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카르세스 일행과 헤어진 뒤, 복도 끝에 다다른 데릭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렵다, 어려워.”
“뭐가?”
“황태자 전하 말이야.”
“전하가 어려워? 왜?”
“쉽지 않아. 소문처럼 유약하신 것 같지도 않고, 어떨 때는 폐하보다 더 어려울 때도 있어.”
아델리아는 그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지금 황태자는 유약해 보이는 면이 있지만, 곧 그의 진가가 드러날 것이다. 벌써부터 데릭이 눈치챌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카르세스는 검술과 오러, 그 모든 것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후계 수업을 따로 듣지 않는 것은 그의 곁에 그 어떠한 선생보다 뛰어난 보좌관 루드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루드는 겉보기에 딱 모범적인 보좌관의 껍데기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암살과 정보 수집에 매우 능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손쉽게 사람의 목을 그어 버리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성격은 나쁘지만, 실력 하나는 믿을 만하지.’
지금 아델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특히, 티파티나 길드 의뢰에서도 얻기 힘든 황궁 내부의 정보.
어쩌면 2년 뒤 황제의 죽음과 관련된 단서도 루드가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아델리아는 황제를 구하고 카르세스를 무사히 황제 자리에 올리겠다고 다짐했다. 당연하게도 그 목적이 이루어지려면 황제가 살아 있어야만 한다.
과거처럼 갑작스레 죽는 일이 없도록, 그로 인해 악시덤 대공이 그 자리를 강탈하지 않도록.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경우는 역시.’
독살.
아델리아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진짜 독이라면, 나 혼자 해결할 수 없어.’
대신 그녀는 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래, 그 사람은 모르는 독이 없으니까.’
일단 그 사람만 찾아도 황제가 독살로 죽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보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길드를 찾아서 그 사람을 찾아 달라 의뢰를 맡겨야지.’
아델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티파티도 참석해야 해. 음, 그리고 또……. 자수도 배울 수 있게 선생님을 알아봐 달라고 해야겠다. 친구를 사귀려면 뭐라도 접점이 있어야 하니까.’
춤도 배우고 그림도 조금 배워 둘까? 아! 피아노도!
‘와, 아카데미를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할 게 너무 많잖아?’
아델리아는 생각에 빠진 채,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앞서가던 아델리아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오빠.”
“응?”
“우리끼리 돌아가는 거야? 아버지는?”
그러고 보니 아델리아가 알현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테오스가 보이지 않았다.
아델리아의 질문에 데릭이 잠깐 고민했다.
“궁금해?”
“당연하지. 오빠랑 같이 계시는 줄 알았는데.”
“가 볼래?”
“어디에 계시는데?”
아델리아가 묻자, 데릭이 싱긋 미소 지으며 아델리아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가자.”
그리고 곧장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어, 어어?”
아! 오빠, 천천히!
아델리아가 데릭에게 끌려가며 외쳤다. 어쩐지, 데릭의 시원스러운 걸음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
신전의 대강당.
뜨거운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들어왔다. 오색빛깔로 한껏 꾸며진 햇살은 상단의 중앙 제단 위로 쏟아졌다.
대강당의 벽에는 제국의 수호신, 크로노스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었는데, 실물 같은 벽화가 벽면을 따라 높은 천장까지 이어졌다.
대강당은 항상 그러했듯이, 오늘도 평화로웠다.
“지, 지누엘 신관님!”
베리언 신관이 대강당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단박에 깨어졌다.
헉, 헉, 헉— 신관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외쳤다.
“큰일, 허억, 헉, 큰일이 났습니다!”
대강당의 제단을 손보고 있던 지누엘이 제단 앞 계단을 내려왔다.
“큰일이라니?”
베리언 신관은 신전 지하 3층의 유물 창고를 담당하던 신관이었다.
베리언은 턱 끝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대답했다.
“성, 성검이.”
지누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성검? 성검이 어쨌길래?”
“그게……!”
우우우웅—
그때, 베리언이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신전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누엘과 베리언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성검, 성검입니다!”
“성검?”
그러다 다시 우웅—. 흡사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다른 구역을 담당하던 신관들도 대강당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방금 신전이 흔들렸습니다!”
신관들은 당황하며 지누엘을 찾아와 상황을 물었다.
지누엘은 베리언에게 말했다.
“신관들을 데리고 가서 성검을 가져와라.”
“대강당으로 말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대신관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구나.”
“예, 지누엘 신관님.”
베리언이 신관들을 데리고 가 대강당으로 유리관을 옮겨 왔다.
대강당의 제단 위를 치우고 그곳에 성검이 보관된 유리관을 올렸다. 그제야 신관들이 안도하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진동이 거짓말처럼, 성검은 고요했다.
