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31화 일사천리 (3)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은 하나둘 반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 월말 평가에서 박건희가 1등했대.”
“새삼스럽게 그런 걸로 놀래. 원래 1등은 항상 건희 차지였잖아.”
학생들은 전에 치렀던 월말 평가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교우들의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책상에 앉아 참고서를 읽던 박건희는 벌떡 일어나더니 교실 뒤편에 있는 게시판에 다가가 핀셋으로 종이 하나를 고정했다.
“야, 성적표 나왔어.”
“아, 진짜?”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하던 아이들은 성적표라는 말에 게시판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휴,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
재웅이는 24등 턱걸이로 반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등이면 뭐 나쁘지 않네.’
선발 고사에 합격한 이후로 시간을 내서 공부한 적이 없었기에 3등을 했다고 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번보다 성적이 조금 떨어졌더라?”
“그렇긴 한데 그걸 왜 네가 신경 쓰는 거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박건희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월말 평가는 선발 고사 문제를 만들었던 학원에 출제를 의뢰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시험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국대 경영학과를 희망하는 놈치고는 점수가 부족한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거야.”
7월 이후로 공부는 아예 손을 놓은 탓에 점수가 약간 하락한 상황이었다.
“내가 한국대 경영학과를 지망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교무실에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
“반장이라길래 우리를 위해서 애쓰는 줄 알았는데, 남 사생활이나 훔쳐볼 줄은 몰랐네?”
“선생님 책상 위에 서류가 올려져 있어서 본 거니까 오버하지 마라. 그나저나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어. 그 점수면 경영학과는 고사하고 한국대 입학도 간당간당한 수준이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할 일이나 잘해.”
“성적표 확인 안 했어? 난 보시다시피 아무 걱정 없어.”
‘유치해서 말도 잘 안 나오네.’
어린아이나 할 법한 유치한 언행에 얄미운 것을 넘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쯧, 어딜 가나 김호준 같은 놈들은 꼭 하나씩 있구나?”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재웅이는 혀를 차며 말했다.
“아, 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지? 등수를 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던데?”
“그래, 넌 공부 잘해서 좋겠다. 진우야, 가자.”
엄재웅은 문학부 동아리에서 이미 김호준을 겪은 덕분에 박건희의 텃세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한동안 피곤하겠어.’
박건희 같은 녀석은 실력으로 눌러야 입을 다무는 법인데, 올 한해는 복싱과 소설에 전념할 계획이라 성적으로 놈을 이길 길이 요원했다.
하지만, 하늘이 내 마음이라도 읽은 걸까, 기회는 예상보다 쉽게 찾아왔다.
“오늘 나간 학생들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친구가 있을 수도 있는데, 특별반 특성상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아, 그리고 1, 2교시는 외부에서 온 논술 선생님이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시니까 수업 잘 듣고.”
김성환 선생님은 보통 때처럼 아이들에게 공지 사항을 전달했다.
“저, 수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나요?”
이야기를 들은 학생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1교시에는 자소서 특강이 있고 2교시에는 논술 특강이 있을 거라던데? 자세한 건 강사님께서 말씀해 주실 거니까 기다렸다가 직접 물어봐라.”
‘굳이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네.’
그동안 미션을 쉬지 않고 수행해서 글 쓰는 거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박건희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시간은 흘러 1교시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대산학원 논술 강사 김현일이라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입시에 있어서 중요한 자기소개서와 논술 쓰기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정시의 비중이 늘어서 수시의 중요성을 무시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서울 소재 대학에서 올린 입학 요강을 살펴보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한0영대학교에서 배포한 자료에0000000000000000000000 따르면…….”
김현일 강사는 학생부 종합 전형과 같이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수시 전형을 각 학교별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차라리 수시를 준비하는 게 더 나으려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 봤음 직할 명문 사립대 중에는 자기소개서를 비롯한 각종 서류만으로 입학할 수 있는 학교들도 존재했다.
애당초 정시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수시로 방향을 선회할 생각은 없었지만, 서류와 자소서로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었다.
“강사들이 자기소개서를 잘 쓰는 팁을 알려 주곤 하지만, 사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우선 필기구와 노트를 꺼낸 후에 고교 생활 동안 자신이 했던 활동들을 쭉 씁니다. 그다음에는 내 이력에 맞춰서 학교에서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것을 멋들어지게 서술하면 끝이지요. 말만 들었을 땐 쉬워 보여서 자기소개서만으로 변별력을 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시겠지만, 위 사례들을 보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강사는 여러 사례를 보여 주며 자기소개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슷한 스펙을 가졌으나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케이스부터, 명문대까지는 아니지만, 자기소개서 하나로 괜찮은 학교에 들어간 학생까지 여러 사례를 선보였다.
“자기소개서가 입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셨을 겁니다. 다음으로는 자소서에서 자주 나오는 대표 항목들을 살펴볼 건데, 그 전에 여러분들과 5분 정도 질의응답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는 앞줄에서 손을 올리고 있는 박건희를 발견하고 발언권을 줬다.
