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내가 보여, 아델?”
“응……?”
아침 일찍 눈을 뜨니 데릭의 얼굴이 아델리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빠잖아?’
아델리아가 데릭을 멀뚱히 바라보자, 데릭이 아델리아의 이마에 손등을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보자, 열은 없고.”
“…….”
아델리아가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왜, 아델?”
데릭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매를 접어 미소 지었다.
아델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옵! 아, 아으……!”
그러자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아델! 괜찮아?!”
놀란 데릭이 휘청거리는 아델리아의 몸을 부축했다.
아델리아가 자신의 어깨를 붙든 데릭의 손을 한번 내려다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 오빠네.
황금빛에 가까운 밀색 머리카락에 자신과 같은 붉은 눈동자.
같은 붉은 색이라고 해도 데릭의 눈동자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게 세공된 보석처럼 반짝이는 아델리아의 눈동자와는 달리, 데릭의 붉은 눈동자는 한결 차분하고 고요했다.
마치, 난로 속 장작불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평온처럼.
‘그대로야.’
생김새도, 다정한 목소리도, 애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도.
아델리아는 말없이 데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데릭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숙여 앉았다.
“아델? 아직 아픈 거야?”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델리아를 바라보던 데릭이 고개를 돌려 세라에게 말했다.
“세라, 레널드를 다시 불러 와야겠…….”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그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아델……?”
흡사 데릭의 목에 매달린 위태로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데릭은 잠시 멈칫했을 뿐, 당황하지 않고 아델리아를 고쳐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아델리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아델리아는 그런 데릭을 끌어안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살아 있구나.’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시간을 돌아왔다는 사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한순간의 꿈인 것만 같고, 눈 한번 깜빡이면 흩어질 환상인 것만 같아서.
그러나 데릭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체온을 느끼고 나니, 비로소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코끝으로 뜨거운 열기가 몰려들었다.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데릭이 살아 있고 이 공작가 역시 아직 건재하다.
아버지인 테오스 역시, 비록 전장에 있다지만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소리다.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걱정하지 마, 오빠. 아빠도, 오빠도. ……이번에는 전부 내가 살릴 거야. 다시는 우리 가족이 그런 불행을 겪게 하지 않을 거야.’
한 번 겪어 본 것으로 충분해.
감정을 갈무리한 아델리아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나 때문에 돌아온 거야?”
“동생이 보고 싶어서 왔지.”
“거짓말. 입학 취소한다니까 놀라서 왔겠지.”
“…….”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데릭이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데릭은 아델리아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아카데미 입학을 취소하려는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오러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그러나 어쩐지…….
데릭의 시선이 자신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는 작은 손으로 향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새하얘진 손등을 보고 있자니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이때가 아니면 여동생의 어리광을 또 언제 보겠는가.
데릭이 아델리아를 다시금 고쳐 안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좋아서.”
“…….”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의 눈매를 보자 아델리아의 입매에도 덩달아 미소가 그려졌다.
“나도.”
“응?”
“나도 좋아.”
아델리아가 다시 데릭을 와락 끌어안으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오빠를 다시 만나서, 그래서 너무 좋아…….”
-빨리 돌아올게. 식사 거르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오빠가 다 처리할게. 알겠지, 아델?
희미하게 잔상만 남았던 데릭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서 괜히 또 목이 멨다.
“오빠가 돌아와 줘서, ……진짜, 너무너무 기뻐.”
“…….”
신이 주는 기회면 어떻고, 시련이면 어떠한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은 분명 기회이자 축복이다.
‘이렇게라도 돌아와 줬으니 됐어…….’
잠시나마 하늘을 향했던 원망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
“자, 아델. 아—, 해.”
“…….”
데릭이 푸딩을 작은 스푼으로 떠서 아델리아의 입 앞으로 갖다 댔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델리아는 얼떨결에 입을 벌려 푸딩을 받아먹었다.
데릭은 아델리아가 입안의 푸딩을 모두 삼키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푸딩을 떠먹였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아델리아의 미간에 작은 실금이 그어졌다.
아델리아의 좁게 모여든 미간을 보며 겨우 웃음을 참아 낸 데릭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물음표가 잔뜩 떠오른 표정으로 푸딩을 받아먹고 있어.’
미쳤다, 정말. 심장이 아플 정도로 귀여워.
사실 아델리아는 애교 많고 사근사근한 여동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빠인 데릭을 대련 상대, 혹은 연무장의 나무 더미쯤으로 생각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오러의 발현 때문인가.
‘하지만 오러 발현이 성격을 바꾼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뭐, 상관없다. 이러나저러나 아델리아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쭈욱—.
데릭은 나사 하나쯤 풀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푸딩이 올라간 스푼을 내밀었다.
“자자, 한 스푼만 더 먹자.”
“…….”
아델리아가 다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데릭을 쳐다보며 느릿하게 입을 벌렸다.
‘오빠가 원래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건 알겠는데…….’
음식을 먹여 준 적이 있었던가……?
합, 아델리아가 푸딩을 받아먹고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옛 기억에서 데릭을 찾느라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니, 데릭이 그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실 것 같다고 서신을 보내오셨어.”
그의 말에 놀란 아델리아가 꿀꺽, 푸딩을 급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빠가?”
“응.”
데릭의 대답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분명 반년은 걸려야 하는데…….”
그러자 데릭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응? 뭐라고, 아델?”
“아니……. 오래 걸린다고 들은 것 같아서.”
“아아. 맞아, 그러셨지.”
데릭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아델이 걱정되셨나 봐. 항상 말해 줬잖아. 아버지께서 널 얼마나 아끼시는지. 아마 지금도 네 걱정에 잠도 못 주무시고 달려오고 계실걸?”
