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어머, 카를리나. 뭘 보고 그렇게 웃는 거예요?”
덩굴장미가 유명한 로즈힐 후작가.
로즈힐 후작저는 화려한 장미 옷을 벗고 가을빛을 띠기 시작했다.
카를리나는 점심시간쯤 도착한 서신을 뜯어보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후작가를 방문한 그녀의 오랜 벗, 비올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에스테르 경이 보낸 연애편지라도 돼요?”
그러자 카를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이 편지 같은 걸 쓰는 사람이던가요. ……이건, 티파티 초대장의 답신이에요.”
“답신이요?”
“네, 그런데 이런 건 또 처음이라.”
카를리나는 아델리아가 보낸 편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친애하는 카를리나>
‘친애하는, 이라고?’
언제부터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델리아의 편지에는 첫 시작부터 친근함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인사말이 이어졌다.
<레이디,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푸흡. 카를리나가 다시 웃음을 참았다.
아델리아와 같은 또래가 보낸 다른 답신에서 볼 수 있는 풋풋함과는 거리가 있는 인사였다.
‘이걸 정중하다고 해야 할지,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지…….’
<우선, 티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카를리나, 그대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저항하지 않는 성을 함락하는 일만큼, 몹시도 흥분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날까지 건강하시길. -그대의 벗, 아델리아 에스테르.>
편지 내용은 굉장히 짧았다. 보통 영애들의 편지는 일과를 일기처럼 적어 놓는 게 대다수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것이 당연한 예법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뭐랄까. 아델리아의 편지는 그에 비해 지나치게 짧았음에도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상, 그 짧은 문장 안에는 있을 것이 다 있었다.
안부 인사가 있었고 티파티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으며 마지막 인사까지.
‘저항하지 않는 성을, 함락?’
저항하지 않는 성을 함락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 리 없던 카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문장 하나 때문인지,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편지였다.
사실 답신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날, 아델리아의 친절은 변덕일 거라 여겼다. 어쩌면 그 아이의 새로운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마치 자신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답신을 보내왔다.
거기에다 향기가 듬뿍 밴 편지지와 정성 들인 책갈피까지.
푸흣, 카를리나가 약하게 말아 쥔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를리나가 그렇게 소리 내서 웃는 건 처음 봐요.”
“아……!”
카를리나는 자신이 품위를 잃고 크게 웃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입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이 아이랑 엮이기만 하면 뭔가 말려드는 기분이야.’
카를리나는 장미의 꽃잎을 하나하나 펼쳐 만든 책갈피를 들여다보았다.
그때, 비올라가 고개를 기울여 카를리나가 보고 있던 책갈피를 보았다.
“장미네요?”
“네, ……압화 실력이 좋네요.”
“그렇네요. 이렇게 색감까지 완벽히 살린 압화라니.”
비올라도 감탄했다.
“그래서, 누가 보낸 거예요?”
비올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카를리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에스테르요.”
“응? 아까는 아니라면서요?”
“데릭 말고요. 아델리아, ……아델리아 에스테르.”
“네? 데릭 경과 카를리나 사이에서 사사건건 훼방한다던 그 여동생?”
기사가 되겠다고 아카데미 시험을 쳤다는 그 영애?
카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에스테르 영애를 이번 티파티에 초대했어요?”
“네, 약속한 게 있어서요.”
“이번 티파티, 중요한 자리잖아요. 문제라도 일으키면 어쩌려고요?”
“아니요,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비올라도 보면 놀랄 거예요. 소문과는 다르거든요. 아니,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그래요?”
흐음, 작게 콧소리를 내던 비올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 티파티가 기대되네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비올라를 보며 카를리나도 따라 웃었다.
“나도 그래요.”
“좋아요! 카를리나를 그렇게 웃게 만든 에스테르 영애가 궁금해서라도 이번 티파티에 꼭 참석할게요.”
“그래요, 비올라. 소개해 줄게요.”
“좋죠.”
비올라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아, 맞다.”
비올라가 손뼉을 치며 주제를 바꿔 말했다.
