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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6)화 (16/161)

16화

악시덤 대공의 괴롭힘 때문인가. 아니면 황제의 방관 때문인가.

‘둘 다일지도.’

성년이 된 카르세스에게도 황족 특유의 도도함은 있었다.

좋게 말해 도도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거만함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빼어난 외모와 압도적인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아우라는 그 거만함마저 우아하게 보이도록 했다.

거기에다 흉내 낼 수 없는 여유로움과 너그러운 아량까지.

그는 사람을 매혹하는 존재감을 가짐과 동시에 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 같았다.

마치, 감히 닿을 수 없는 하늘의 태양처럼 말이다.

‘완벽한 줄만 알았던 저 사내에게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아델리아는 짠한 마음이 들어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한창 반항적일 나이이긴 하지.’

황태자도 사람이었다. 누구나 다 겪는다는 정신적 성장통을 그 역시 겪고 있는 걸 보면.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푸근해졌다. 아델리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황태자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아델리아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수긍하자, 카르세스는 눈썹을 슬쩍 끌어올렸다.

그때, 아델리아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자격이 되는지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카르세스의 시선이 흥미롭다는 듯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차림으로 검이라도 뽑겠다는 건가?”

“설마요. 이런 좁은 곳에서 진검을 뽑아 휘두를 만큼 무모하지는 않습니다.”

아델리아는 집무실 안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리고 카르세스를 스쳐 창가로 걸어갔다.

사실 아델리아는 그를 상대로 실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와 마주치자마자 경계심을 드러냈다.

과거처럼 황태자가 자신에게 호의적일 거로 생각했다.

‘나 혼자 과거에 묶여 있었던 거야.’

대체 자신의 무엇이 그의 의심을 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우리 갈 길이 머니까 쉽게 쉽게 가자고요, 전하.’

타인의 경계를 빠르게 무너트리는 방법은, 역시.

‘내 비밀을 먼저 보여 줘라.’

아델리아는 커튼을 모아 묶은 두툼한 매듭 끈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진정한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이죠.”

그리고 곧장 커튼 끈을 풀었다. 차라락— 끈이 풀리자 묶여 있던 커튼이 힘없이 풀려나 창문 일부를 가렸다.

아델리아는 그 끈을 달랑달랑 흔들며 집무실 한쪽 끝으로 걸어갔다.

“누군가가 그랬거든요. 가장 좋은 무기는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는 그 물건이라고.”

“누가?”

“어…….”

아델리아가 눈동자를 굴렸다.

전장에서 수하들을 항해 자신이 하던 말이었다.

기사에게 검을 놓친다는 것은 생명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다.

자신이 위험에 닥친 순간, 무기가 없어 허무하게 죽느니 무엇이라도 들고 맞서 싸우라는 뜻으로 했던 말이었다.

그걸 이런 장소에서 써먹을 줄이야.

아델리아는 차마, 제가요, 라고 할 순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지금 제 손에 이 끈이 잡혀 있다는 게 중요하죠.”

아델리아는 끈을 손에 두어 바퀴 감아쥐었다. 그리고 채찍처럼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휘둘렀다.

타앙—! 흡사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루드는 놀란 눈을 뜬 채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저게 뭐야……. 오러?’

아델리아가 한 번 휘두른 끈이 금색과 푸른색을 섞어 놓은 듯한 묘한 기운에 휘감겨 빳빳해졌다.

마치 몽둥이 같기도 했고 검 같기도 했다.

드레스 자락이 흔들릴 정도로 검처럼 날렵해진 끈은 매서운 오러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드레스의 장식 중 그 어느 하나 망가진 게 없었다.

“힘은 가지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되죠. 얼마나 잘 제어하느냐에 따라 그 힘의 쓰임은 확연히 달라질 테니까요.”

아델리아는 아주 천천히 검이 되어 버린 커튼 끈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그 끈에서 묘한 울림이 퍼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루드가 검을 빼내려 하자, 카르세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은발이 흩날렸다. 분명 화려한 드레스는 거추장스러웠으나, 아델리아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검술에는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매우 기본적인 검술이었다. 그 기본적인 것에 묘한 색깔의 오러가 한데 어울리니, 마치 검무를 보는 것도 같았다.

드레스와 커튼 끈이라니. 그 희한한 조합에도 그녀의 검술은 무척이나 절도 있었다.

“황실 기사단의 검술이군.”

카르세스의 말에 아델리아는 행동을 멈추고 눈동자를 굴려 그를 보았다.