“…….”
데릭이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아델리아는 그런 데릭의 표정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걱정은 무슨…….’
내 생일보다 전쟁을 우선으로 하시는 분께서 그럴 리가 없잖아.
데릭은 한 번씩 저런 황당한 소리를 하고는 했다.
‘오빠는 날 위로하려고 하는 소리겠지만…….’
데릭의 그런 위로와 배려는 정말 고마웠다. 황당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아델리아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 아빠가 날 아끼시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어리지 않아.
아델리아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사이, 데릭은 남은 푸딩을 스푼에 모아 담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모처럼 진심이셨나 봐. 아버지가 진심이 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거 알잖아.”
“…….”
아……. 그렇구나. 그동안은 진심이 아니셔서 일 년이고 이 년이고 걸렸었구나.
아빠가 진심이 되면 반년이 걸릴 전쟁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정리되는 거였구나.
“아델, 마지막. 아—.”
“아—.”
하압. 아델리아는 한결 익숙해진 표정으로 푸딩을 받아먹었다.
결국, 데릭은 푸딩 하나를 모두 먹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있어.”
“어디 가려고?”
“아버지께 답신하러. 너 푸딩 먹이느라 아직 답장을 못 적었거든.”
“응, 알았어. 빨리 와, 오빠.”
“응……?”
“왜 그래? 빨리 오라고.”
아델리아의 말에 데릭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싱긋 미소 지었다.
“알았어. 금방 올게.”
데릭이 방을 빠져나가자, 아델리아는 베개를 툭툭 두들겨 세워 놓고 등을 지그시 기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과거에는 이렇게 빨리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이번에 테오스가 이끄는 전쟁은 대전투 급의 전쟁이 아니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이라는 것이 앞당기고 싶다 해서 마음대로 앞당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런데 왜 앞당겨진 거지? 난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아!’
아델리아는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설마!
‘내가 아카데미 입학을 취소해서……?’
순간, 군마를 타고 사납게 달려오는 테오스의 모습이 떠올라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온 아델리아는 곧장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어머, 아가씨? 식사하고 바로 그렇게 누우시면…….”
“해 보고 싶었어. 말리지 마, 세라.”
“……예?”
식당에서 나와 연무장으로 가자던 데릭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평소처럼 대련 어때?
-배불러서 움직이기 싫어.
-……그럴수록 대련하는 거 더 좋아했잖아. 배부르니까 게을러지는 느낌이라고.
-그랬나? 어쨌든 지금은 싫어. 그리고 좀 게을러지면 어때. 일곱 살은 그래도 된댔어.
-……누가?
사실, 못 이기는 척하며 데릭과 함께 연무장에 가고 싶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터질 때까지 연무장을 돌고, 팔뚝과 손끝이 저릿저릿할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예전처럼.
게다가 테오스의 귀환 소식에 머릿속도 소란스러웠다.
‘지금처럼 머리가 복잡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르는 게 제일인데.’
그러나 과거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이상, 쉽게 검을 다시 잡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과 가문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델리아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기사로서의 삶 말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평범한 귀족 영애로서의 삶. 새로운 취미도 만들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친해져 보고.
‘그럼, 일곱 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 일곱 살 공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이왕이면 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좋겠는데.
침대 위에서 좌우로 뒹굴뒹굴 굴러다니던 아델리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가씨?”
테이블을 정리하던 세라가 아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세라, 다른 가문 아이들은 뭘 하고 지낼까?”
“네……?”
“내가 지금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누구야?”
“…….”
갑자기 말이 없어진 세라를 보며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응? 세라?”
“치, 친하게 지내는…….”
세라가 눈에 띄게 당황한 것이 보였다. 그런 세라의 표정이 말하는 바를, 아델리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없구나.
‘그래, 있을 리가 없지.’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시기의 아델리아는 별난 아이였다.
다른 귀족 가문 영애들과 교류는커녕, 연무장에서 가문의 기사들과 대련하고 그들을 흙바닥에 때려눕히는 일이 더욱 재밌었다.
“미안, 세라. 잠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고 있었어.”
“아니에요, 아가씨……. 오히려 제가 죄송…….”
세라는 뭐가 그리 마음 아픈지,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 거참. 정말 괜찮은데.
“세라.”
“네, 아가씨.”
“나 있잖아. 아카데미도 안 들어가기로 했으니까 친구나 만들까 하는데. ……어때?”
그러자 세라의 얼굴이 다시 화색을 띠었다.
“치, 친구요?!”
“응. 또래 친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좋죠! 너무너무 좋아요, 아가씨!”
세라의 격한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아델리아가 침대에서 폴짝 내려오며 말했다.
“좋아. 검을 뽑아 들었으니 뭐든 잘라야 하지 않겠어?! 당장 편지를 보내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누구한테 먼저 보내지? 거리상 제일 가까운 가문이 어디더라.”
아델리아가 책상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리자, 세라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티파티에 참석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티파티?”
“네, 아가씨. 갑자기 친구가 되자고 편지를 보내는 것보다, 티파티에 참석해서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그중에 분명, 아가씨와 맞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세라의 말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렇게들 하는구나.”
일리가 있어. 무턱대고 친구가 되자고 편지를 보내면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당할 거야.
“역시 세라야. 하마터면 웃음거리가 될 뻔했어. 고마워, 세라!”
“별말씀을요.”
세라가 흡족하게 웃었다.
티파티. 티파티라……. 창가로 걸어가던 아델리아가 세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내게 초대장이 온 게 있어?”
“…….”
아델리아는 다시 슬퍼지는 세라의 표정을 보며 또 한 번 깨달았다.
세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능력을 가진 게 분명하다고.
‘아니요, 아가씨. ……그것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