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20화 (120/122)

120. 31화 일사천리 (2)

“총장님께서 예전에 명작을 쓰려면 필력 수치를 일정 부분 올려야 한다고 하신 거 기억하십니까?”

[예, 아르마이스 님에게 내재된 시스템 기준으로 LV 9 이상은 돼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미르헨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미션을 수행한 덕에 현재 저의 필력 레벨은 10이 되었습니다.”

[9도 아니고 10이라고요? 이전에는 원래 6 아니셨습니까?]

“맞습니다.”

[허허, 불과 2, 3주 만에 레벨이 4단계나 뛰어오르신 거군요. 아르마이스 님께서 전생에 카산트 대륙을 호령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전 오히려 총장님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있는 명작들을 숱하게 읽어도 레벨이 오를까 말까 하는데, 글쓰기 교본을 공부하니 스탯이 쑥쑥 오르더군요.”

[카산트 대륙 전역에 있는 이론들과 문제들을 모두 끌어다가 만든 책이어서 그럴 겁니다. 그나저나 스탯이 최소 요구치를 뛰어넘었으니 당장 내일부터 집필에 들어가셔도 되겠습니다.]

“예, 사실 집필에 대해 논의를 하려고 총장님을 호출한 겁니다.”

[저도 마침 집필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아르마이스 님께 알려 드리려고 하던 참인데, 잘됐네요.]

“좋은 방법이라도 찾으신 모양이군요. 잠시만요, 적을 것 좀 가져올게요.”

총장님께서 방안을 말씀하실 때면 이를 받아 적는 습관이 있었다.

[말씀드릴 내용이 길지 않아서 그냥 들으셔도 무방합니다. 어쨌든 설명 시작하겠습니다.]

“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장편 소설을 잘 쓰기 위해서는 필력도 필력이지만, 무엇보다 소재가 좋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작품성을 갖춘 소설이라도 독자들로부터 흥미를 끌어내지 못하면 교과서에는 실릴지는 몰라도 흥행을 하긴 어려울 테니까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아르마이스 님이 미션을 수행하시는 동안, 저는 보내 주신 소설들을 읽으며 분석을 해 봤습니다. 그 결과 인기를 끈 소설들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는 이쪽 세상의 베스트셀러를 보내 달라는 총장님의 요청에 수십 권의 도서를 스캔하여 전송해 드린 바 있었다.

“특징이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결국 어떤 소재로 썼는지를 알려 주시려는 거 아닙니까?”

[하하, 저와 안 지도 1년이 넘으셔서 그런가 척하면 척이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발견한 특징들은 인기 있는 웹소설의 구성 요소와 대동소이해서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건은 결국 어떤 소재로 소설을 쓰냐인데, 보내 주신 소설들을 살펴본 결과 역사와 판타지 소설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판타지 소설의 대표적 주자라고 하면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이 있을 것이고 역사 소설 중에는 ‘삼국지’, ‘수호전’, ‘태백산맥’과 같은 것들이 대중들에게 많이 읽힌 책들이라 볼 수 있었다.

물론 셜록홈즈와 같이 추리 장르로 성공한 장편 소설도 있긴 하지만, 판타지와 역사 장르가 장편 소설 쪽에서 강세를 보였던 건 사실이었다.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가 됐던 작품들을 보면 역사와 판타지 장르가 많긴 했었죠.”

[사실, 카산트 대륙도 마찬가지랍니다. 이곳에는 판타지라는 장르는 없지만, 외계 생명체가 나오는 소설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걸까?’

나는 신이 나서 설명하는 총장님을 맥 빠진 얼굴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방금 하신 말씀도 그랬다.

내가 문제에 직면할 때면 명쾌한 혜안을 주셨던 것과 비교하면 조금 전의 말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답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마이스 님, 혹 고민이라도 있는 겁니까?]

“네? 아, 그게…….”

[무슨 말이든 개의치 마시고 편하게 하십시오.]

미르헨 총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내를 털어놓을 것을 권했다.

이렇게나 나를 생각해 주시는 분께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적절한 멘트를 떠올린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장님이 애써 주신 덕분에 어떤 장르의 소설을 써야 되는지는 알아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아시다시피 장편 소설이라는 게 긴 호흡으로 글을 써야 돼서 무작정 집필에 들어갔다가는 계획했던 분량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거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은 소재로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냈으니까요.]

“방법을 이미 찾아 놓으셨군요!”

[아르마이스 님이 이번 장편 소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이곳에 올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말을 하다 멈추고 놀란 기색을 드러내자 총장님은 새삼스럽게 왜 이러시냐는 듯한 투로 대화를 이어 갔다.

[저는 아카데미 졸업생 중 문학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자들을 초청하여 새로 쓸 장편 소설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취합했습니다. 그 결과 역사와 판타지성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성공했고요.]

‘아오, 빨리 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다.’

겉으로는 차분하게 듣는 척을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빨리 말하라며 재촉하고 싶었다.

