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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20)화 (20/161)

20화

“여기가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은 곳이래.”

“응?”

데릭은 아델리아의 접시를 가져가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가게 안을 둘러보던 아델리아가 데릭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런 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이런 쪽으로 아주 많은 걸 알고 있는 친구 녀석이 있어. 도움 좀 받았지.”

“…….”

이런 쪽?

아아, 숱한 여자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하고 은근슬쩍 손도 잡고 늦은 밤 강가에서 폭죽놀이도 구경하다가 어물쩍 밤도 같이 새는 그런 쪽?

아델리아가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데릭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냐…….”

그런 친우랑은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가 사라졌다.

‘뭐, 워낙에 반듯한 사람이니까.’

주위의 친우들이 ‘이런 쪽’으로 해박한 사람이라 해도 쉽사리 물들지는 않겠지.

데릭은 아델리아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원래 그런 쪽으로 눈치가 없는 편이기도 해서- 그저 해맑게 미소 지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자신보다 더 천진해 보였다.

‘저 순진해 빠진 오빠를 어찌해야 하나.’

아델리아가 이끌던 기사단원들은 그녀를 제외하고 모두가 사내였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은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몸을 씻으면서도, 갈라진 통나무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뜨끈한 스튜를 들이키면서도, 결코 음담패설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이 끔찍한 전시 상황의 유일한 탈출구라도 된다는 듯이, 꽤나 열정적이고 진지했다.

-‘실리오네 주점’ 이야기 들었냐.

-아, 린디 말하는 거지? 거기 여사장.

기사들은 모였다 하면 여자 이야기를 했다. 어떤 때는 함성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꼴깍,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지고는 했다.

-와, 미쳤다.

-그렇지? 이번에 돌아가면 정식으로 프러포즈하고 아주, 밤인지 낮인지 모를 정도로 일주일 내내 방구석에서 천국을 맛보여 줄 거다!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그만 안 해? 부단장님도 계시는데!

-어……? 아! 언제 오셨습니까.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아델리아가 있었다.

귀를 막지 않는 한, 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태연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듣다 보니 재미있기도 해서 내버려 두었다.

그런 음담패설이 기사들의 사기에 도움이 된다면, 아델리아는 기꺼이 너그러운 상관이 되어 주리라 생각했다.

-이해하십시오. 필래드가 노총각이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아델리아는 무감하게 대답했다.

-여기 노총각이 저놈 하나뿐인 것도 아니지 않나.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놈들이 수두룩할 텐데?

-너무하십니다…….

이제 와 떠올려 보니, 그들의 작은 희망을 무참히 짓밟은 듯해서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쨌든,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 데릭 에스테르 경이 그러는 건 상상이 잘 안 되는데.’

데릭에게 아델리아가 언제까지고 나약한 여동생이듯이, 아델리아에게도 데릭은 영원히 순수하고 다정한 오빠였다.

아델리아는 그를 걱정하는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오빠가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조신하게, 한 사람이랑만. 응?

“……응?”

데릭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손을 뻗었다.

“접시 줘. 나 배고파, 오빠.”

“아, 응.”

데릭이 스테이크를 잘라 놓은 접시를 아델리아 앞에 내려놓았다.

‘어쩜. 칼질도 잘하지.’

아델리아는 접시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못하는 게 없네, 우리 오빠는.’

반듯반듯하게 썰려 있는 고기들은 마치, 출정을 앞둔 기사들과 같았다.

새하얀 접시 위에 흐트러짐 하나 없이, 나란히 대열을 맞추고 있었다.

어느 하나 집어 먹기 아까울 정도로.

그러나 그런 감동도 잠시. 성장기 아이의 배고픔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델리아의 포크가 부지런히 접시 위 고기들을 해치워 갔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아델리아가 남은 가니쉬 채소를 포크로 괴롭히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내가 때가 되면 다 알려 준다고 했잖아. 왜 사람을 떠보고 그래?”

응? 막 마지막 고기를 입 안으로 넣으려던 데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드레스 사고 나와서.”

“아아.”

-진짜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까?

-……어?

-집을 나와 몰래 가려고 했던 진짜 목적지 말이야.

데릭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어.”

그리고 아델리아를 향해 눈웃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 혼자서 다 할 거잖아.”

그리고 네가 위험에 빠져도 우린 모르고 있겠지.

데릭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의 가라앉은 미소를 보니 아델리아는 그녀대로 또 가슴이 아팠다.

치…….

아델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코끝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좋아. 말해 줄게.”

“진짜?”

데릭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응, 대신. ……질문은 안 받아. 내가 하려는 일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래, 명심할게.”

