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날 저녁부터, 식사를 끝낸 뒤 디저트로 푸딩이 올라왔다.
“아가씨께서 평소에 좋아하시던 커스터드 푸딩입니다. 라즈베리 시럽을 곁들인 치즈 푸딩도 좋아하셨지만, 커스터드 푸딩을 제일 좋아하셨지요.”
“……맞아요. 그걸 기억하고 계셨네요?”
“어떻게 잊겠습니까? 오실 때마다 저희 가게 푸딩을 극찬해 주신 분인걸요.”
“아…….”
머나먼 과거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이런 가게는 국보로 지정해야 한다니까? 다른 푸딩 가게들이 본받아야 해!
-이 가게 파티시에를 납치하자, 세라! 우리 주방에다 가둬 놓고 내가 먹을 푸딩만 만들라고 했으면 좋겠어!
큼큼, 아델리아가 헛기침했다.
‘일곱 살은 정말 무서운 나이구나.’
게다가 그때는 그저 가게 주인인 줄로만 알았지, 푸딩을 직접 만든 파티시에인 줄은 몰랐다.
아델리아는 푸딩을 떠서 입안으로 넣으며 테오스와 데릭을 힐끗거렸다.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앞에 놓인 푸딩을 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단 걸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푸딩이 뭐야. 단맛이 나는 과일조차도 입에 대지 않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푸딩을 먹고 있다니.
‘뭐, 이 푸딩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아델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푸딩 한 스푼을 떠먹었다.
하아……. 탄성이 절로 터지는 맛이었다.
델런 가게의 푸딩을 먹고 나면 다른 가게의 푸딩은 먹지 못하게 된다.
‘맛의 차원이 달라!’
아델리아는 행복하다는 얼굴로 입속에서 사라지는 푸딩을 음미했다.
데릭이 그런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테오스에게로 눈동자를 굴렸다.
‘분명 단 것을 싫어하시는 분인데.’
데릭은 자신 역시 푸딩을 먹고 있다는 걸 잊은 채, 테오스를 쳐다보았다.
테오스는 묵묵히 푸딩을 비워 내고 있었다. 가끔 그의 시선이 아델리아를 향했다가 다시 푸딩 접시로 돌아왔다.
‘파티시에를 직접 데려오실 줄이야…….’
가게가 문을 영원히 닫아 버린 줄 알고 낙담했다.
가게 주인의 아들은 가게가 팔렸다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고 데릭은 푸딩을 제외한 각가지 디저트를 싣고서 돌아왔다.
마차 가득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푸딩을 구하지 못한 이상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저택에는 아버지 테오스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명령을 어기고 저택을 빠져나간 일로 혼쭐이 나겠구나, 했는데.
웬걸. 테오스가 푸딩 가게의 주인을 공작가로 끌고 온 것이다.
-헛걸음하게 해 드렸군요, 도련님.
-아닙니다. 오히려 공작가의 사람이 되기로 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공작 각하는 제국의 영웅이자, 저의 우상이십니다.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델런이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의 스케일이 자신과는 달랐다. 매번 가게의 푸딩을 모두 사 오기만 했지, 그 푸딩을 만드는 파티시에를 끌고 올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버지.’
큰일을 할 사내는 눈앞의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데릭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탄식이 나왔다.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고. 아버지의 큰 배포를 본받아야겠다고, 데릭은 속으로 다짐했다.
***
<델런의 행복퐁당 디저트> 가게가 데미오르트 3번가 거리에서 사라졌다.
그 푸딩 가게의 주인이 공작저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금세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오늘도 공작저는 달콤하고 향긋한 푸딩 냄새가 가득했다.
“진짜라니까요? 각하께서 아가씨를 위해 모셔 온 거라니까요?”
“…….”
아침부터 하녀 세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에스테르 공작이 푸딩 가게 주인을 공작저로 데려간 것이 자신의 딸, 그러니까 아델리아 에스테르 공녀를 위해서라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아델리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헛소문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오늘따라, 세라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매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던 아델리아도 반복되는 주장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진짜……?’
정말일까? 하긴, 우리 세라가 없는 소리 지어내는 사람은 아니지.
‘그러니까, 아빠가 진짜 날 위해서 델런을 데려왔다고?’
테오스가 푸딩을 사러 갔다 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딸을 위해 파티시에를 직접 데리고 왔다는 말을 믿으라는 거지?
부정적인 생각과는 달리, 가슴께의 진동이 조금씩 커졌다.
흠흠, 아델리아는 작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입을 막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소파에서 내려왔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푸딩 먹으러.”
“제가 가지고 올게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세라는 쉬고 있어. 이런 것까지 막 사람 부려먹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랬어. 나, 그 정도쯤은 할 수 있는 일곱 살이라고.”
“네……?”
아니, 누가 감히 아가씨께 그런 소리를…….
아델리아는 당황해하는 세라를 두고 방을 나섰다.
‘푸딩 받으면서 은근슬쩍 떠봐야지.’
델런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테오스가 대체 뭐라고 하며 델런을 공작저로 데려왔는지.
‘정말 아빠가 나를 위해 데려왔다고 그러면 어떡하지?’
