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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4)화 (4/161)

4화

티파티라는 것은 꽤 그럴듯한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친구와 교류를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공작저를 수시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만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테오스와 데릭을 살리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들이 그 전장에서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해.’

분명 두 사람의 죽음은 황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위험하고 은밀한 정보들은 집에 처박혀 있는다고 해서 절로 굴러떨어지지 않는다.

‘정보력 하면 알아주는 길드가 있지.’

과거 용병으로 활동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길드가 있다. 공작저를 나가게 되면 찾아가야 하는 곳 중 하나였다.

‘티파티에서 오가는 이야기 중에서도 쓸 만한 이야기를 건질지도 모르고.’

후우.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친구 하나 못 만들고 뭐 했냐.

아델리아가 자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데, 그럼 뭐라도 조금 수월해야 할 텐데.

‘친구 하나 사귀는 일조차 이렇게나 어렵다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친구를 어떻게 만들었더라.

기사였던 시절, 그녀에게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 있기는 했었다.

‘아니, 친구보다 동료에 가까웠던가…….’

그들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돌이켜 보니,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은 없다.

‘전부 싸우다가 친해졌던 것도 같고.’

하지만, 검을 다루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또래 영애들과 친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검을 꺼내 들면 놀라 달아날 테니까.

“그냥 직접 티파티를 열어 버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가씨?”

“응? 아니야, 아니야.”

아델리아는 세라를 향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무모하게 덤빌 필요는 없어.’

티파티가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아는 게 없다.

세라나 다른 하녀들의 지식에 기대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

‘무리하게 개최하는 것보다 서너 번 참석해서 익히는 게 낫겠어.’

아델리아는 세라에게 말했다.

“일단, 혹시라도 티파티 초대장이 오면 바로 갖다 줘.”

“아……. 네, 그럴게요…….”

온다면……. 온다면 말이에요……. 어쩐지 세라의 표정이 슬퍼 보였다.

세라가 방을 빠져나가고 혼자가 된 아델리아는 창가로 걸어갔다.

커다란 유리창을 열자,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밖으로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고용인들이 보였다.

“평화롭다…….”

분명 평화롭기는 하지만, 혼자서 돌아다니는 일조차도 쉽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이 평화는 길어 봐야 고작 2년.’

이렇게 갇혀 있을 시간이 없는데, 빨리 아카데미 일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창틀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 멀리 정문에서 낯선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응?”

설마, 벌써 아빠가?

아니지. 거기가 어디라고 벌써 도착하시겠어. 게다가 아빠가 마차를 타고 돌아오시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아. 그럼, 티파티 초대장이 왔나?’

아델리아가 몸을 세워 마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붉은색 도료가 칠해진 마차는 테두리가 온통 황금이었다.

마차 지붕에 뾰족 솟은 독수리 모양의 금장식과 마차 옆면에 그려진 황금빛 문양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줬다.

“아…….”

마차가 점점 가까워지자 마차에 새겨진 가문의 문양이 선명해졌다.

마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아델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카를리나……?”

***

로시안트 제국에는 세 개의 공작 가문이 있고 다섯 개의 후작 가문이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도 많은 귀족 가문이 존재한다.

카를리나 로즈힐은 로즈힐 후작 가문의 장녀였다.

데릭과 아델리아의 어머니인 이레네아가 죽기 전까지는 교류가 잦았던 가문이었다.

로즈힐 후작 부인과 이레네아가 가깝게 지낸 만큼, 데릭과 로즈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 왔다.

‘그런 걸 소꿉친구라고 하던가.’

이레네아가 죽고 난 뒤, 그녀를 잃은 슬픔에 후작 부인까지 앓아누웠다고 했다.

“후작 부인께서는 좀 어떠세요?”

“……조금씩 좋아지고 계세요.”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응접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카를리나가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단둘이서 차를 마시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아델리아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카를리나가 좋아하는 꽃차로 준비했어요. 이 쿠키는 제가 좋아하는 라르텐 가게의 쿠키고요. 푸딩은 안 드실 것 같아서 내어오라는 말을 안 했어요. 혹시 푸딩 좋아하세요?”

“…….”

아델리아가 천진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런 아델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카를리나가 퉁명스레 말했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데릭이 없다고 미리 말해 줬다면 입구에서 돌아갔을 거예요.”

