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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21)화 (21/161)

21화

꼴꼴꼴꼴—

노베트가 나무로 된 술잔에 대충 물을 담아 두 사람 앞으로 밀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릭은 아델리아 앞으로 향한 술잔을 빠르게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아델리아의 입으로 들어가는 거라, 물인지 술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아이에게 먹일 순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아델리아는 맞은 편에 앉은 노베트를 편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20년 전의 노베트 아저씨라니.’

노베트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아델리아는 대장간도 훑었다. 그러다 안쪽 주거 공간과 이어진 문을 발견했다. 아델리아는 그 문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저 안에 데오나가 있겠지.’

노베트는 이 시기에 대장간을 급하게 처분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겠다는 듯이.

과거, 아델리아가 은퇴한 이후 숲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러나 아직 대장간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데오나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지.’

그랬다. 데오나, 노베트의 하나뿐인 딸아이는 곧 죽을 예정이다.

노베트는 딸아이를 잃고 산속에서 홀로 지냈다. 그런 그를 악시덤이 황궁으로 데리고 왔다.

인재 싸움에서 악시덤 대공이 우위에 서게 만든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노베트였다.

‘가끔 악시덤 욕을 하는 걸 보면, 설득이라기보다 협박을 당해 끌려온 사람 같았어.’

노베트가 악시덤의 사람이긴 했지만, 아델리아에게는 각별했다.

그는 아델리아의 갑옷과 성검을 손수 살펴 주었다.

다른 기사들의 병기는 수제자들에게 맡길지언정, 아델리아의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손보았다.

노베트는 그 시간이 즐겁다고 했다.

-오신 김에 전장 이야기나 해 주시죠.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요.

-있었던 일을 있는 대로 말하면 됩니다. 대장간에만 박혀 있다 보면 바깥세상 이야기가 궁금하거든요.

-음, 그럼 지능을 가진 마수 이야기부터 해 드릴까요?

-좋습니다!

그는 아델리아의 갑옷과 성검을 만지는 일이, 그러는 동안 아델리아와 투박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이 지루한 황궁에서 유일한 낙이라고 했다.

항상 화가 난 얼굴의 노베트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해 보였다. 가끔 짓는 미소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성검은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도 있었는데, 아델리아는 노베트를 위해 일부러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유일한 낙이라는데, 그 낙을 빼앗을 순 없었으니까.

어쨌든 실력 하나만큼은 제국 내, 아니. 대륙 내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공작가의 대장간을 맡아 주시면 어떤 재료도 모두 공급해 드릴 수 있어요.”

최상의 작업 공간과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 주겠다는 아델리아의 제안에도 노베트는 무감한 표정이었다.

그는 안쪽과 이어진 문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에 아델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왜요?”

그 질문에 노베트는 쓰게 웃었다.

“지금 저에게는 망치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노베트의 시선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그 대답에 아델리아와 데릭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대장장이가 망치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그렇지 않아도 뭔가 이상했다.

뜨거운 열기가 펄펄 끓어야 할 용광로는 쓸데없이 냉랭했고, 쇠 냄새가 진동해야 할 공간은 악취만이 가득했다.

아델리아는 노베트의 젊은 시절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젊은 시절은 딸아이와 함께한 추억이 가득할 것이고, 그 딸아이를 잃은 슬픔이 가득할 것이다.

그 시간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봤으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그리고. ……살다 보니 그럭저럭 살아지더군요.

그는 단단했다. 떠난 이와 남은 이의 경계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펄펄 끓는 쇳물과 손에 맞게 길들여진 망치, 자신의 혼을 불어넣어 만들어지는 병기가 자신의 자부심이라 말했다.

그래서 망치질을 하지 않겠다는 그의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노베트는 다시 문을 돌아보았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안에 있는 데오나가 걱정되는 모양이야.’

노베트는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조건을 말씀하셔도 제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 그만, 돌아가 주시지요…….”

아델리아는 힘없이 돌아서는 노베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 커다란 사내의 등이 저토록 작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노베트는 스스로 동정받길 원하지 않았고, 실제로 황궁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쇠를 두드리며 단련된 근육질 몸은 위협적이면 위협적이었지, 오늘처럼 나약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 가며 망치질을 하던 강인한 사내에게도 이런 과거가 있었다니.

‘노베트 아저씨…….’

아델리아는 의자를 뒤로 빼내고 몸을 일으켰다.

할 줄 몰라서 못 하는 것과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가진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대체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편이지.’