막상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되었다.
‘웃어야 하나.’
웃음이 나올 것 같긴 했다. 아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모든 게 의문스럽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좋은 일이잖아?’
계단을 내려와 본관 1층 서쪽으로 향했다. 주방이 있는 곳이었다.
“당분간 출정은 안 하신다며?”
어? 출정? 아빠 이야기인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청소하던 하녀들의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아델리아가 우뚝 멈춰 섰다.
‘당분간 출정이 없을 거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아빠가 일일이 나한테 행적을 밝힐 이유가 없으니까.’
그럴 사람도 아니고.
테오스는 항상 출정을 마치고 돌아와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며칠 밤을 새우곤 했다.
그리고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나면 곧장 다음 출정을 떠났다.
그만큼 쉴 틈도 없었고 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 나라가, 이 나라의 황제와 제국민들이 그를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상하다 했어. 저택에 돌아오시고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아델리아의 아카데미 입학 취소 건은 이미 잘 처리되었다.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출정을 나갈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는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아, 오러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오러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분명 알고 계실 텐데, 왜 시간을 끄는 거지?’
아델리아가 다시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
“아마 꽤 오랫동안 나가지 않으실 것 같아. 그래서 그동안 중지시켰던 연회도 다시 준비하라고 하셨대.”
“연회?”
“세상에! 얼마 만에 연회야!”
하녀들이 반가운 목소리로 떠들었다.
아델리아의 어머니 이레네아의 죽음 이후, 공작가의 안주인이 도맡아 하던 일들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그중 하나가 연회였다.
“기대된다. 그동안 우리 공작가만 연회가 없어서 괜히 뒤처지는 느낌이 들고 그랬는데.”
맞아, 맞아. 다른 하녀들도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창문틀을 닦고 있던 하녀가 말했다.
“아! 그래서 델런 파티시에도 데려온 거구나?”
“응, 카르벤 주방장님 혼자서는 다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하긴, 디저트가 연회의 평판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그렇지. ……그래도 난, 직접 데리고 오셨다길래 아가씨 때문인 줄 알았어.”
“그래도 마침 아가씨가 좋아하는 가게의 파티시에잖아. 이참에 우리 아가씨, 그 좋아하시는 푸딩도 많이 드시고 살도 좀 오르면 좋겠어.”
그건 그래. 하녀들이 맞장구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
아델리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럼 그렇지. ……아빠가 날 위해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또 뭘 기대한 거야.’
왜 이런 기대나 희망은 세월이 흘러도 멈출 수 없는 걸까.
참 미련도 하지…….
아델리아는 주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되돌렸다. 푸딩을 받겠다던 계획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사실, 푸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방으로 돌아온 아델리아는 한참 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는 갑자기 방을 뛰쳐나갔다가 시무룩해져 돌아온 아델리아가 걱정되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어쩐지, 말을 걸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때, 똑똑—
“아델리아 아가씨,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문밖에서 집사 일렌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창틀에 걸터앉아 있던 아델리아가 뚱한 얼굴로 내려와 방을 나섰다.
‘오러 때문이구나.’
저택으로 돌아온 뒤 며칠 동안, 테오스는 아델리아를 부르지 않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았고 황제가 수시로 불러 황궁을 오고 가야 했던 탓이다.
[뭐라고 하실 거예요? 오러 큐브를 만들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다 털어놓으실 거예요? 아니면 끝까지 나는 이게 뭔지도 모른다! 잡아떼실 건가요!]
머릿속을 징징 울리는 리그하르트의 목소리에 아델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넌 조용히 있어. 진동도 안 돼. 빛도 안 돼. 지금처럼 아무 때나 불쑥 말을 걸어도 안 돼.’
그러자 신난 듯 조잘거리던 리그하르트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그냥 절 뒤뜰에다 묻어 주시죠.]
‘뒤뜰 말고 말밥굽은 어때?’
[조용히 있겠습니다, 누님.]
‘…….’
그제야 리그하르트는 조용해졌다.
오러 큐브를 만들고 며칠 동안, 아델리아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잡아뗄 생각은 없다.’
시간을 돌아온 일은 떠들지 않겠지만, 최대한 가문과 연관된 이야기들은 필요하면 꺼내 놓을 생각이었다.
그중 하나가 자신의 오러 발현.
두 사람은 아델리아의 발현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잡아뗀다고 해서 먹힐 리가 없었다.
‘솔직하게 다 말해야 해.’
다만, 오러 큐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게 조금 걱정이었다.
“각하,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테오스의 집무실 앞까지 도착했다.
“들어와라.”
테오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아델리아가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일렌드가 미리 일러 준 대로, 데릭도 있었다.
“어서 와, 아델.”
데릭이 다정하게 반겨 주었다. 테오스가 자신의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리 앉거라.”
“……네.”
아델리아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소파로 걸어갔다.
푹신푹신한 소파의 감촉도 오늘은 그저 가시방석 같기만 했다.
“아델리아.”
아델리아가 소파에 앉자마자 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네, 아빠…….’
아델리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테오스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성검은 어디에 있느냐.”
[히익!]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