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예에?!”
세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 아가씨? 갑자기 왜…….”
“안 가.”
“네?”
“아카데미에 안 간다고.”
이것은 비로소 얻은 휴식의 연장선이다.
‘그래, 휴식. 그리고 기회.’
평생 일에만 파묻혀 살아야 했던 피로하고 가여운 인생을 보상받을 기회.
아델리아가 침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난 이제부터 정말, 진짜, 열심히 놀기만 할 거야, 세라.”
“예……?”
세라가 멍하니 되물었지만 아델리아는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저 침대로 걸어가 이불 위로 몸을 던졌다.
자그마한 아델리아의 몸이 푹신한 침대에 움푹 파묻혔다.
아, 좋다…….
그래, 기억난다. 내 침대가 이런 느낌이었지. 내 삶에 이런 포근한 시절도 있긴 했었어.
아델리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이불에 얼굴을 비볐다.
‘아카데미든, 황궁이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어.’
과거와 똑같은 길을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아델리아는 이 기회를, 신이 준 정당한 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난 은퇴했으니까.’
영웅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그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다시 나갈 일도 없고, 황족의 방패막이가 되어 제국민들 앞에서 욕받이가 될 필요도 없다.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할래.’
이렇게 폭신하고 향기 좋은 침대에 누워 본 게 언제였더라.
‘이제 정말, ……쉬고 싶어.’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그 기본적인 것들을 누리며 살고 싶어.
아델리아가 이불을 끌어안았다.
햇살의 향기가 이불에 녹아난 듯 포근했다. 그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을 들이마시고 있자니 눈꺼풀이 절로 무거워졌다.
아델리아가 이불에 파묻혀 조용해지자, 짐가방을 구석으로 치우고 있던 세라가 다가왔다.
“아가씨, 졸리세요? 이대로 주무시면 감기 걸려요.”
“…….”
“아가씨? 아가씨?!”
“…….”
아이참, 세라가 잔소리를 덧붙이며 아델리아를 제대로 눕혔다.
문득, 세라의 친근한 잔소리와 다정한 손길 또한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세라를 마지막으로 본 게 20년 전이었으니 낯설 법도 한데.
‘그리웠구나…….’
아델리아가 옅게 미소 지으며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펠슨 선생, 그대의 뜻대로 공작저로 돌아오긴 했네요. 이렇게 올 줄은 나도, 그대도 몰랐겠지만…….’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의식이 침대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세라의 잔소리도 아득히 멀어져 갔다.
***
-[펠슨 선생은 돌팔이예요, 누님.]
-평가가 꽤 박하구나.
펠슨이 오두막을 찾아왔다 떠난 날이면 성검은 어김없이 투덜거렸다.
그럴 때마다, 아델리아는 웃으며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펠슨은 아델리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은 오두막을 찾아왔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친우를 걱정하는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매번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아…….
펠슨은 아델리아를 위해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그의 얼굴이 초췌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펠슨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매번,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참담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부터는 아델리아의 남아 있던 왼쪽 다리도 굳기 시작했다.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절뚝이며 걸어갔다. 오래된 오두막의 나무 바닥이 불규칙하게 삐걱거렸다.
-상태를 보니 내일이면 완전히 굳어 버리겠어.
아델리아는 창틀에 걸터앉고서 뻣뻣해진 다리 하나를 창틀 위로 올렸다.
-악화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목숨이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도 의연했다. 남은 반년의 시간만큼은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계획부터 세웠다.
그동안 가 보지 못한 곳, 막연히 상상으로만 그리던 장소들을 여행하기로.
그렇게 바람처럼 떠돌다가 반년의 시간을 모두 써 버린 그 어느 날.
그날이 오면, 그 평온한 여행길의 한편에서 먼지처럼 흩어져 흙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러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리부터 굳어 버렸다.
-내일은 비가 오겠네.
창문 밖 하늘을 보며 태연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
“으…….”
“아, 아가씨!”
잠깐 잠이 들었던 아델리아가 온몸을 휩싼 열기에 앓는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세라가 의사 레널드를 다그치자, 아델리아를 진료하던 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일단 해열제를 드셨으니 열은 곧 내려갈 거다.”
“감기인가요? 감기인데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실 수도 있어요?”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의사가 뭐 이래요! 정신이라도 돌아오게 해 보라고요!”
세라가 흥분한 채로 레널드의 멱살을 짤짤 흔들자,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 세라 양. 지, 진정 좀 하…….”
“진정하게 생겼어요?! 아가씨께서 지금 정신을 못 차리시는데!”
그때였다.
“아델리아가 아프다는 소리는 서신에 안 적혀 있었는데?”
아델리아의 방문이 열리며 황실 기사단 제복을 입은 데릭 에스테르가 들어왔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아델리아의 오빠였다.
급히 달려온 모양인지, 앞머리가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도, 도련님!”
“도련님, 우리 아가씨 좀 살려 주세요!”
세라는 구세주라도 만난 사람처럼 데릭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데릭은 침대에서 끙끙 앓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미간을 구겼다.
“아델이 왜 저러는 거야. 레널드.”
“그것이, 갑작스레 열이 오르는 바람에…….”
그러자 세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도련님.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셨어요! 물론, 열이 나기 시작한 건 조금 전이었지만요.”
“이상한 소리?”
“네, 서신에 적었던 이야기요.”
“아.”
데릭 앞으로 공작저의 서신이 도착한 것은 하늘에 저녁노을이 드리워진 시각이었다.
자신의 나이를 되묻는다거나, 제국력에 관해 묻는다거나, 테오스와 데릭이 살아 있는지를 물었다고 했다.
