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아델리아는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즈넉한 풍경이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갔다.
‘크게 의심받을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카르세스는 여유롭게 웃어 보였지만, 표정과 시선에 얕게 깔린 것은 의심이었다.
루드만 잘 구슬리면 될 줄 알았더니, 황태자도 만만치 않았다.
‘하긴, 예전 기억은 나만 가지고 있으니까 당연한 거야.’
그러니 서운할 필요도, 쓸쓸해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기분이 처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냐!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
황태자의 오해와 의심은 풀어내면 그만이야.
그런데 어떻게?
‘오러를 보여 줬는데도 의심하는 것 봐.’
열두 살 남자애 마음을 열려면 뭘 해야 하는 걸까?
끙, 아델리아가 미간을 좁히며 머리를 굴렸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언젠가는 그 진심이 그 사람에게 닿게 돼.
진심이라. 어쩌면 너무도 뻔한 소리였지만, 데릭은 항상 진심을 강조했다.
-진심의 힘을 무시하지 마, 아델.
실제로 데릭의 진심은 아델리아에게 빠짐없이 와 닿았다. 적어도 데릭만큼만 하면…….
“그래.”
아델리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두 번 밀어냈다고 포기하면 진심이 통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내가 더 잘해 주면 돼!’
실상, 자신의 정신 연령은 지금의 카르세스보다 월등히 높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누나라고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런 자신이 아이를 상대로 매번 발끈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오빠가 나한테 하듯이.’
아델리아도 카르세스에게 진심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의 의심이 옅어질 것이다.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말이야!
좋아! 그럼 역시, 사람 마음을 녹이는 데 필요한 건…….
“푸딩이지!”
혀 전체를 녹일 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푸딩!
공작저에 도착하는 즉시, 푸딩을 잔뜩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
***
테오스의 집무실에 들어오니 그의 엄지와 검지에 붙들려 있던 리그하르트가 소리쳤다.
[누님! 누님!]
테오스의 손끝에서 파르르르- 떨며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모습을 보니, 마치 꼬리가 떨어져 나가라 흔들어 대는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왔느냐.”
“네, 아빠.”
데릭은 잠시 외출한 상태여서 집무실에는 테오스와 아델리아 두 사람만이 마주 앉았다.
아델리아는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그 황태자가. 테오스는 황태자라는 단어를 어금니로 작게 씹었다.
아델리아는 잠시 사나워졌던 테오스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말을 이어 갔다.
“이틀 뒤에 다시 부르신다고 하셨으니, 훈련은 그때부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아델리아를 바라보던 테오스가 물었다.
“아직도 생각은 변하지 않았느냐.”
“생각이요?”
“……좋아서 가는 거라고 했었지.”
아, 그랬었다. 테오스가 황태자와 검술 훈련까지 취소할 기세여서 서둘러 둘러댄 변명이었다.
좋냐고? 당연히 좋지.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아델리아는 변장까지 해서 황궁에 잠입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황궁 내 소식을 얻기 위해 몇 배나 더 수고스러웠을 일을 단축하게 됐으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
아델리아는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아빠. 좋아요!”
그러자 테오스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한숨 쉬듯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뭐.”
잠깐 테오스의 눈빛이 가라앉는 듯 보여 아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
테오스는 마저 업무를 보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나가 봐도 좋다는 말에 아델리아도 더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리그하르트를 챙겨 테오스의 집무실에서 나온 아델리아는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너무했어요! 저를 두고 가시다니!]
“왜? 아빠가 괴롭혔어?”
[그건, 그건 아니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누님 곁에는 제가 있어야 하니까요!]
풋. 아델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지금은 널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라고.”
[…….]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조용해졌다.
‘삐지기는.’
아델리아는 키득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방으로 돌아오니 테이블 위에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편지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야, 세라?”
“로즈힐 영애께서 보내셨어요.”
“로즈힐? 카를리나?”
“네, 아가씨.”
[카를리나? 그건 또 누구예요?]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소파로 달려갔다. 풀썩— 폭신한 소파 위로 뛰어 올라가 앉아 편지를 뜯었다.
“와…….”
무슨 편지지에서 향기가 나냐. 아델리아는 편지지를 코끝에 대고 스읍— 숨을 들이켰다.
이름 모를 꽃이 그려진 편지지는 딱 그 꽃을 닮은 향기가 났다.
‘귀족 영애는 편지지 하나에도 이렇게 신경 써야 하나 봐.’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귀족 영애들의 삶을 얼핏 엿본 것 같았다.
아델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편지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어느 부분에서 아델리아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세라!”
“네!”
“티파티! 티파티 초대장이야!”
드디어 아델리아에게도 첫 티파티 초대장이 도착한 것이다.
편지에는 이틀 뒤에 찾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글도 있었다.
대신 일주일 뒤에 열리는 티파티에 참석해 줄 수 있냐고.
