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두 번 가벼웠다간 가문 금고가 거덜 나겠네.’
저렇게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 아니었는데…….
데릭은 이미 마차 다섯 대를 드레스로 가득 채워서 보내고 다시 다른 마차를 불렀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는 지금도 진열대 앞에 서서 드레스를 보고 있었다.
“오빠, 그만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의상실에는 드레스를 구경하고 있던 귀족 영애들이 많았다. 영애들은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데릭을 훔쳐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뭐, 우리 데릭 경이 특출난 외모긴 하지.’
갓 성년이 된 귀족 영애들부터, 아델리아 또래의 작은 영애들까지.
데릭과 아델리아를 번갈아 보며 신기해했다.
“겨울에 입을 것도 좀 사야지.”
아델리아가 지쳤다는 어투로 투덜거렸다.
“그건 겨울에 다시 오자, 오빠.”
“이왕 나온 김에 사지 그래?”
“그사이 내가 더 크면 어쩌려고?”
“아.”
데릭은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산 것도 내년이면 못 입을걸.’
휴우. 아델리아는 그제야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3층으로 가자.”
“어?”
3층? 3층은 또 뭐야.
의아해하는 아델리아를 보며 데릭이 말갛게 웃었다.
“장신구도 사야지.”
이 건물의 1층과 2층은 드레스, 3층과 4층은 장신구가 진열되어 있다고 말을 덧붙였다.
‘왜 저렇게 잘 아는 거야?’
아델리아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자, 아델.”
데릭이 아델리아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건물의 크기만큼 계단도 굉장히 넓고 제법 높았다.
그때였다.
“아가씨! 같이 가요!”
“시끄러워! 살 거라고! 난 저 머리핀 사고 싶다고!”
“마님께서 장신구는 많으니까 드레스만 보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하녀가 어린 영애의 고집에 안절부절못하며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싫어! 싫다고! 아까 그 머리핀 살 거야! 사고 말 거……, 으악!”
분에 못 이겨 계단을 내려오던 아이의 몸이 크게 휘청이다 아래로 기울어졌다.
“아가씨!”
하녀가 소리치며 손을 뻗었지만, 아이의 몸에 닿지 못했다.
순간, 아델리아가 데릭의 손을 떨치고 순식간에 튀어 올랐다.
“꺄악!”
그리고 아이의 몸을 가뿐하게 받아 냈다. 그 반동으로 계단 아래까지 몸이 밀려났지만, 착지 또한 우아하게 마무리 지었다.
아델리아는 품에 안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영애?”
“…….”
눈가가 붉어진 채 아델리아를 올려다보는 아이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툭, 바닥으로 아이의 머리에 꽂혀 있던 머리핀이 떨어졌다.
아델리아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바닥의 머리핀을 주웠다.
“이런, 예쁜 머리핀이 엉망이 되었네.”
“…….”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아이는 넋을 잃고 아델리아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델리아가 머리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서 아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속상해하지 마요, 영애. 그 머리핀이 아니어도 영애는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
“아가씨!!”
하녀가 그제야 허겁지겁 내려와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댔다.
아델리아는 아이에게 웃어 주고서 등을 돌려 데릭에게로 갔다.
데릭이 한쪽 무릎을 세워 내려앉으며 아델리아를 살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봤잖아. 완벽한 착지였어.”
그러자 데릭이 이마를 짚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델, 위험했어. 내가 나서도 되는 일이었다고.”
“거리상 내가 가까웠어.”
“너, 오러까지 썼잖아.”
“내 힘만으로는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 낼 수 없거든. 그리고 아무도 못 봤어.”
“하여간…….”
데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야?”
“어? 그런 말투라니?”
“내 친우들이 귀족 영애들한테나 쓰는 말투.”
“아…….”
아델리아가 탄식하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또 나온 모양이다. 성검의 주인, 제국의 영웅이었던 그 아델리아가.
아델리아는 성검의 주인으로서 전장에만 나갔던 것은 아니다.
황제와 황실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그들을 비난하는 제국민들 앞에 서야 했다.
그녀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영웅이 되도록 강요받았다.
실제로 황제와의 약속이 그러했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수년. 이제는 그것이 연기였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습관처럼 몸에 배어 버렸다.
조금 전 상황도 그랬다. 그 어린아이를 구한 것은 일곱 살의 아델리아가 아니었다.