오늘의 이 선택이 자신의 은퇴 시기를 조금 더 늦추겠지만, 눈앞에 고통스러워하는 친우를 두고 돌아설 만큼 아델리아는 매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양손을 테이블 위로 짚고서 노베트의 뒤통수에 대고 질문을 날렸다.

“따님 때문이에요?”

데오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노베트가 다시 몸을 돌렸다. 아델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험악하게 변했다.

살기에 가까운 분노가 흘러나오자, 데릭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검 위로 손을 올렸다.

“주인장.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 무슨 살기란 말입니까?”

그러자 아델리아는 데릭의 팔을 붙잡으며 진정시켰다.

“오빠, 괜찮아.”

그러자 데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노베트도 한숨을 내쉬며 기운을 누그러트렸다.

노베트는 다시 의자를 빼내고 앉았다. 제 딸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 뒷조사를 했습니까?”

아델리아는 미소를 지운 얼굴로 말했다.

“공작가에 사람을 들이는 일이에요. 아무나 들일 수는 없는 일이죠.”

그녀의 말에 노베트는 수긍하는 듯 보였다.

“지금 따님의 병명조차 모르죠?”

아델리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노베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만약.”

아델리아는 상체를 앞으로 조금 숙이며 말을 이어 갔다.

“따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공작가의 사람이 되어 주겠어요?”

그러자 노베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델리아는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요. 한 달. 아니, 일주일 내로 따님을 낫게 해 드릴게요.”

노베트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벼랑 끝에 몰렸다고, 가지고 놀 생각이라면…….”

“가지고 놀다니요. 그런다고 제가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전 단지, 신뢰를 얻으러 온 사람일 뿐인걸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정말. 그, 그게 정말 가능하단, ……말입니까?”

아델리아는 그를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명예는, 에스테르의 맹세는 절대 가볍지 않아요.”

“…….”

노베트 역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제국 내 에스테르 공작가의 위대한 명성을.

비록, 제 딸아이 또래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약속이었지만, 노베트는 지금 저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었다.

아델리아가 자리에 다시 앉으며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리고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물론, 병을 앓아 온 세월이 있으므로 완벽하게 치료된다고는 보장할 수 없어요.”

“아…….”

노베트가 탄식했다. 역시, 무리인 건가…….

“단지.”

“단지, 뭡니까……?”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만들어 놓으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조건이라도 내걸려는 것일까.

노베트가 불안한 시선으로 아델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심각한 표정을 하던 아델리아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스몄다.

“성년식을 치르고.”

노베트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당장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딸아이를 성년식이 될 때까지 살 수 있게 하겠다고?

그러나 아델리아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뭐라고요?”

“그리고 그 아이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아저씨의 품에 안길 때까지.”

노베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델리아는 쐐기를 박겠다는 일념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살 수 있을 거라고 약속드릴게요.”

에스테르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서.

아델리아가 이야기를 마치자, 노베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내 아이가. 우리 데오나가……. 살 수 있다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 데릭이 놀라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아델리아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눈이 커진 상태였다.

무릎을 꿇은 노베트가 띄엄띄엄 말을 이어 갔다.

“부탁, 입니다. 내 딸아이를. 내 딸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딸아이만 살아난다면……, 제 남은 목숨은 아가씨를 위해 불태우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노베트가 고개를 떨군 채, 울먹였다.

유명하다는 의원들조차 가망이 없다고 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이며 약초도 구해다 먹였지만, 도무지 낫질 않았다.

아니, 더욱 나빠졌다.

하다못해 마탑을 찾아갔지만, 입구에서 쫓겨났다. 흑마법까지 생각했다. 아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작정이었다.

저 말이 거짓이라도 당장은 좋았다.

저 어린 귀족 영애의 말에서 데오나는 성인이 되었고 결혼도 했으며 아이까지 낳았다.

짧지만 강력한 설득이었다. 그 설득은 꺼져 버렸던 희망을 되살리는 힘이 있었다.

아델리아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노베트의 곁으로 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일어나세요, 노베트 아저씨. 이런 건 따님이 건강해지고 나서 하는 거라고요.”

노베트가 붉어진 눈동자를 들어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아델리아는 눈매를 초승달처럼 접어 웃었다.

“그럼 우선, 거처를 공작저로 옮기도록 할까요? 여긴 치료하기 좋은 장소가 아닌 것 같거든요.”

아델리아가 코끝을 손등으로 쓱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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