‘기억하고 있었구나.’
카를리나는 아델리아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다시? 언제요? 내일이요? 오빠가 있을 때 다시 오신다면서요. 그럼, 내일 오시는 거 맞죠?
-이, 이틀 뒤에…….
언제 다시 올 거냐는 아델리아의 질문에 카를리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물론, 카를리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란 뜻은 아니다.
그저 귀찮게 칭얼거리던 아이를 달래기 위해, 그냥 해 본 소리인 줄 알았다.
‘천사네, 천사.’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고 연애 사업까지 족족 방해하던 어린아이를 자신이 개최하는 티파티에 초대까지 하다니.
“세라! 종이와 펜을 준비해 줘. 아, 그리고 우리도 이런 편지지 있을까?”
아델리아가 카를리나의 편지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세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물론이에요, 아가씨! 뭐든 준비되어 있어요! 아가씨께서 원하는 거라면 없어도 만들어야죠!”
향기 나는 편지지는 물론, 계절마다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을 말려 둔 것도 있으니 편지지와 함께 넣어서 보내면 좋아할 거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세라는 자기만 믿으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꽤 믿음직스러웠다.
세라는 편지를 적는 데 필요한 물품들을 상자 가득 챙겨서 돌아왔다.
과거에 결투장은 받아 봤지만, 티파티 초대장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갈게요! 무조건 가요!’
아델리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결국, 카를리나에게로 보내는 편지는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했다.
“아가씨…….”
반도 채우지 못하고 텅 비어 있는 편지지를 보며 세라가 또 눈가를 적셨다.
“아니……. 적을 말이 없어.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초대장을 보내왔으니 알겠다, 참석하겠다, 그런 대답만 하면 될 일이 아닌가?
편지지는 왜 이렇게 넓고 기다란지.
아델리아도 여백이 유난히 두드러진 편지지를 보며 괜히 민망해졌다.
벌써 하늘은 어둑해졌다. 큼큼, 아델리아는 민망함에 목을 여러 번 가다듬었다.
그리고 편지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은 뒤 녹인 밀랍을 부어 입구를 봉했다.
그 위로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가 떼어 냈다. 붉은 밀랍 위로 에스테르 공작가의 문양이 또렷하게 찍혔다.
“날이 밝는 대로 로즈힐 후작가로 보내 줘.”
“예, 아가씨.”
아델리아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티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유행에 맞춰 드레스도 좀 사고 장신구도 사야 했다.
사실, 그런 것들은 핑계고.
‘그걸 핑계 삼아 길드가 모여 있는 거리에 들러야지.’
드레스나 장신구 따위,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그런 것들은 대충 사다가 마차에 실어 놓자.’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를 하나라도 더 모으는 일이었다.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린 아델리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분명, 티파티는 핑곗거리에 불과했는데.
아델리아의 입가로 자그맣게 핀 미소를 따라 뺨이 둥글게 부풀었다.
***
다음 날, 아침부터 공작저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흘렀다.
“혼자 갈 수 있다니까?!”
“안 돼.”
“왜 안 돼?!”
“넌 아직 일곱 살이야.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이래?”
“위험해? 내가 위험해진다고? 누가 날 해코지할 수 있다고?”
“이건 네가 얼마나 강한지와는 상관없어.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거니까.”
“과잉보호야!”
“어린애는 보호가 필요한 거야.”
“나 어린애 아니……!”
아, 일단 오빠 눈에 어린애이긴 하지.
아아, 아델리아가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데릭은 아델리아를 지나쳐 먼저 마차로 향했다.
‘아, 정말. 안 되는데…….’
어젯밤에 세운 계획대로 공작저를 나가자마자 길드를 찾아가려 했다.
때마침 도착한 카를리나의 티파티 초대장 덕분에 의심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복병이 숨어 있을 줄이야.
“오빠아아…….”
“어서 타, 아델. 어차피 짐꾼도 필요했잖아?”
데릭이 아델리아에게 손을 내밀며 싱글거렸다. 아델리아는 그런 데릭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작가의 후계를 짐꾼으로 쓰라고?”
“뭐 어때. 나만큼 튼튼한 짐꾼은 흔치 않다고.”
“…….”
아델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고집불통.’
아델리아의 고집은 집안 내력이었다. 테오스도 그렇겠지만, 데릭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델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데릭이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아델, 둘이서 외출하는 건 처음이다. 그렇지?”
“…….”
데릭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연신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데릭을 뾰족하게 바라보던 아델리아도 결국 그의 천진함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뭐.’
저렇게 좋아하는데, 오늘만큼은 어울려 줄까?
달그덕달그덕, 마차가 길 위를 빠르게 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차가 멈춰 섰다. 수도의 번화가 데미오르트 광장이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데릭이 눈매를 어여삐 접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처음은 가볍게 드레스부터 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