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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19)화 (19/161)

19화

아델리아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깜짝 놀랐네. ……어떻게 아는 거야?’

그냥 찔러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드레스와 장신구를 사기 위해 외출한다는 것이 그저 핑계뿐이라는 걸. 데릭은 진작 눈치챘던 모양이다.

아델리아는 놀란 티를 내지 않은 채,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

그때였다.

꼬르르륵—

“…….”

“…….”

데릭이 커다래진 눈으로 아델리아의 배를 쳐다보았다.

푸흣. 데릭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주먹으로 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때가 되었지.”

아델리아의 얼굴이 단박에 붉어졌다.

“그게…….”

“어쩐지. 아침을 적게 먹더라니.”

“아니…….”

크흠, 데릭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말을 이어 갔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성장기 아이는 그래도 돼, 아델.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고, 먹고 돌아서면 또 배가 고픈 게 정상이야.”

“……그만해.”

데릭이 키득키득 웃으며 마부에게 말했다.

“데보나 분수대로.”

“예, 도련님.”

***

아델리아가 데릭과 함께 도착한 식당은 수도의 번화가 중심, 데보나 분수의 정면에 있는 식당이었다.

“크로노피아 델 타베르노?”

“천상의 맛이라는 뜻이지.”

“유치하게.”

“유치한지 아닌지, 들어가서 먹어 보면 알겠지?”

“오, 자신만만한데?”

<크로노피아 델 타베르노>

대리석으로 보이는 흰색 바탕에 금색 도료로 가게 이름을 그려 넣은 간판이 화려한 외관과 잘 어울렸다.

아델리아도 이 가게를 알고 있었다. 여기는 예약하려면 족히 반년이 걸리는 곳이었다.

‘훈련과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아냈대?’

아델리아는 데릭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 거리도 오랜만이고 이 건물도, 저쪽 건물도 진짜 오랜만이네.’

아델리아는 과거의 추억이 잠시 떠올라 주위를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아델리아는 이 거리가 매우 익숙했다.

성검의 선택을 받기 전, 황태자의 호위 기사였던 시절.

그녀는 황태자와 수시로 이 거리로 나와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특히, 저기.’

아델리아의 시선이 습관처럼 길 건너 맞은편 건물로 향했다.

<테트 도르>

연한 색의 나무 간판에 짙은 남청색으로 테트 도르라는 가게 이름이 휘갈겨 쓰여 있었다.

그 간판을 보며 아델리아는 그윽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아지트.’

그녀의 시선은 다시 3층으로 향했다. 창문은 열려 있었으나 안쪽은 불빛 하나 없어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때는 저기에서 이 가게를 쳐다보며 군침 흘리곤 했는데.’

참 예약하기 힘든 가게라고 구시렁거렸던 기억이 있다. 인생 참 알 수 없다.

‘지금 이렇게 이 가게 앞에서 우리 아지트를 쳐다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아,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저길 근거지로 삼았던 게 언제부터였지?’

성년이 되고 나서였던가?

그것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어, 아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지배인과 이야기를 마친 데릭이 아델리아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아델.”

“아, 응.”

한동안 3층을 올려다보고 있던 아델리아는 시선을 거두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테트 도르>라는 이름의 이 3층짜리 건물은 1층이 레스토랑, 2층은 투숙객을 받는 여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창 손님들이 몰릴 시간인데도, 그 건물의 3층만큼은 통째로 텅 비어 있었다.

창밖이 보이는 창문가 테이블 하나만 빼고.

황태자의 보좌관 루드가 식탁 위로 음식을 내려놓았다.

“드십시오, 전하.”

“…….”

카르세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둔 채 대답했다.

“생각 없다.”

“드셔야 합니다. 어제도 종일 굶으셨지 않습니까.”

루드가 간곡히 청했다. 그제야 카르세스는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었다.

그가 황궁에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카르세스의 나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는데,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피를 토했다.

음식에 독이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독의 내성을 끌어올리는 훈련을 시작했고 어지간한 독에도 견딜 수 있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황궁 안에서는 될 수 있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황궁을 빠져나와 바깥에서 허기를 채웠다.

