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6)화 (6/161)

6화

알현실의 문이 다시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끼이익, 쿠웅—

묵직한 알현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황제는 문이 닫힐 때까지 자그마한 아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제의 보좌관 제라르가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런 제안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턱을 괴고 있던 황제가 옅게 웃었다.

“참으로 당돌하지 않은가.”

제라르가 황제의 시선을 따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과연 테오스 공작의 핏줄이다 싶었습니다.”

“내가 제 아비의 친우지, 자기 친우는 아닌데 말이야.”

황제는 나풀나풀 알현실을 뛰어나간 여자아이를 떠올리며 미소를 띠었다.

-차라리 제가 황태자 전하의 검술 훈련 동기가 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폐하?

아델리아는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라는 자리는 싫다고 했다.

-제가 황태자 전하와 함께 검술을 배우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요?

나이 어린 스승과 지체 높은 제자 관계보다야, 그편이 더 나을 거라고.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아무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남을 가르칠 만한 재목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설마, 그 중요한 자리에 아무나를 세우실 것은 아니지요? 네? 폐하?

황제의 제안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슬쩍 비꼬았다.

싱글 웃으며 대답하는 모양새가 여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황태자의 스승 자리를 아무에게나 맡기려는 자신을 꾸짖는 것 같기도 해서, 듣는 황제는 기분이 참 묘해졌다.

아델리아와의 대화를 곱씹던 황제가 하하,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게 어딜 봐서 일곱 살이라는 거야?”

“그러니 아카데미 시험에 통과했겠지요.”

“아니, 검술 실력 말고. 언행 말이다.”

말하는 모양새나 몸짓 하나하나가 마치 벌써 기사라도 된 것처럼 절도 있고 단정했다.

“예, 그게 조금 이상하긴 했습니다.”

“이상할 게 뭐가 있겠는가. 애초에 에스테르 공작가는 평범했던 적이 없었다. 테오스 녀석, 별다른 훈육법도 없었던 것 같은데 두 아이 모두 훌륭하게 키워 냈어.”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 꼬맹이가 내 제안을 모두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입학 취소를 허가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테오스가 직접 찾아와 부탁한 일이었다.

황제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아이가 신기하여 장난을 조금 치기는 했지만, 되레 황제를 당황하게 한 것은 그 꼬맹이였다.

승기를 잡은 듯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지막에 가서는……,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

“예, 폐하.”

이제는 제라르도 아델리아의 표정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를 따라 황제도 웃었다.

“지켜보자고. 그 아이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말이야.”

***

“무섭지는 않았어?”

데릭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무서웠어. 그냥, 상상했던 것보다…….”

잠깐 고민하던 아델리아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되게 장난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

“응?”

데릭이 고개를 기울이자, 아델리아가 헤헤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쨌든 고생했어, 아델.”

데릭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델리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

“고생은 무슨.”

에헴. 아델리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델리아는 데릭의 손을 잡고서 햇살이 드리워진 복도를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그러다 문득 시선이 창밖을 넘어갔다. 커다란 정원 너머로 황태자궁이 보였다.

그 낯익은 건물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반갑기까지 했다.

‘잘 견디고 있겠지?’

아델리아는 성검의 선택을 받기 이전에 황태자 카르세스의 호위 기사였다.

카르세스의 주위에는 실력 있는 수하들이 많았다. 그가 신분을 막론하고 실력을 중시하여 수하들을 뽑았기 때문이다.

아델리아 역시 그런 식으로 카르세스의 눈에 들었다.

그러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고, 황제가 되지 못한 카르세스는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그때 성검의 선택만 받지 않았더라도.’

성검의 주인이 된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곁을 떠나 황제를 지켜야만 했다.

황태자의 힘이 되어 주던 아델리아가, 황제에게 힘을 실어 주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그녀를 여전히 친우처럼 대했다. 틈틈이 찾아오는 아델리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관두고 싶으면 말해.

-뭘 말입니까?

-그 영웅 연기.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잖아.

-연기라뇨.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해. 돌아와. 그대를 필요로 하는 건 내가 먼저였어.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창틀에 걸터앉아 책장을 넘기며 담백하게 말했다.

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밤하늘의 공허를 닮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은하수가 내려앉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반쯤 내리깐 검은 속눈썹 사이로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해가 밝아 오기 직전의 새벽하늘처럼 은은한 보랏빛이 감돌았다.

아델리아는 그런 카르세스의 여유가 좋았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를 짓누르는 고뇌와 번뇌가 그 순간만큼은 모두 휘발되어 흩어졌다.

