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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122화 (122/122)

122. 31화 일사천리 (4)

“얼마나 잘 썼길래 그러지?”

“그러게, 학원에서 허구한 날 자소서를 읽으셨을 텐데, 이제까지 본 것 중 최고라고 하시잖아.”

학생들은 내 자소서를 두고 저마다 궁금증을 드러냈다.

‘씨발, 짜증나네 진짜…….’

박건희는 수군거리는 아이들을 보니 짜증이 밀려왔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시간 관계상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것들 외에도 잘 쓰인 것들이 몇 개 더 있었습니다. 특히 박건희 군과 임미나 양의 자소서는 다른 학생들이 참고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선생님.”

김현일 강사가 자신을 언급하자 박건희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네, 말씀하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 자소서에 대한 평을 들을 수 있을까요?”

‘쯧쯧,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네.’

나는 박건희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겉으론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눈빛이나 목소리는 오기로 가득했다.

“왜 평을 듣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힘들 것 같네요. 만약, 박건희 군이 쓴 자소서를 평가하게 되면 다른 학생들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거든요.”

“평이 어려우시면 왜 제 자소서가 선택되지 않았는지만 알 수 있을까요?”

“후우, 지금도 충분히 잘 쓰시는 편인데 선택이 되고 안 되고 그렇게 중요합니까?”

김현일 강사는 박건희의 억지에 짜증이 올라왔다.

“자세한 평을 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이유만 좀 알고 싶어서요.”

“선택을 하지 않은 이유라…….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사는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박건희 학생의 자소서는 학원 수업을 충실히 받은 학생이 작성한 것처럼 완벽에 가까운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수행했던 교내 활동과 교외 활동을 항목에 맞춰 적절히 서술했음은 물론 한세대학교에서 표방하는 인재상에 맞게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여 공을 들여 쓴 것이 보였습니다.”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설명대로라면 제 자소서가 앞선 두 학생의 것에 밀릴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잘 쓴 건 맞지만 특색이 없다고 느껴서 그랬습니다. 아시겠어요?”

“…….”

계속되는 고집에 강사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자 박건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표정을 보니까 아직도 납득이 안 되시는 모양인데, 예를 들어 드리죠. 성문고에 다니는 학생 중 아무나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관리해서 가르치면 박건희 군이 쓴 자소서의 퀄리티를 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강진우 군이나 윤채원 양의 자소서는 단기간 가르쳐서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요. 자, 이해되셨죠?”

“네…….”

박건희는 풀 죽은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상으로 오늘 수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주요 대학에서 출제됐던 문제를 중심으로 논술 쓰기를 공부할 예정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강진우 학생 잠깐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예.”

나는 강사님의 부름에 앞으로 나갔다.

“혹시, 우리 학원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요?”

“네?”

뜻밖의 이야기에 난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정식으로 일하자는 건 아니고 원생들이 쓴 자소서를 첨삭해 줄 수 있나 해서요. 그냥 2주가량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고액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하는 일이 많아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황상 300 이상 되는 돈을 줄 것처럼 보였지만, 웹소설 수익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기 때문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말만 아르바이트지 다른 분들보다 페이도 훨씬 더 쳐서 주겠습니다. 아직 학생이신 것 같아 정확한 액수를 언급하기 좀 그렇지만, 500 안팍으로 챙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하는 일도 하는 일인데, 11월에는 따로 준비할 것도 있어서요.”

“정말 아쉽게 됐군요. 강진우 군이 함께해 주면 작업이 훨씬 수월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내 글쓰기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챈 김현일 강사는 어떻게든 연을 맺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는 강남에 소재한 대형 학원에 출강하는 것 외에도 글 쓰는 법과 독서법에 관한 책을 제작하는 연구소를 직접 경영하고 있었다.

‘학생 신분만 아니라면 곧바로 책을 출간해도 무방하겠어.’

책 제작의 경우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짬짬이 할 수 있었고 나 정도의 실력이면 대중들의 호응을 금방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거듭 권유를 하고 있는 거였다.

“더 이상 말씀드렸다가는 강요하는 꼴이 되겠군요. 그럼 우선 명함만 드리고 갈 테니까 생각이 있으시면 연락을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씨발, 저 새끼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난리야?’

박건희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명함을 건네는 강사의 모습에 질투심이 올라왔다.

‘휴우, 참 피곤하게도 산다.’

강사와 대화를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온 나는 현자의 눈으로 박건희의 감정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년에 김호준과 유사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긴 해도 저런 녀석과 한 공간에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안쓰럽기도 하네.’

그래도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 웹소설에서의 성공은 과거의 상처에 허우적거리던 나를 대범하면서도 의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사람은 성공하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순간이었다.

* * *

부산했던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보통의 학생이라면 일과를 마친 후 게임을 하거나 재미있는 동영상을 시청하며 지쳐 있던 심신을 달랠 테지만, 나는 방과 후부터가 본격적인 일상의 시작이었다.

‘일루션 켜 줘.’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일루션을 실행하겠습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일루션을 실행했다.