[예전에 제가 카산트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스테디셀러가 뭔지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제 전생에 관련된 책들이 가장 많이 팔렸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일전에 총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르마이스 님은 대륙을 구한 영웅으로서 지금도 그 인기가 여전히 높으십니다. 일례로 시, 소설, 희곡, 위인전 등 어떤 장르로 출간되어도 1위를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익히 말씀은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아르마이스 님을 주제로 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케이스는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에도 가장 유명한 책은 ‘영웅 일대기’라는 소설입니다.]

“저를 주제로 한 책인데 제목이 영웅 일대기라고요?”

‘차라리 아르마이스 일대기라고 하지 뭐하러 영웅이라는 단어는 썼데…….’

내 입으로 아르마이스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니 스테디셀러니 하여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영웅 일대기’라는 제목을 듣자 민망함을 넘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카산트 대륙에 최초의 문명이 탄생한 이래로 가장 출중한 인물로 꼽히시는 분인데, 영웅이라는 말도 부족하지요.]

“저, 알겠으니까 계속 말씀하시죠.”

[알겠습니다. 어쨌든 이 영웅 일대기는 단순히 아르마이스 님을 소재로 쓴 소설이라 유명한 것이 아니라 작품성과 재미 그리고 현실 고증까지 잘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900년 전에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판매량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서 대륙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도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쓰셨는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하네요.”

9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상위 랭크를 유지했다는 말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을 쓰신 분은 아르마이스 님의 동료였던 사라 페이트 경이십니다.]

“과거에 말씀하신 적이 있던 것 같습니다.”

사라 페이트는 아르마이스가 마왕과 대적할 때 함께했던 동료로 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한 음유시인이었다.

그녀는 시, 소설, 희곡 등 문학 방면에 천재성을 드러냈음은 물론이고 언어 능력도 탁월하여 동물, 식물은 물론 몬스터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페이트 경은 음유시인이라는 직업에 걸맞은 뛰어난 암기력을 갖고 계셔서 아르마이스 님과 함께했던 순간순간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책들보다 아르마이스 님에 관한 정보가 가장 상세히 서술되어 있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무슨 책인지 무척 궁금하군요. 괜찮다면 잠깐 살펴볼 수 있을까요?”

[아카이브에 이미 업로드를 해 놓았으니 원하실 때 언제든지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미르헨 총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웅 일대기는 현실 고증이 잘되었다는 면에서 역사 소설의 특징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카산트 대륙을 배경으로 서사가 전개되기 때문에 판타지적인 특징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량도 4,000P에 달하여서 참고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참고가 아니라 치트키 수준이네요.”

[치트키요? 그게 뭡니까?]

총장님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시험을 치기 하루 전에 답안지를 구한 심정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큰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군요.]

“맞습니다. 덕분에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책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시기보단, 가공 과정을 한번 거쳐서 출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웅 일대기는 희곡, 소설, 시, 산문 등 다양한 장르가 혼재된 글이어서 형식이 통일된 지구의 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라 페이트는 관습이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글 안에서 자유로움과 호방함을 쉽게 엿볼 수 있었다.

이런 그녀의 글에 대해 비판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문학적 가치가 워낙 뛰어나고 읽다 보면 금세 빠져들게 만드는 흡입력도 갖고 있어 호평을 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이곳의 소설과 형식이 약간 다르다곤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요소들이 차고 넘쳐서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세계관 그리고 에피소드들만 참고해도 엄청난 수확이지요.]

소설가들이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 은근히 애를 먹는 것 중 하나가 명칭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영웅 일대기’를 참조하면 인물명이나 몬스터 이름부터 건물, 산, 국가, 도시 등처럼 배경이 되는 곳들의 명칭까지 해결할 수 있기에 글 쓰는 속도를 빠르게 증진시킬 수 있었다.

[이만하면 전달 드릴 사안은 모두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혹시, 또 궁금하신 게 있으신지요?]

“일단은 글을 써 보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드린 정보에 만족해하시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미르헨 총장은 화색이 가득한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고민이 깊었는데, 구체적인 방안을 알려 주신 덕분에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 기분입니다.”

[하하, 아르마이스 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연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자 총장님도 나에게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우리는 장편 소설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흠, 시간이 너무 늦었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루션에 접속하여 ‘영웅 일대기’를 탐독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시험 결과가 벌써 나왔나 보네?’

7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생들은 사물함에서 책을 빼는 등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난주 금요일에 있던 월말 평가에서 등수 안에 들지 못해, 원래 있던 반으로 돌아갈 애들이었다.

“진우야, 나 왔어.”

“어, 재웅아.”

엄재웅은 양손에 책을 가득 든 채 반으로 들어왔다.

월말 평가는 특별반에 소속된 학생들과 1학기 기말고사에서 40등 안에 든 학생들이 응시할 수 있었는데, 후자에 속했던 그는 25등 안에 들어 특별반 입성에 성공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부탁은 무슨……. 책 무겁겠다, 나한테 좀 줘.”

나는 재웅이가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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