아델리아는 뺨을 긁적였다. 조금 전 떨어졌던 아이를 잠시 돌아본 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이 없으면 됐지, 뭐. 우린 올라가자.”
그러자 그 뒤를 따라가던 데릭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너 방금 되게 기사 같았어.”
“무슨 소리야.”
“아델리아 경.”
“하지 마.”
“아델리아 겨엉—.”
데릭이 장난스레 웃으며 아델리아의 뒤를 따라 3층에 올랐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제가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흐어어엉— 하녀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자신이 모시는 어린 영애의 몸을 살폈다.
그러자 계단을 올라가는 두 남매를 멍하니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누구야?”
“예?”
“방금 날 안고 휘리릭 날았다가 바닥에 착, 사뿐하게 내려온 사람.”
아……. 하녀가 소매에 눈물을 닦으며 계단으로 고개를 올렸다.
은빛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 옆에는 그 유명한 데릭 에스테르 경.
많은 계산을 거치지 않아도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에스테르 공작 가문의 아델리아 에스테르 영애셔요.”
“뭐어?!”
올리비아가 놀란 눈을 뜨고 하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분이 에스테르 영애라고?!”
저분? 하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네, 분명해요. 옆에 계시는 분이 데릭 에스테르 경이시거든요. 그분과 함께 다니는 어린 영애라면 에스테르 영애뿐이에요.”
올리비아는 넋이 나간 눈으로 다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 검밖에 모르고 성격 괴팍한…….”
합! 올리비아는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자신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공작 가문의 영애더러 괴팍하다니. 공작이 들었다면 사달이 날 소리였다.
“소문과는 너무 다르잖아…….”
올리비아가 중얼대자 하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다행이에요? 때마침 에스테르 가문 사람이 지나가고 있어서.”
“그러게.”
올리비아는 자신의 두 뺨이 붉어졌는지도 모른 채, 공작가의 두 남매를 가만히 응시했다.
“에스테르……. 아델리아 에스테르…….”
***
3층으로 올라서니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오히려 드레스 쪽보다 장신구 쪽이 아델리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검날처럼 완벽하게 커팅된 주먹만 한 목걸이들 하며, 여차하면 무기로 써도 될 정도로 큼직하고 날카로운 반지들까지.
‘저 반지를 끼고 인중을 때리면.’
근접전에 매우 좋은 무기가 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제가 있는데 다른 무기가 왜 필요하세요!]
‘시끄러워. 넌 어디 가서도 꺼내 놓지 못할 부끄러운 자식이라고.’
성검을 꺼내 들었다가 혹시라도 신전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라고?
흥, 아델리아는 그 뒤로도 계속 투덜거리는 리그하르트의 목소리는 무시했다.
아델리아가 노골적인 눈동자로 진열대 속 장신구들을 탐하고 있을 때.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데.”
데릭이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웃으며 계단을 가리켰다.
“3층은 주로 귀부인들께서 사용하실 장신구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4층으로 가시지요.”
“그러지.”
어어? 난 이것도 좋은데?
아델리아는 진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데릭에게 이끌려 4층으로 향했다.
4층은 비교적 작고 아담한 장신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4층에 있는 영애들도 죄다 아델리아 또래였다.
‘이게 뭐야.’
그 어느 하나 제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무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딱 꼬맹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거네.
“어때, 아델?”
데릭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델리아의 머리 오른쪽 위에 루비가 달린 리본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네 은발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마음에 들어?”
“으, 으응.”
아델리아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걸 가져와도 마음에 차지 못할 것 같았다.
아래층의 보석들이 아른거렸던 까닭에.
“이쪽 진열대와 그 옆의 진열대 물건들도 모두 포장해서 공작저로 보내 놓게.”
“예, 알겠습니다!”
가게 주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건을 쓸어 담았다.
그런 데릭을 보며 아델리아가 걱정하듯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빠한테 혼날 거야. 쓸데없이 많이 샀다고.”
그러자 데릭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닐걸?”
작게 웃음을 터트린 데릭은 아델리아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서며 물었다.
“이젠 어디로 가 볼까?”
“가다니, 어딜?”
“티파티에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는 준비됐고.”
“응.”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아델리아를 흘깃거리던 데릭이 허리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아델리아의 귓가에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진짜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까?”
“……어?”
“집을 나와 혼자 몰래 가려고 했던 진짜 목적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