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황궁에 도착한 아델리아는 시종을 따라 정원 사이로 난 돌길을 걸었다.
연분홍빛 드레스가 발걸음에 맞춰 하느작대며 흔들렸다. 세라가 고르고 골라 입혀 준 드레스였다.
-황태자 전하와 검술 훈련을 받기로 하셨다면서요? 모시러 왔대요!
은빛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빗질을 하고 깔끔하게 정리하던 세라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세라. 네 말대로 검술 훈련하러 가는데 이게 뭐야? 이렇게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어떻게 훈련하라고?
-아가씨도 참!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가는데 훈련복을 입고 가실 생각이셨어요?! 세상에, 아가씨. 황궁에도 법도라는 게 있답니다. 지금 제가 그 예법에 맞게 치장해 드릴 테니 저한테 맡겨 주시라고요! 모름지기 첫인상이 중요하거든요!
-처음 아니라니까?
-아아, 이 드레스보다 역시 이쪽 분홍색 드레스가 낫겠죠, 그렇죠?
-…….
이미 극도로 흥분상태인 세라는 아델리아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아델리아는 태연했다. 조만간 황궁에서 부르겠거니, 예상하고 있었다.
‘폐하가 아니라 전하께서 마차를 보낼 줄은 몰랐지만.’
정원길을 걸어 황태자 궁에 도착할 때까지, 아델리아는 느긋하게 낯익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을 맡고 있는 루드라고 합니다.”
황태자 궁 입구에 도착하니 보좌관 루드가 마중 나와 있었다.
‘루드!’
아델리아는 어린아이다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드러난 웃음이었다.
“안녕하세요, 보좌관님. 다시 이렇게 뵙게 되네요. 처음은 아니죠? 얼마 전에 복도에서 마주쳤었잖아요.”
그러나 루드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때는 이름을 알려 드리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니, 지금이 처음 맞습니다.”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역시 쉽지 않다. 경계심 많고 남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은 여전했다.
과거에도 저 도도한 시선이 호의로 바뀌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었는데.
‘이번에는 더하겠지.’
과거에는 황태자가 직접 아델리아를 뽑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루드는 비교적 빠르게 마음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델리아의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입학을 바로 전날에 취소한, 고위 귀족 가문에서 곱게 자라 제멋대로인 귀족 영애로 알고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이번에는 첫인상부터 점수를 까먹은 것 같지?’
아델리아가 버릇처럼 리그하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곧장 들려와야 할 리그하르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 맞다. 아빠한테 맡겨 두고 왔지.’
황태자 궁과 신전은 가까웠다. 그 때문에 리그하르트를 황궁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혹시라도 성검의 기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다행스럽게도, 리그하르트는 테오스의 손 위에서 얌전했다.
-데려가요! 저 데려가라고요! 누님! 얌전히 있을게요! 네?!
물론, 소리도 지르고 부들부들 진동도 했지만, 아델리아를 따라 나오지는 못했다.
테오스의 손아귀에 붙잡히자, 꼼짝하지 못했던 탓이다.
‘아버지한테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더니 나름 조심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지금 리그하르트는 테오스의 집무실에서 테오스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따라오시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루드가 등을 돌리며 먼저 앞서 걸었다.
아델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루드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와, 여긴 그대로네.’
은회색 대리석 바닥 위로 채도 낮은 보라색 카펫이 깔렸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 카펫 위로 반듯하게 떨어졌다.
복도와 같은 은회색 대리석이 벽과 천장까지 견고히 둘러쌌고, 벽면 중간중간 걸려 있는 검은 철제 램프까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그때도 황태자 전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지.’
시야를 그득 채우는 검은 머리카락과 앞머리 사이로 언뜻거리는 보라색 눈동자가 흰 피부에 대조되어 유난히 돋보였다.
‘고작 열두 살 어린아이에게서 저런 분위기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단 말이야.’
혈통에서 흘러나오는 고고함과, 외모에서 드러나는 기품이 딱 이 황태자 궁과 같았다.
아델리아는 건물을 천장까지 천천히 훑었다.
‘은퇴하기 전까지는 종종 왔었는데…….’
은퇴가 결정되고 나서는 황궁을 떠나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카르세스를 만나러 올 수 없었다.
하루하루 굳어 가는 몸으로 황태자 옆에 있을 수도, 사람들 눈에 띄어서도 안 되었던 탓이다.
은퇴하게 되었다는 말도 직접 전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서신 하나 보낸 적이 없었다.
아델리아가 죽은 뒤에나 펠슨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아델리아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거의 1년 만이었다.
새삼 새로웠다. 자신이 황태자 궁에서 황태자의 호위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이었어.’
가족을 잃은 아델리아에게 전우라는 존재들이 생겼고, 그들과 또 다른 추억을 쌓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성검의 주인이 되었던 순간부터 황제의 개 노릇을 하느라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가문을 일으키고 가족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목표가 스스로를 좀먹고 있는지도 모르고.
행복은 언제나 작은 것에 깃들어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실수를 반복할 뿐.