“아카데미도 들어가지 않았고, 황실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지.”

아델리아가 오러를 거두자 뻣뻣하고 단단하던 커튼 끈이 다시 흐물흐물 힘을 잃었다.

아델리아는 차분하게 표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건 제 오라버니께서 황실 기사단이셔서 그렇습…….”

“그래, 뭐. 그건 그렇다고 해 두지.”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의 말을 끊고 몸을 돌려 소파로 갔다.

“앉지, 영애.”

카르세스가 소파에 앉으며 아델리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델리아는 커튼 끈을 루드에게 건네준 뒤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다음 훈련이 기대되는군.”

“그 말씀은, 제가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걸 인정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인정해. 역시 에스테르 공작가야. 엄청난 천재들이 태어나는 걸 보면.”

아델리아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전하.”

“대단한 실력자들에 충직하기까지 하지.”

하하하, 그렇죠. 에스테르가 한 충직 하죠.

“제국민들의 찬양도 끊이질 않고, 그런데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기까지 해.”

아하하, 하하……. 그렇죠……. 계속되는 칭찬에 웃고 있던 아델리아의 입꼬리가 조금 떨렸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그는 다리를 꼬아 앉은 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어째서 잘 벼려진 칼날을 눈앞에 둔 기분이 드는 걸까.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기울였다.

“실력과 충심, 재력과 명예. 그 무엇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는 가문이지. 그래서.”

카르세스가 말을 끊고 다시 시작했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이 그렇게 그대 가문에 눈독을 들이는 걸까?”

“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뭐, 회유한다고 넘어갈 에스테르가 아니지만. ……계속 부는 바람에 꺾이지 않을 가지가 없다는데, 에스테르라고 버틸 재간이 있을까?”

“전하.”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불렀다.

“다음 훈련은 이틀 뒤로 하지. 그만 가 봐도 좋아, 영애.”

하지만 카르세스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아델리아는 어쩔 도리 없이 집무실을 나와야만 했다.

***

아델리아를 배웅하고 돌아온 루드가 카르세스의 곁에 섰다.

카르세스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시야로 정원과 정원 사이 반듯하게 난 돌길이 보였다.

잠깐 침묵하던 카르세스가 입을 열었다.

“조사하라던 것은?”

“그렇지 않아도 아스틴이 돌아왔습니다. ‘테트 도르’에 가시면 바로 보실 수 있으십니다.”

‘테트 도르’는 황태자 카르세스가 은밀히 사들인 건물이었다.

그곳은 카르세스가 신뢰하는 소수만이 알고 있는 장소였는데, 그곳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정보를 교류하고 계획을 세우고는 했다.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당장 가도록 하지.”

“예, 전하. 아침 일찍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루드가 대답한 뒤,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직접 보시니 어떠셨습니까?”

음. 카르세스가 짧게 침음했다.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모호하다. 분명 에스테르 공작가 사람이라면 적이라 볼 수 없는데, 몇 번이고 무례를 범했음에도 참고 웃어넘기는 걸 보면 뭔가 목적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카르세스가 몸을 돌려 루드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그 오러.”

“예, 전하.”

“그 나이에 오러라니. 그것 하나만으로 천재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인재였다.”

그리고 그것을 거리낌 없이 내보였다.

그에 비해 하는 짓이며 표정은 생각과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여느 일곱 살처럼 천진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일곱 살과는 다른 의연함과 대담함이 엿보였다.

“확실히, 그동안 숙부가 보내온 것들과는 달라 보였어.”

루드가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예, 그들의 증언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럴지도.”

황실에 충성하던 에스테르가를 의심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황제의 곁에는 친우처럼 아꼈던 주치의가 있었다. 그러나 반년 전, 그 주치의가 황제에게 오랜 기간 독을 먹여 왔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주치의는 배후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게 있었다.

그 주치의가 몇 해 전, 에스테르 공작에게 은혜를 입고 공작가에서 일했다는 거였다.

지금까지는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황태자의 최측근들만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바깥으로 새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황궁 여기저기에 대공의 사람들이 숨어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다 황제에게 먹인 약에 쓰인 독은 에스테르 가문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에스테르 공작 부인의 고향, 디크일레드 영지에서 재배되고 유통되던 독초였습니다.

모든 증거가 에스테르로 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황실은 물론, 제국민 모두가 에스테르 공작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었다.

창틀에 걸터앉아 한쪽 다리를 올린 카르세스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대놓고 몰아가도 의심을 받는 법입니다, 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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