거기에다 아카데미에는 가지 않겠다며 짐을 당장 풀라고도 했다고.
아니, 가방째로 태워 버리라고 했다던가.
“그러다가 갑자기 열이 났다고?”
“네, 도련님.”
데릭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아델.”
“으으…….”
“오빠가 왔어. 아델…….”
언제 그랬냐는 듯 험악한 인상을 지운 데릭이 눈꼬리를 내리며 아델리아를 불렀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비라도 맞은 아이처럼 땀에 흠뻑 젖어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아델…….”
데릭에게 아델리아는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동생이자, 어머니가 세상에 남긴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게 된 아델리아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더욱 잘해 주고 싶었다.
자신은 어머니의 미소와 품을 기억하지만, 아델리아는 그렇지 못할 테니까.
더욱이 아버지인 테오스는 공작저를 자주 비웠다.
그래서 더더욱 아델리아의 곁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아이가 외로움을 모르고 자라길 바라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인지, 아델리아가 자신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오기 위해 기사가 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어제까지였지. 오늘 입학을 취소한다고 했으니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왔더니, 이렇게 앓고 있었다.
데릭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아델리아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아델, 열이 내리면 네가 좋아하는 데미오르트 3번가의 푸딩을 잔뜩 사다 줄게. 르므리에를 들러 자두 아이스크림도 먹자. 무지개 솜사탕은 아버지 오시면 그때…….”
작게 중얼대던 데릭이 말을 멈췄다. 아델리아의 이마에 닿아 있던 손바닥 아래로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그 열기 아래, 요동치는 오묘한 기운.
이거 설마…….
데릭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러?’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오러는 보통 성년식을 치르고 훈련을 통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지만 발현된다.
그런데 일곱 살 아이에게서 오러가 느껴지다니.
“아델.”
데릭이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데릭은 자신의 오러로 아델리아의 오러를 조금씩 잠재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껏 찌푸리고 있던 아델리아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임시방편일 뿐이야.’
데릭의 오러가 아델리아의 오러보다 조금이라도 강했기에 잠시 잠재울 수 있었지만, 언제 또다시 날뛰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자신이 걸어 둔 금제가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데릭은 잠든 아델리아를 잠시 내려다보다 방을 빠져나갔다.
***
제국의 남서쪽, 체하트로스 영지의 경계.
흙바닥에 고인 핏물 웅덩이가 스산한 비바람에 물결쳤다.
서로의 전력을 가늠하기 위해 가볍게 1차전이 벌어진 전장. 잠시 소강상태에 돌입한 양쪽 진영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각하.”
“…….”
막사 안의 분위기도 막사 밖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테오스 에스테르 공작은 의자에 앉아 지도를 살피다, 보좌관 워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워렌이 그의 앞에 서며 다시 물었다.
“이대로 지켜만 보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질문에도 테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카데미 입학을 거부했다고.”
“아, ……그렇습니다.”
테오스는 조금 전, 워렌이 들려준 딸아이에 대한 보고를 떠올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네도 그 아이를 오랜 시간 지켜봤으니 알지 않나.”
“……예, 각하.”
로시안트 제국에는 정식 여기사가 없다.
귀족 가문의 기사단이나 황실 기사단에 입단한 정식 기사는 죄다 남자뿐이다.
황실 기사단의 입단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하기도 했고, 기사단 입단 시험 자체가 유난히 어려운 것도 한몫했다.
그러다 보니 각 귀족 가문의 기사단 입단 시험도 덩달아 수준이 높아졌다.
‘애초에 다른 귀족 영애들은 기사가 되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아…….’
귀족 영애가 검을 든다는 것을 무식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것들이 귀족이었다.
워렌이 구겨진 미간을 슬슬 긁었다.
“아가씨께서는 각하를 닮으셨습니다.”
그러자 테오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외모적인 부분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
오히려 외모로는 닮은 부분이 없다. 붉은 눈동자를 제외하면, 아델리아는 돌아가신 공작 부인을 빼닮았으니까.
‘고집 말입니다, 고집.’
거기에다 한번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고집을 밀어붙이는 행동력까지.
워렌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많은 귀족 가문들과 제국민들이 에스테르 공작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로시안트 제국에는 세 개의 공작 가문이 존재한다.
그 세 개의 공작 가문 중, 에스테르 공작가가 단연 가장 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테오스를 향한 제국민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탓이다.
그런데, 그 에스테르 공작가의 유일한 공녀가 검을 잡겠다고 나섰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엄하게 꾸짖을 법도 한데, 공작은 아델리아를 막지 않았다. 아무런 첨언 없이, 그저 뜻대로 하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시험을 통과해 버리셨지.’
그것은 워렌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아가씨께서 기사가 되겠다고 아카데미 시험을 보실 때도 말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어 버린다면…….”
에스테르 공작가를 시기하여 기회만 엿보던 자들이 많았다. 이번 일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워렌.”
테오스가 워렌을 조용히 불렀다.
“예, 각하.”
테오스는 보고 있던 지도를 둘둘 말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일을 앞당겨 전쟁을 마무리한다.”
“예?”
워렌이 테오스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반년까지 질질 끌 필요가 뭐가 있겠나. 일주일 안에 전쟁을 끝내고 돌아간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이번 전쟁은 단순한 반란군 제압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섯 개의 연합군으로 이루어진 적의 군대가 바로 코앞에서 대치 중이었다.
대전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 반년은 걸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이라니.
“가, 각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
“일주일.”
더듬거리는 워렌의 말을 테오스가 날카롭게 잘랐다.
“번복은 없다. 움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