옛일을 떠올리며 걷느라 아델리아의 걸음이 현저히 느려졌다.
자신의 걸음이 느려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루드와 거리가 한참이나 벌어진 상태였다.
‘어……?’
아델리아가 정면으로 시선을 올리자, 한참은 먼 거리에서 루드가 조용히 아델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다려 준 거였나?’
아니, 기다려 줬다기에는 저 눈빛이 마냥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
아델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기다려 준 게 아니라 관찰하고 있었네.’
루드답다고 해야 할지. 아델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속도를 내어 걸어갔다.
“황태자 궁이 너무 예뻐서 제가 넋을 놓고 있었네요.”
“네.”
짧게 대답한 루드는 감시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등을 돌렸다.
얼마 있지 않아, 황태자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전하, 에스테르 공작가의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와.”
문 안쪽에서 허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아델리아는 루드를 따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냐.’
자신이 모시던 상관의 어린 시절과 마주하는 것뿐인데 괜히 긴장되었다.
루드가 한편으로 비켜서자, 햇볕을 쬐고 있던 카르세스가 시야로 들어왔다.
카르세스는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좋아하던 자리였다. 볕이 고르게 들어와 따뜻하고 밝은 자리.
찰나였지만 어린 황태자에게서 성인의 황태자가 겹쳐 보였다.
-루드에게 말해 놨으니까 약 받아 가.
-약이라뇨?
-경,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어깨랑 정강이 쪽 안 좋잖아.
-…….
무심하게 건네는 말에는 그렇지 못한 세심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아델리아가 아는 카르세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그는 너무도 쉽사리 알아차렸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남들보다 먼저 챙길 줄 아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전쟁이고 뭐고, 몸부터 챙겨. 다 망가진 몸으로 돌아올 생각이야? 난 온전한 그대를 원해.
-전쟁에서 어떻게 다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다치지 마. 명령이야.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다치더라도, 내 옆에서 다쳐. 경을 고치는 건 내가 해.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황제 자리에 올랐을까?
말도 없이 사라진 자신의 호위 기사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전하…….’
가슴 한편이 찡, 하고 울렸다.
카르세스를 눈에 담고 있던 아델리아의 눈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전하, 제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라던 명령을 수행하러, 조금, 아주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돌아왔…….
“에스테르 가문은 예법도 모르는가? 아니면 입이 붙기라도 했나.”
그때,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코끝이 시큰해져 있던 아델리아는 불현듯 날아든 차가운 음성에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예?”
“들어왔으면 예를 차려야 하지 않느냐 물으십니다.”
루드가 옆에서 얄밉게 속삭였다.
‘나도 안다고. 그런 뜻이란 건!’
아델리아는 짧게 목을 가다듬고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델리아 에스테르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일어나라.”
“예, 전하.”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어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샌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창틀에서 내려와 서 있었다.
아직은 어리고 여린 체구였지만, 역시 황태자는 황태자였다.
햇살 아래 곧게 서 있기만 해도 그의 존귀한 존재감은 집무실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나와 검술 훈련 동기가 되었다고.”
그가 옅게 웃으며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아델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제 폐하께서 그리 명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통보를 받았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는 무감한 눈빛으로 아델리아를 응시했다.
“에스테르 영애.”
“예, 전하.”
“그대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감히 네까짓 게? 아델리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어째, 벌써부터 미운털이 박힌 것 같은데.’
황족으로서 자존심이 상한 걸까.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곁에 두던 그가 자격을 운운할 줄은 몰랐다.
“황태자 전하, 저를 곁에 두시면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없으실 거예요. 제가 이래 봬도…….”
“그래서. 검술 훈련을 하기 위해 입궁한 자가 드레스를 입고 왔는가?”
“아.”
아델리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꽃잎을 덧대어 지은 듯한 하늘하늘 드레스 자락이 시야로 들어왔다.
분명, 훈련을 하러 온 복장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미리 훈련복을 준비하여 탈의실로 보내 놓은 상태였다.
황태자와 제대로 된 만남은 처음이었기에 예를 갖추느라 드레스를 갖춰 입었을 뿐, 아델리아도 드레스보다는 훈련복이 더욱 편했다.
“전하, 실은 제가 이미…….”
“그것으로 이미 그대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가볍고 하찮은지를 알 것 같다.”
카르세스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말을 잘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것도 아니라면, 미래의 황태자비 자리라도 노리고 있는 것인가?”
“예에?!”
아델리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왜 이렇게 삐딱하셔?’
아델리아는 멀뚱히 뜬 눈으로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그만 돌아가라.”
“……네?”
“훈련을 위해 부른 게 아니었다.”
카르세스가 등을 돌려 창가로 걸어가며 아델리아를 한 번 돌아본 뒤 말했다.
“내 첫 검술 동기 얼굴은 익혀 둬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델리아는 그 미소에서 장난기 많은 소년의 얼굴을 엿볼 수 있었다.
거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화가 나긴커녕 가슴이 아팠다.
‘전하……. 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계시길래 이토록 삐뚤게 자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