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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1)화 (11/161)

11화

꼬르르륵.

[누님!]

꼬로로로—

[누니임! 흐어엉! 이렇게 죽으면 안 돼요! 난 또 어쩌라고! 또 그 하얀 감옥 같은 곳으로 끌려가기 싫어요! 신관 나부랭이들이 또 절 유리관에다 감금시킬 거라고요! 누님!]

죽지 마! 으아아앙!

세면대 옆 협탁 위에서 대기 중이던 리그하르트가 억울하다며 소리쳤다.

[누님! 누님! 누니이임!]

포르르르르— 마지막 숨을 토해 내듯 많은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야!]

리그하르트가 소리쳤다. 그때, 촤아악—! 물속에서 아델리아가 튀어 올랐다.

[누! 누님?!]

후아, 하아, 하아…….

갓 물속에서 빠져나온 아델리아가 욕조에 상체를 걸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 방금 나더러 야라고 했지.”

[누, 누님! 흐어엉! 누님이 죽는 줄 알고!]

“내가 죽으면 바로 반말할 생각이었네?”

울부짖던 리그하르트가 빠르게 정색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주인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서운하게.]

후우……. 아델리아가 욕조에서 나머지 몸을 끌어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요?]

“살아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그녀의 말에 리그하르트가 금빛을 뿜어내며 통통- 협탁 위를 작게 튀어 올랐다.

[우와아! 성공하셨구나! 오러 큐브를 만드신 거예요? 진짜로?!]

“……그래.”

아델리아가 씨익 미소 지었다.

아직 손발이 후들거리고 숨쉬기가 곤란하지만, 어쨌든 성공은 성공이니까.

아델리아는 욕실을 빠져나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조금 전의 오러 폭발로 테오스나 데릭이 눈치채고 올라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리려는데 문득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하……. 하하.”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미쳤어. 정말 성공할 줄이야.’

희망을 걸었으나, 확신은 없었다.

게다가 차가운 물을 따뜻하게 데울 정도로 몸이 뜨거워진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펠슨 선생…….’

하마터면 삶아질 뻔했다고요.

펠슨을 탓하는 말투였지만, 아델리아는 웃고 있었다.

숱한 전장에서 승리를 쟁취했을 때도 이토록 강렬한 성취감을 느낀 적이 없다.

연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가 가라앉았다.

심장의 박동이 평소보다 더욱 힘차게 뛰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생명력이 요동쳤다.

아델리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거울 속 자신의 심장 위로 손바닥을 펼쳐 올렸다.

‘펠슨 선생.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당장 펠슨을 찾아 나설 수는 없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다.

‘당신이 날 살린 거예요.’

비록 과거에는 죽고 말았지만, 그때의 그 노력이 지금의 나를 살릴 수 있었다고.

결국, 펠슨.

당신이 해낸 거라고.

***

덜컹—.

데릭이 푸딩 가게 손잡이를 당겼다가 놓았다. 가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응?”

이상하다……. 이 가게는 1년 내내 문을 닫지 않는데.

테오스가 외출하자, 데릭은 말을 끌고 번화가로 나왔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는 아들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것보다 자신이 움직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무려, 아델리아가 먹을 푸딩이니까.

‘얼른 돌아가면 되지.’

아마 아버지는 신전에 또 가셨을 거다. 아니면 폐하를 만나고 계시겠지.

‘저녁쯤에 돌아오실 테니, 들키지 않을 거야.’

데릭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번화가 디저트 가게들을 돌아다녔다.

“어머, 저기 좀 봐요. 에스테르 경이잖아요?”

“세상에. 정말이네요.”

“그러게요. 가끔 디저트 거리에 나타난다더니.”

디저트 가게가 있는 거리에는 젊은 귀족 영애들이 많았다. 모두 하나같이 부채를 펼쳐 눈 아래를 가린 채, 제복을 빼입은 데릭을 훔쳐보곤 했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미모는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혹자는 그들의 미모를 보고 혼을 꺼내어 가는 악마의 매혹이라고도 불렀다.

황금빛에 가까운 밀색 머리카락에 따스한 불꽃 같은 눈동자.

시원하게 뻗은 키와 탄탄해 보이는 몸매는 제복 속 숨겨진 그의 진가를 상상하게 했다.

찬란한 오후 햇살 아래, 데릭의 아름다운 얼굴은 더욱 빛이 났다.

삼삼오오 모여든 영애들은 그에게 정신이 팔려 가는 걸음도 멈춰 선 채였다.

“로즈힐 영애가 목을 매는 이유가 있었네요.”

“저도 실물은 처음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께 말씀드려 구혼장이라도 넣어 볼걸.”

“늦지 않았어요, 레지라 영애.”

“그럴까요?”

까르르. 영애들은 데릭을 주제로 한 대화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골적인 시선에도 데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 노골적인 시선을 데릭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눈치가 없는 편이다. 특히, 이런 사랑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사랑 같은 것에 말이다.

남녀 사이의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근래 그의 관심은 오로지 디저트였다. 아델리아가 먹게 될 그 디저트.