-……돌아오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

-예, 전하.

돌아오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 약속이 떠오르자 입안이 껄끄러워졌다. 아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응? 왜 그래, 아델?”

“아.”

아델리아와 손을 잡고 있던 데릭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때.

“에스테르 경.”

누군가의 목소리가 두 사람 뒤에서 들려왔다.

놀란 아델리아가 몸을 돌렸다. 버릇처럼 대답하려다 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에스테르 경은 오빠잖아.’

바보 같긴. 지금 이곳에 나를 에스테르 경이라 불러 주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

익숙한 호칭에 버릇처럼 몸을 돌렸던 아델리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델리아는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낯이 익은데?’

검은 머리카락에 보랏빛이 도는 눈동자.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데릭 쪽이었다. 데릭은 아델리아의 손을 놓고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데릭이 가슴팍에 주먹을 올리며 인사를 건네자, 고개를 끄덕인 카르세스가 데릭 뒤편에 서 있는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말간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아델리아의 정체를 묻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저 아이가 카르세스 전하라고?

아델리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같이 훈련을 받기로 한 이야기가 벌써 전해졌나?’

그럴 리가. 아델리아가 알현실에서 나온 건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사이에 전달되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우연이라는 소린데.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 몰랐어.’

아델리아는 데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르세스를 조심스레 흘깃거렸다.

확실히 아델리아의 기억 속 황태자와 눈앞의 황태자는 사뭇 달랐다.

무기력한 표정의 사내아이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알고 있던 황태자와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부터 들었다.

항상 당당하고 황족 특유의 기품이 배어나는 고고한 사내였다.

쉽사리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무기력해 보인 적은 없었다.

아니, 지금의 황태자는 무기력하다기보다 쇠약해진 초식 동물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보아도 재능 없어 뒤처진,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황족 같은.

아델리아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한동안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열두 살인 거지?’

열두 살 아이의 표정이 왜 저래…….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의 카르세스에 대해 들은 게 없다. 악시덤이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언제부터였고 어떤 방식이었는지 자세히 들은 기억이 없었다.

‘이런 시절을 보내고 계셨어요……?’

어쩐지 가슴이 지끈거렸다. 저 어린아이를 대체 어떻게 괴롭혀 댔길래 저런 공허한 눈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아델.”

데릭이 아델리아를 불렀다. 아델리아는 자연스럽게 데릭의 옆에 서서 예를 차려 인사했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아델리아 에스테르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못 보던 얼굴이다 했더니 에스테르의 작은 별이었군.”

“예, 전하. 입궁은 처음입니다.”

“폐하를 뵙고 가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차분하게 대답한 뒤, 아델리아는 카르세스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버티세요.’

아델리아는 건넬 수 없는 인사를 혼자 삭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잠깐 응시하더니 다시 데릭에게로 향했다.

“동생이 아파서 공작저로 돌아갔다더니.”

“예, 전하. 이제는 괜찮아졌습니다.”

“그럼 복귀해야지.”

“아, 그게…….”

데릭이 곤란한 얼굴로 아델리아를 힐끗거렸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눈매를 둥글게 접어 웃으며 데릭 대신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전하. 내일이라도 당장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아델리아의 말에 데릭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내, 내일? 안 돼, 아델!”

“왜? 난 다 나았어, 오빠.”

데릭이 카르세스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말을 이어 갔다.

“일주일 뒤에 복귀하도록 단장님과 이야기를 끝내 놨습니다, 전하.”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와 데릭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아서 해. 에스테르 경이 게으름 부릴 사람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라.”

“예, 전하.”

데릭이 고개를 숙이자, 아델리아도 데릭 옆에서 카르세스를 향해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마치, 기사처럼.

“…….”

“…….”

귀족 영애치곤 우렁찬 인사에 데릭과 카르세스의 시선이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응?’

왜 저런 눈으로 봐? 아델리아가 두 사람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카르세스는 잠시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두 사람을 스쳐 알현실로 향했다.

두 사람을 지나치는 즉시 카르세스의 얼굴에서는 무기력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대신, 빛이 감돌기 시작한 보라색 눈동자에는 차갑고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르세스가 뒤를 따르던 보좌관 루드에게 말했다.

“루드.”

“예, 전하.”

“에스테르의 작은 별에 대해 알아봐.”

그러자 루드의 눈동자가 잠시 뒤를 향했다가 돌아왔다.

“예, 명을 받듭니다.”

루드가 카르세스의 뒤로 빠져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