다음 달 말까지 이규석 선배에게 소설 초안과 번역본을 넘겨주기 위해서는 오늘부터 당장 작업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은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기에 앞서 소설 제목을 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원작 제목인 ‘영웅 일대기’를 그대로 사용할까 고민도 했지만, 촌스러운 느낌이 있어 새 제목을 정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하아, 뭘로 해야 할지 모르겠네.”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 가게로 치면 간판에 해당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여서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무협 소설의 제목처럼 사자성어로 지어 보기도 하고 웹소설처럼 제목을 감각적으로 지어 보기도 했으나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한 거라곤 썼다 지웠다뿐이었다.

‘그래, 그냥 아르마이스로 하자.’

나는 세계에서 가장 히트한 소설 해리포터가 제목을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을 떠올리고는 1P 맨 상단에 아르마이스라고 큼직하게 적어 넣었다.

“아카이브.”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아카이브가 실행됩니다.>

‘어디 보자.’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책 모형의 홀로그램이 떴다.

나는 도서 목록에서 ‘영웅 일대기’를 찾은 후 손가락으로 눌렀다.

‘자존심 부리지 말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글을 쓰자.’

영웅 일대기는 아르마이스가 태어난 마을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책의 저자인 사라 페이트는 대륙 곳곳을 방랑했던 사람답게 풍경을 묘사하는 실력이 아주 탁월했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감각적인 묘사야.’

원래는 글에서 풍기는 느낌과 내용은 활용하되 표현은 내 스타일대로 하자는 주의였으나 막상 소설을 읽으니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문장들이 적지 않았다.

‘어? 갑자기 웬 미션이지?’

영웅 일대기 첫 장을 읽고 워드 작업에 돌입하려던 그때, 허공에 화면이 떠올랐다.

<아르마이스의 의지가 발동되었습니다.>

<사용자에게 미션이 생성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목표: 책 안에서 쓰인 표현법과 소설 기법을 익히십시오.>

<보상: 필력 LV UP.>

‘이거 완전 개꿀미션이잖아?’

나는 미션 내용을 확인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사실 미션이 아니더라도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이나 배경을 묘사하는 법은 참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순히 읽는 행위만으로 사라 페이트의 작법을 흉내 낼 수 없겠지만, 필력 레벨 10에 달하는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수락 버튼을 누른 후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타닥-타닥-타닥

족히 수십 명은 수용할 만한 크기의 아공간에는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가라 불리는 작가들도 소설 초입 부분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작성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충분한 필력과 참고 도서를 갖춘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대충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어.’

내 작업 방식은 이랬다.

영웅 일대기를 키보드로 타이핑을 쳐 가며 읽는다.

이후, 일정 분량이 쌓이면 옮겨 쓴 원고를 다시 한번 읽으며 수정할 부분을 찾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살려야 될 부분은 최대한 살리되, 수정할 곳이 발견되면 사라 페이트의 작법을 참고한 후 적절하게 고쳐 나갔다.

“와, 작업을 벌써 이만큼이나 한 거야?”

작업에 돌입한 지 아공간 기준으로 다섯 시간이 흘렀다.

나는 쉬지 않고 작업을 한 덕분에 종이로는 120P, 책으로 치면 1/3권에 해당한 분량의 소설을 집필하는 데 성공했다.

‘군더더기도 없어서 이걸 바로 인쇄해도 되겠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업물을 통독하며 수정할 곳이 있는지 샅샅이 살펴봤으나 앞선 작업에서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어떤 오류도 발견되지 않았다.

‘뒷 내용부터는 이렇게 빨리 쓰는 건 무리겠지?’

영웅 일대기 1권 중 절반에 가까운 양을 읽었지만, 아직 희곡이나 시 형식으로 서술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형식으로 쓰인 내용을 소설 형식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해 본 적은 없으나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즉, 지금까지 보여 준 작업 속도를 유지하는 게 상당히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열심히 쓴다면 10권 분량의 소설을 집필하는 데 두 달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집필 방향은 잡혔으니까 다음엔 번역을 해 보자.’

나는 소설 원고 옆에 새 창을 띄운 뒤 영어 번역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자동 번역 기능이 주는 효능에 새삼 놀라는 나였다.

한글로 쓰인 원고를 영어로 해석하겠다는 생각을 하자 머릿속에 이에 부합하는 영어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기계와 같은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나였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기존에 썼던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을 모두 완료했다.

‘초안이랑 번역본까지 해서 다음 주 중에 보내 드릴 수 있겠어.’

선배님이 요구하신 번역본은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이 세 가지였다.

자동 번역 기능은 이 세상 모든 언어에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다른 언어라고 작업 시간이 변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다.

“후, 좀 살 것 같다.”

작업에 돌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양의 소설을 집필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엄청났다.

게다가 선배님께 다음 달 중에 초안과 번역본을 보내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가중됐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예상 밖으로 집필이 수월함을 확인하자 부담감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설레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빨리 성공할 수도 있겠어.’

최소 3년으로 계획했던 집필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건 내가 꿈꿨던 삶이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세계 사람들이 자꾸만 보은한다 1부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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