데릭이 황실 기사단으로 들어간 뒤, 카를리나는 데릭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데릭이 공작저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을 것이다. 그의 얼굴을 잠시라도 보기 위해.

그러나 지금은 데릭이 없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공작저를 비운 상태였다.

하지만 카를리나를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와 꼭 만나고 싶었으니까.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그래서 말 안 했어요. 곧장 돌아가겠다고 하실까 봐.”

“……왜죠?”

“카를리나를 만나고 싶었거든요.”

매끈하던 카를리나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요?”

“…….”

직설적으로 물어 오는 그녀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싫어하지 않아요.”

이제는.

카를리나의 말대로, 일곱 살의 아델리아는 그녀를 싫어했다.

어쩐지 카를리나에게 데릭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마저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아 외롭기만 하던 공작저에서, 데릭은 유일하게 그녀의 외로움을 알아주고 달래 주던 사람이었다.

아델리아에게는 데릭의 존재가 몹시도 소중하고 간절했다.

‘지금이야 그런 유치한 감정 따위 없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어…….’

게다가.

‘오빠를 사랑해서라기보단, 공작 부인 자리가 탐나서라고 오해했었고.’

-현명하게 생각해, 데릭. 다른 어중간한 가문보다 우리 가문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난 당신과 결혼해서 공작 부인이 되니까 좋고, 에스테르 공작가는 북부 광산 독점권을 가질 수 있어서 좋고.

아무리 귀족 사이에서 정략결혼이 당연시된다고는 하지만, 일곱 살의 아델리아 눈에는 그저 권력을 좇는 여자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카를리나를 만나게 된 건 오빠가 죽은 뒤였지.’

테오스와 데릭이 죽고 얼마 있지 않아 가주와 후계를 단번에 잃은 공작가는 폐허처럼 삭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누구도 쉽사리 위로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을 기회 삼아 에스테르 공작가를 반란군과 연관 지어 무너트리려는 세력마저 등장해 버렸다.

그런 공작저를 카를리나가 찾아왔다.

-아델리아. 조금만 기다려 줘요. 포기하지 말고. 내가 알아보려고요.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어 버릴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날 믿어 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포기만은 하지 말아 줘요, 아델리아.

모든 귀족 가문들이 에스테르 공작가에 등을 돌릴 때, 오직 카를리나만이 공작가를 위해 나서 주었다.

그러나 결국, 카를리나의 로즈힐 후작 가문까지 제국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미안해요, 아델리아.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의미 있는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제국을 떠나던 날 했던 이야기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오히려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말이야…….’

아델리아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앉은 카를리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른 아델리아의 시선에 항상 도도하고 당돌하던 카를리나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예뻐서요.”

“…….”

순간, 카를리나의 눈이 커다래지고 두 뺨이 붉어졌다.

‘감정이 금세 드러난다니까.’

저렇게 솔직한 사람이다. 그때는 몰랐다. 카를리나의 투명한 진심이 보이지 않았다.

카를리나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놀리는 거예요?”

“아니요? 진심인걸요. 저는 카를리나의 금발이 좋아요.”

“…….”

“붉은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도 좋고, 맑은 하늘빛인 눈동자도 좋아요.”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도 좋고 당당하고 품위 있는 시선 처리도 좋고.

갑작스러운 아델리아의 고백에 카를리나가 숨을 급히 들이마시며 말했다.

“갑, 갑자기 왜 이래요? 뭘 잘못 먹기라도 했어요? 아니면, 날 쫓아내는 방법을 바꾸기라도 한 거예요?”

당황해 말까지 더듬는 그녀를 보며 아델리아는 눈매를 접고 웃었다.

‘이상할 만도 하지.’

과거, 카를리나가 에스테르 공작가를 위해 직접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녀의 진심을 알지 못했더라면 아델리아 역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델리아가 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자주 놀러 와요, 카를리나.”

“…….”

“자주 와서 오빠랑만 놀지 말고 나랑도 놀아 줘요.”

“놀아, 달라고요?”

“응. 난……. 언니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

카를리나의 눈이 또 한 번 커다래졌다. 그리고 숨을 가쁘게 내쉬더니 갑자기 왼쪽 가슴 위로 주먹을 올렸다.

“카를리나?”

놀란 아델리아가 소파에서 내려와 카를리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카를리나가 손을 뻗어 다가오는 것을 막으며 말했다.

“거, 거기 서요.”