잘 관리된 성검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늘씬하게 뻗은 검날은 예리했고 부드럽게 굴곡진 손잡이에는 사람의 솜씨라고 볼 수 없는 정교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세월의 흔적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태양 빛이라도 머금은 듯, 검날은 찬란하게 빛이 났다.
성검을 쳐다보며 턱 끝을 매만지던 지누엘이 베리언에게 물었다.
“성검이 진동한 게 확실한가?”
그러자 베리언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예, 분명 성검이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뭔가 이상했습니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대체 뭐에 반응한 건지 들썩들썩 성검의 몸체가 움직였거든요.”
“뭐? 움직였다고? 그럼 그때 말을 했었어야지!”
“그게……. 하필 공작께서 그때 도착하시는 바람에…….”
아……. 지누엘이 탄식했다.
“하필, 그때였나.”
“네.”
에스테르 공작은 신전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귀족이었다.
그에 신전 내부에는 에스테르 공작가 전용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전의 입장에서는 돈 많은 소중한 고객이었다.
그가 신전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모든 신관의 신경이 쏠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작께서는, 아직 예배당에 계시나?”
베리언이 확인하고 오겠다며 대강당을 나가던 그때, 우우우웅― 다시 성검이 진동했다.
***
“오빠,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설마……. 저곳이야?”
“응. 맞아, 아델.”
데릭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눈부시게 밝은 데릭의 표정과는 달리 아델리아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아델리아는 데릭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제 앞에 나타난 건물을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제국의 수호신 크로노스가 조각된 기둥과 벽면,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웅장함마저 느껴지는 저 새하얀 건물.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아델리아의 앞에 나타난 건물은 신전이었다.
성검이 잠들어 있는 곳, 그 성검이 깨어나 아델리아를 주인으로 지목했던 곳.
아델리아가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되었던, 바로 그 신전.
아델리아는 본능적으로 주춤거렸다.
아직 신전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음에도 과거의 기억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누님!]
아득히 먼 곳에서 성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휙휙, 아델리아가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아직 릭이 깨어날 시기가 아니야.’
그러니까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성검 리그하르트는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600년 만이라고 했다. 아델리아가 열아홉 살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릭이 깨어나려면 아직 한참은 기다려야 해. ……그런데.’
아델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새하얀 신전을 담았다.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델, 왜 그래?”
“오빠, 아버지가 신전에 계신다고?”
“응.”
데릭이 초승달처럼 눈을 접으며 천진하게 웃었다.
‘아아…….’
어쩜, 해맑기도 하지. 내 속도 모르고.
어쩔 도리가 없다.
갑자기 신전 앞에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전이 꺼림칙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수도 없다.
아델리아는 한숨을 폭 내쉰 뒤, 데릭의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래. 가 보자, 오빠.”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
신전은 확실히 또 다른 영역인 것 같다.
신전 안으로 단 한걸음 들어왔을 뿐인데, 피부로 느껴지는 기운이 바깥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청량하면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야.’
이 기운 때문에 전장에서 돌아온 날이면 신전을 찾아와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평소에 알고 있던 그 기운과는 뭔가가 묘하게 달랐다.
‘저긴 대강당 쪽인데?’
대강당이 위치한 복도의 끝.
신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데릭과 아델리아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대강당으로 향했다.
대강당에는 이미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제단 위 투명한 유리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저렇게 보는 거야?”
데릭의 말에 아델리아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저건…….’
제단 위 유리관에 전시된 물건을 알아본 아델리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릭……?’
스테인드글라스의 오색빛깔이 그 제단 위, 성검을 비추고 있었다. 몹시도 찬란하고, 또 몹시 성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제와 언제 끌려왔는지 모를 성기사 단원들까지.
과거, 자신이 성검의 선택을 받던 때와 무척이나 흡사한 상황이었다.
‘이 분위기, 굉장히 익숙한데…….’
마치, 자신이 성검의 선택을 받았던 그 날처럼.
‘에이.’
하하, 아니라니까. 성검이 깨어나려면 아직 십 년이 넘게 남았…….
그때.
우우우웅—
“오오! 성검이 다시 진동했습니다!”
“설마 깨어나려는 건가!”
입구에 서서 구경하던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 아직, ……깨어날 시기가 아니라니까?’
아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녀의 뒤로 데릭이 닿았다.
“왜 그래, 아델?”
“오빠, 우린 어서 나가자. 아버지 찾아야지, 응?”
아델리아가 성검에서 등을 돌린 뒤, 데릭의 손을 붙잡고 대강당 밖으로 이끌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막연히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순간.
[누니이이이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