데릭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리아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델리아의 시야로 데미테오르 거리와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대장간.”

“대장간?”

“응. 대장장이 한 명을 공작저로 데려갈 거야.”

데릭이 잠깐 놀란 눈을 떴다. 그러나 금세 미소로 바뀌었다.

“그래, 알았어.”

“그리고 아빠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오빠가 눈여겨보던 사람이라고 대충 에둘러 말씀드려.”

“응. 그렇게 할게.”

데릭이 천진하게 웃었다. 그는 떼를 써서라도 따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델리아는 뭐든 혼자서 해결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근래에는 그게 더욱 심해졌다.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조금이라도 짐을 나눠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델리아와 데릭은 식당을 나와 마차에 올랐다. 아델리아는 마차에 앉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매그너스 기사단은 제국 내 어떤 가문보다 출정을 많이 나가잖아.”

“그렇지.”

“그래서 갑옷이나 무기가 빨리 닳더라고.”

일곱 살의 아델리아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처우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델리아는 그것이 전력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병기는 기사단의 생명과 직결된 부분이야. 아빠는 전장에 계시는 시간이 많아서 챙기기 힘들고, 오빠는 황궁에 있느라 챙기기 힘드니까 나라도 챙겨야지.”

으휴, 내가 아니면 누가 또 이런 걸 챙기겠어?

아델리아가 한숨을 섞어 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델리아의 말에 데릭의 눈꼬리가 슬쩍 내려가는 듯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응?”

-나는 그 아이가. ……살아만 준다면 뭐든 하게 해 주겠다고 맹세했다. 그게 아델리아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라면 나서서 말릴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켜보고 싶구나.

데릭은 테오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천연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잊지는 마.”

“뭘?”

데릭의 손이 아델리아의 코끝을 톡 건들고서 떨어져 나갔다.

“너 일곱 살이야.”

“……알아.”

아델리아는 코끝을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데릭이 또 웃었다.

“좋아. 그럼 이제 어디로 가면 돼?”

아델리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데미오르트 21번가에 대장간이 하나 있어. 골목 가장 안쪽에, 가장 허름한 대장간.”

“응.”

데릭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마부에게 전달했다.

“데미오르트 21번가로.”

마차가 출발했다.

***

“아델, 문을 닫았는데?”

“…….”

아델리아는 잠긴 대장간의 문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노베트 힐트피치의 대장간>

노베트는 이 제국에서 유일하게 성검을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였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곧 그렇게 될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 대장장이라는 소리였다.

먼 옛날, 성물을 녹여 성검으로 만든 자의 후손이라고 했던가.

그런 위대한 업적을 가진 대장장이의 후손이 지금 이런 곳에서 허름한 대장간을 운영하는 이유는 딸아이 때문이었다.

‘데오나라고 했지.’

너무도 오래된 일이라서 깜빡하고 있었다.

노베트에겐 딸 데오나가 있었는데, 지금 이 시기가 데오나 때문에 한창 노베트가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어떻게 할래, 아델?”

데릭이 재차 물었다. 아델리아는 단단히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으로 나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퉁, 퉁, 퉁—!

“손님 왔어요! 손님 받으세요!”

“아, 아델.”

데릭이 놀라 문에서 잠시 아델리아를 떨어트렸다.

“다른 곳으로 가자. 닫힌 걸 보며 장사를 안 하는 거 같아. 아예 가게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꼭 이곳이어야 해.”

“…….”

아델리아는 데릭의 손을 떼어 놓고 다시 문으로 걸어갔다.

퉁! 퉁!

“문 좀 열어 주세요! 네에?!”

데릭은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작은 주먹이 거친 나무 문을 필사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아이의 살갗이 조금씩 붉어지는 게 보였다.

“아델.”

“말리지 마.”

“아니, 말리는 게 아니라…….”

데릭은 아델리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에다 세웠다.

“내가 할게.”

그리고는 자신이 대신 문을 두드렸다.

쾅, 콰앙! 쾅!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왔습니다! 안에 아무도 없습니까?!”

문을 내리치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나무 문이 살려 달라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나무 문을 두들겨 대던 데릭이 아델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음. 아델, 아무래도 진짜 없는 것 같아.”

데릭은 잠시 고민하더니 해맑게 웃으며 물어 왔다.

“차라리 부술까?”

그 말간 미소에 아델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 아니. 부수는 건 안—.”

그때.

끼이이이이익—

곧 부서져도 이상할 게 없던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누구라고?”

열린 틈으로 한 사내가 비틀대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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