“안녕하세요, 박건희라고 합니다. 주제넘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조심스럽게 건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여기 있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수업을 하기보단, 자소서를 제대로 써 보고 간단하게나마 피드백을 해 주시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흠……. 당혹스럽긴 하지만, 일리가 있긴 하네요.”
학교에 오기 전에 이미 정해 놓은 수업 방식을 갑자기 바꾸라는 박건희의 말에 불쾌감이 들었으나 틀린 소리는 아니었기에 대놓고 거부하기는 애매했다.
‘하긴, 뻔한 내용 소개하고 자소서 한두 줄 끄적거리는 것보단 제대로 써 보고 피드백을 받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제안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던 강사는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는 자기소개서 강의를 1교시만 진행하려고 했지만, 이를 연장하여 2교시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쉬는 시간까지 35분이 남았는데, 중간에 휴식 시간 없이 스트레이트로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대신 2교시에는 10분 빨리 수업을 마칠 테니까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김현일 강사는 말을 마친 뒤, 스크린에 한세대학교에서 만든 자소서 항목을 띄웠다.
“이건 한세대학교 자율전공학부를 지원할 때 쓰는 자기소개서입니다. 지금부터 50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만 내용을 채워 보세요.”
강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들은 노트를 꺼내어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직접 손으로 써서 힘들 순 있겠지만, 분량이 천 자밖에 안 돼서 그럭저럭 할 만할 거야.’
그는 고개를 박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세대학교 자소서는 500자 분량을 요구하는 항목 2개로 구성되어서 다른 학교에 비해 쓰는 부담이 덜했다.
게다가 500자는 띄어쓰기를 포함했기 때문에 빠르게 쓰면 분량은 어떻게든 채울 수 있었다.
‘멍청한 놈, 뭘 알고 저렇게 열심히 쓰는 건가?’
박건희는 자소서를 쓰고 있는 날 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미 1학년 때 주요 대학에 대한 분석을 모두 마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쌓아 온 경험을 한세대학교에서 추구하는 인재상에 맞게 쓸 계획이 모두 서 있었다.
“자, 약속한 50분이 모두 지났습니다. 뒤편에 있는 학생은 앞에 있는 학생에게 자신이 쓴 자소서를 전달하세요.”
학생들은 강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쓴 자소서를 앞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25명이 쓴 자소서가 교탁 위에 놓여졌다.
“여러분들이 쓴 자소서를 검토하는 동안 잠시 영상을 시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일 강사는 준비해 온 교육 영상을 틀어 준 뒤, 자소서를 빠르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년간, 수많은 자소서를 첨삭을 해 왔기 때문에 잘 쓰여졌는지 아닌지 순식간에 판별할 수 있었다.
그렇게 15분쯤 지났을까, 강사는 영상을 종료하고 수업을 재개했다.
“오늘 쓰신 자소서는 제가 일일이 첨삭해서 다음 수업 시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동안 자소서들을 쭉 훑어봤는데 잘 쓰인 글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학원 선생님들이 성문고 성문고 하는 다 이유가 있더군요.”
그는 덕담으로 첫 마디를 떼었다.
“눈에 띄는 자소서들이 여러 개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딱 두 개만 살펴보고 오늘 수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 혹시 본인의 자소서가 노출되는 게 꺼려지시는 분 있으신가요? 있으면 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김일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생들에게 물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우선 윤채원 양이 쓴 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여러 좋은 자소서들 사이에서도 채원 양이 쓴 것을 택한 이유는 글 자체가 흥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소설을 써 봐서 그런가…….”
‘쳇,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박건희는 자신이 뽑히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강사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윤채원은 소설을 여러 권 출간한 유명 작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면이 있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자소서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까지 검토한 자소서들이 천 개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그중 가장 잘 썼다고 해도 될 정도니까요.”
‘강사님께서 조금 오버하시는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오늘 자소서는 정말 잘 써지긴 했어.’
박건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자소서의 주인공이 당연히 본인이라고 자신했다.
“어, 여깄네요. 다음으로 강진우 학생이 쓴 자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소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다름 아닌 문장력입니다. 윤채원 양의 글이 글쓴이가 누군지 궁금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면 강진우 군의 글은 학식이 깊은 학자가 쓴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 글을 보시면…….”
김현일 강사는 내가 쓴 문장 몇 개를 낭독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에 박건희는 소태 씹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3등 안에도 못 든 거야?’
그는 자신이 쓴 글이 강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공부와 관련된 거라면 무엇이든 1등을 해야 직성에 풀렸기 때문이다.
“이 자소서의 특징은 천 자 남짓한 글로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는 겁니다. 자기소개서는 분량이 제한되어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야 하는데, 여기 문장들을 보면 간결하면서도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완결성을 갖췄음은 물론 흔한 실수도 보이지 않아서 대단히 잘 쓴 자소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현일 강사는 내 자소서가 매우 잘 쓰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설명을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