카르세스는 루드가 건네준 음식을 대충 씹어 넘기며 아스틴이 조사해 온 자료를 살폈다.

<아델리아 에스테르>

아델리아를 조사한 자료였다.

내용을 훑어 내려가던 카르세스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대단하네. 수석 입학이라니.”

“예, 어릴 적부터 공작가의 기사단원들과 함께 훈련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냐고 물었던 게 민망해지는군.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었어.”

카르세스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조사 자료의 내용은 꽤 단조로웠는데,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아델리아 에스테르의 행동에 보통의 귀족 영애라고 볼 수 있는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거였다.

“돌연 입학 취소? 이유는?”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조사 기간을 짧게 잡았던 탓에, 조사 내용이 상세하지는 못했다.

그저 아델리아 에스테르라는 인간이 이런 사람이다, 정도.

“오러에 대해서도 적혀 있는 게 없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공작가 사람들이 모르거나, 숨기려는 것 같습니다.”

“에스테르 공작이 어떤 사람인데 그걸 모르겠어? 알면서도 숨기려 하는 걸 거다. 그런데 그것을 내 앞에서 보란 듯이 보였단 말이지.”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카르세스의 눈매가 흥미롭다는 듯 휘었다.

“그리고, 며칠 전 신전에서 사고가 있었던 모양인데.”

음, 카르세스가 서류의 중간 부분을 손끝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여기, 성검이 사라진 일 말이지.”

“예, 전하.”

신전이 뒤집히고 황궁도 덩달아 뒤집혔다.

아직 제국 전체로 이야기가 흘러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성검을 찾지 못한다면 제국민 전체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악시덤 대공이 영웅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테오스 공작이 차지했다. 테오스가 황제의 사람인 덕분에 기세등등하던 귀족파가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전에서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 일이 퍼지게 되면 신전과 황실은 또다시 민심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직 못 찾았다고.”

“예, 그래도 공작가의 사람들이 가지고 간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신전의 지누엘 신관이 그랬습니다.”

음, 카르세스가 건조한 시선으로 서류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루드가 말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뜩이나 사람들의 시선이 공작가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루드가 또 다른 종이를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성검의 생김새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이 성검의 크기도 테오스 공작의 검만큼 길고 커다랬습니다. 도저히 숨겨서 들고 나갈 수 없는 크기죠.”

“…….”

성검이 그려진 서류로 시선을 잠깐 옮겼던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예, 전하.”

“……그 성검이 모습을 숨길 수 있다거나,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면?”

“……예?”

카르세스의 말에 루드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하긴 혼자서도 움직이는 검이긴 했죠…….”

“그렇지. 성검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우리는 아직 모르니…….”

카르세스의 말끝이 늘어졌다.

대화 도중, 무심결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낯설지 않은 인영을 발견한 탓이었다.

“전하?”

“…….”

루드가 그를 불렀지만, 카르세스는 미간을 구긴 채 창밖 아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뭘 저리 죽일 듯 보시는 거지?’

한 번씩 무언가를 주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보라색은 속을 가늠하기 힘든 묘한 색이다. 그런 색을 띠는 카르세스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마치 속을 훤히 내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전하, 밖에 무엇이 있길래…….”

루드가 카르세스의 곁으로 가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쳐다보았다.

“……어?”

“…….”

“에스테르 영애 아닙니까?”

그러자 그제야 카르세스도 입을 열었다.

“옆에 에스테르 경은 안 보이고?”

“아. 그렇군요. 남매가 식사하러 나온 모양입니다.”

카르세스의 아지트, 테트 도르의 맞은편에는 유명한 식당이 있었다.

고위 귀족 가문의 사람이라 해도 예약이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 식당 앞에 에스테르 남매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카르세스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지금, 쟤. ……날 보고 있는 거 맞지?”

“아…….”

루드도 놀라고 있던 참이었다. 감히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못했다.

에스테르 영애는 정확히 이 건물의 3층, 게다가 수많은 창문 중, 하필 황태자가 앉아 있는 창문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3층 전체에 결계가 걸려 있어, 바깥에서는 안쪽을 볼 수 없다. 그저 어두컴컴한 비어 있는 장소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토록 그윽한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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