아델리아가 좋아하는 솜사탕이며 쿠키, 젤리와 과일 몇 가지를 사고 마지막으로 푸딩 가게에 들렀다.

그런데 하필, 가장 중요한 가게가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델런의 행복퐁당 디저트>

아델리아는 이 가게의 푸딩이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

푸딩에도 급이 있다나.

하여튼,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져야 하고 혀 전체를 코팅하듯 감싸는 달콤함에 등줄기가 오싹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푸딩은 이 가게 푸딩뿐이라며 다른 가게의 푸딩은 모두…….

‘쓰레기, 라고 했었지.’

다른 푸딩 가게의 주인들이 들었더라면 억울해할 소리였다.

데릭이 미간 사이를 문지르며 끄응, 앓는 소릴 냈다.

‘난감하네.’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진열된 푸딩 역시 하나도 없었다.

그때.

“무슨 일로 그러세요?”

데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가게 앞을 서성이자, 지나가던 아이가 물었다.

데릭은 아델리아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내 동생이 이 가게의 푸딩을 무척 좋아하거든. 동생이 아파서 사러 왔는데 문이 닫혔구나.”

“아. 우리 아빠 푸딩요.”

그러자 데릭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빠? 이 가게 주인이 네 아버지시니?”

“네! 저희 아빠예요!”

아이는 뿌듯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의 대답에 데릭의 표정 또한 환해졌다.

“그럼, 가게 문을 언제 여시는지 알 수 있을까?”

데릭은 조금 늦게 문을 열더라도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델리아가 눈을 뜨자마자 푸딩을 먹을 수 있게.

데릭의 환한 표정을 보며 아이도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이제 안 열어요.”

아이의 대답에 데릭의 미소가 단박에 흩어졌다. 하늘이 무너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안 연다고?”

“네! 아빠가 가게를 닫을 거라고 했어요. 벌써 팔려고 내놨다고 그러셨어요.”

아이는 천진하게 대답했고 데릭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

머리카락까지 모두 말린 아델리아는 방을 빠져나갔다.

조금 전 자신의 방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도 테오스나 데릭이 올라오지 않았다.

‘오러 마스터인 두 사람이 그걸 모를 리 없는데.’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 1층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용인들과 마주쳤다.

“안녕, 렐리.”

“아, 아가씨?!”

하녀 렐리가 놀라 달려왔다.

“왜 내려오셨어요. 저희를 부르시지요.”

“너무 갑갑해서. 아빠는? 오빠도 안 보이는 것 같고.”

“두 분 다 외출하셨어요.”

“아…….”

오러가 폭발했는데도 반응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저택에 없다는 이야기에 아델리아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렐리는 아델리아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마, 많이 바쁘신 분들이시잖아요.”

“응, 알아.”

“금방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응…….”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려 웃으며 다시 2층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이전 생에서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외로움, 쓸쓸함, 그리고 서운함.

아버지 테오스는 정말 바쁜 사람이었다.

갓 태어난 아델리아가 사경을 헤맬 때도 테오스는 저택에 없었다.

아델리아가 다쳤을 때도, 어렵다는 시험에 통과했을 때도, 아델리아의 생일날에도.

그녀의 곁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없었다.

‘이번 생이라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모양이야.’

그때마다 서운하다고 표현하지 못했다. 테오스는 제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었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너무도 많았으니까.

제국민들의 안정과 생명보다 자신의 생일을 우선시할 수는 없었다.

아델리아가 힘없이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 정도에 다다랐을 때.

“아델리아?”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델리아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빠?”

테오스였다. 아델리아가 다시 계단을 통통 뛰어 내려갔다. 푸른색 치맛단 아래로 꼬불꼬불 달린 하얀 레이스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빨리 돌아오신다더니 정말이었네?

그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있다.

무언가를 바라고 희망을 품었다가 그 희망에 도리어 상처 입는 것은 항상 아델리아 쪽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테오스를 보니 서운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반가움만이 앞섰다.

테오스를 향한 아델리아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아빠.”

다가온 아델리아를 테오스가 심각해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내려와 있는 거지?”

“아, 그게…….”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은 테오스의 얼굴에 아델리아는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테오스가 아델리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는 앞머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의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열은 없구나.”

“……네.”

아델리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테오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방금 아빠가 내 이마에 손을 댄 거야? 열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느라?’

테오스는 지나가던 하녀를 불러세웠다.

“데릭은?”

“도련님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쯧, 하녀의 대답에 테오스가 혀를 찼다.

“레널드에게 아델리아가 깨어났다고 전해라.”

“예, 각하.”

테오스는 공작가의 주치의 레널드를 불러 놓고 다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올라가서 쉬어라.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다.”

“전 괜찮…….”

괜찮다는 말을 하기 전에, 테오스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응?’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있었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아델리아의 의아한 시선이 자신의 뒤쪽으로 향하자, 테오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를 소개했다.

“새롭게 공작가에 고용된 사람이다.”

그러자 뒤에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모자를 벗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아……!”

아델리아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소리쳤다.

<델런의 행복퐁당 디저트>

아델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푸딩 가게의 파티시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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