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호출 버튼을 눌렀다.
사실 시간이 많이 늦어 내일 연락을 드리는 게 맞았지만, 이규석 선배님께 소설 초안을 빨리 보내 드려야 했기 때문에 서둘러 일을 진행해야 했다.
[아르마이스 님, 부르셨습니까?]
호출을 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총장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심한 시각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마침 보고드릴 게 있어서 언제 연락이 오나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아, 그럼 총장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겠습니까?”
[이런, 제가 괜한 소리를 했나 보군요. 아르마이스 님 말씀을 먼저 듣고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총장님은 손사래를 치며 먼저 말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냥, 내가 먼저 말하자.’
이런 상황에서 괜찮다는 말을 해 봤자 이야기만 길어질 게 뻔했다.
“총장님께서 주신 교본들을 모두 푸는 데 성공했습니다.”
[헉, 그게 정말입니까? 파일을 보내 준 게 불과 2주 전쯤인 것 같은데…….]
미르헨 총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총장님께서 만든 자동 채점 시스템 때문에 문제를 푸느라 애를 무척 먹었습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정말 다 푸신 모양이군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도 6개월 이상 걸리는 과정을 이렇게 빨리 끝내시다니……. 과연 아르마이스 님이십니다.]
“교재를 워낙 체계적으로 구성해 놓으셔서 생각보다 진도가 금방금방 빠지더라고요.”
나는 총장님의 극찬에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허허, 분명 이곳의 인재들도 똑같은 교재를 봤을 텐데, 어찌 이리 차이를 보일까요.]
“일루션 덕분에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었던 부분도 있어서 제가 더 낫다고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저 그리고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미르헨 총장님은 차분히 내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