“어디 불편한 거예요? 의사를 부를까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심장이 뛰고 숨쉬기가 힘들어져서.”

“물을 조금 마셔 보세요, 언니.”

그러자 카를리나의 고개가 아델리아에게로 홱 돌아왔다.

‘언, 니?’

아델리아는 양쪽 눈썹을 축 늘어트린 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카를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꼬맹이가 이렇게까지 귀여웠나?’

아델리아가 예쁘게 생겼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원래 에스테르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러나 매번 뾰족한 시선으로 자신을 대하던 아델리아였다.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었는데.’

카를리나가 머리를 잘게 흔들더니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하고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로 돌아가세요, 에스테르 영애.”

성년식을 치른 귀족 영애가 열두 살이나 어린 영애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카를리나는 자신의 옷맵시를 정리하고 반듯한 자세로 앉았다.

“하지만…….”

“난 괜찮아요.”

카를리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에요. 데릭이 있을 때 다시 올게요.”

카를리나의 표정과 목소리가 다시 한번 벽을 세웠다.

더는 이 작은 아이한테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러한 다짐이 엿보였다. 그러나.

“다시? 언제요? 내일이요?”

“……네?”

아델리아의 작은 손이 카를리나의 손끝을 조심스레 잡았다.

카를리나가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오빠가 있을 때 다시 오신다면서요. 그럼, 내일 오시는 거 맞죠?”

“…….”

왜인지, 아델리아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던 카를리나가 읏, 짧게 신음하더니 시선을 피하며 겨우 대답했다.

“이, 이틀 뒤에…….”

그러자 아델리아의 표정이 한결 환해졌다.

“정말이죠? 기다릴게요, 언니.”

“…….”

카를리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겨우 세운 얇디얇은 벽 하나가 다시금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

카를리나가 돌아가고, 아델리아는 새벽이 깊어지도록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았다. 낮에 찾아왔던 카를리나가 떠올랐던 까닭이다.

‘카를리나가 기억할 리 없지만…….’

비록 지난 삶의 은혜였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뿐이지만.

아델리아는 카를리나에게 그 고마움을 갚고 싶었다.

‘적어도 오빠와의 사이에 방해물이 되지는 말아야지.’

발 벗고 나서서 돕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훼방은 놓지 말아야겠다고, 아델리아는 과거의 카를리나와 그녀의 가문을 떠올리며 그러한 각오를 다졌다.

가만가만, 그러고 보니…….

‘로즈힐 후작가의 운명도 결국은 아빠와 오빠의 생존에 달렸다는 이야기네.’

아델리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펜과 종이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자신도 의자에 앉아 펜을 붙잡았다.

콕, 콕, 콕. 펜대의 끝부분으로 턱 끝을 버릇처럼 눌렀다.

‘아빠가 쌓아 올린 권력과 재력을 펑펑 써 대는 공녀 노릇도 즐겁겠지만, 일단 그걸 오랫동안 누리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

나의 온전한 은퇴 생활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일.

<아빠와 오빠의 생존>

아델리아는 종이의 빈 곳을 신중하게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빠가 로샤크 전쟁에 나가지 않아야 해.’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러도, 성검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대신 나가 줄 수도 없어.’

<하필 아빠가 영웅>

아델리아는 종이에 생각을 짧게 정리하며 적어 나갔다.

테오스는 현재 제국의 전쟁 영웅이다. 아델리아 역시 성검의 선택으로 영웅이라 불렸던 적이 있기에, 그 자리를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폐하와 약속하신 게 있으시댔어. 아마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 자리를 물려받으시면 아버지께서도 전장에 나가시는 일은 없으실 거야.

과거에 데릭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약속…… 어떤?>

‘약속, 약속이라…….’

어쨌든 테오스는 그 약속 때문에 전쟁을 계속해서 나가야 한다.

‘가만.’

지금의 황제는, 그러니까 황태자 카르세스의 친부는 앞으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황제의 유언에 따라, 다음 황제 자리에는 대공 악시덤이 오르게 되었다.

황태자 카르세스가 아니라.

아…….

황태자 전하가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해서구나.

‘거기에서부터 꼬였던 거야.’

애초에 그 전제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테오스의 은퇴도 미루어졌는지 모른다.

‘뭐야, 그럼 간단하네!’

아델리아의 입가로 천진한 미소가 고였다.

‘악시덤이 황제가 되는 걸 막고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기만 하면 되는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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