“아버지께서 말을 선물로 주셨거든요. 그런데 카를리나도 알잖아요? 내가 승마에는 취미가 없다는 거.”
“그랬죠.”
“이번 티파티에 그 말을 상품으로 걸고 내기를 할까 하는데, 어때요?”
“내기요?”
“네, 그냥 차만 마시고 수다 떠는 건 이제 식상하잖아요?”
으음, 카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대공께서 선물한 말을…….”
“괜찮아요. 아버지도 제가 승마에는 관심 없는 거 아시니까요.”
비올라가 카를리나의 손등에 제 손을 얹으며 나긋하게 웃었다.
“마구간에서 평생 달리지도 못하고 죽느니, 좋은 주인을 찾아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요?”
카를리나가 잠시 고민했다.
비올라는 그녀의 오랜 벗이었다.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악시덤 대공을 아버지로 둔 까닭인지. 비올라는 작은 언행 하나에도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
‘별일 없겠지?’
티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작은 내기를 거는 일은 흔했다.
‘이번 내기의 상품이 말이라는 것은 조금 걸리는 게 사실이지만…….’
모든 귀족 영애들의 교과서적인 비올라가 큰 사고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요. 대신, 파티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게 짧게 해요.”
카를리나가 허락하자 비올라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이 다쳐서도 안 되고요.”
“물론이에요, 카를리나.”
응응! 비올라가 걱정하지 말라며 아름답게 웃어 보였다.
***
“그래서.”
테오스의 집무실. 세 사람은 소파에 앉아 노베트와 그의 딸 데오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를 치료해 주기로 했다고.”
테오스의 물음에 데릭이 대답했다.
“예, 아버지. 그 대장장이는 저희 가문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저희 사람으로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대장장이는 어떻게 알았느냐.”
“기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대장장이였습니다. 병기를 만들고 수리하는 솜씨가 제국 내 이미 따를 자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데릭은 아델리아와의 약속대로 자신이 노베트와 아는 사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노베트가 필요했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로샤크 전쟁이 터지기까지 2년.’
테오스와 데릭은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아빠가 그렇게 되고 악시덤이 직접 출정했었지…….’
그리고 악시덤은 대승을 거두었다. 검술이나 병력이 우세했던 게 아니었다.
‘그건 분명, 병기의 차이였어.’
악시덤과 그의 기사단이 무장한 병기가 바로, 노베트의 작품이었다.
‘솔직히 악시덤이 나를 죽을 때까지 굴린 것도 맞고, 황태자 전하를 괴롭힌 것도 맞지만.’
제국의 측면에서 보면 나라를 몇 번이나 구한 용맹스러운 영웅이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황제 자리까지 올랐으니, 능력이 없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아빠와 오빠가 우선이야.’
테오스를 로샤크 전쟁에 보낸 사람이 악시덤이었던 만큼, 그가 다시 업적을 세워 황제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황태자가 황제 자리에 올라야만 한다.
‘그래야 아빠가 은퇴를 할 수 있고, 아빠가 은퇴를 해야 로샤크 전쟁에 출정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막지 못해서…….’
그래서 2년 뒤, 테오스와 데릭이 로샤크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면.
‘적어도, 노베트 아저씨가 만든 병기는 우리 에스테르를 지켜야 해.’
예전처럼 아빠와 오빠가 죽는 일이 절대 생기지 않도록. 지금의 이 행복이 깨어지지 않도록.
무릎 위, 아델리아의 하얗고 동그란 주먹에 힘이 실렸다.
테오스가 느릿한 시선으로 데릭과 아델리아를 번갈아 보다 말했다.
“아이의 병은 레널드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데오나가 공작저로 오자마자, 테오스는 공작가의 주치의 레널드에게 아이를 살피도록 했다.
레널드 역시 다른 의원들과 같은 말을 했다.
-이런 증상의 병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고서를 뒤져 보면 언젠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긴 합니다. 지금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군요.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널드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증상의 원인이 밝혀지는 것은 앞으로 십수 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알고 있지.’
데오나의 병은 일반적인 병과는 조금 달랐다.
신력.
아이의 몸에는 신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먼 훗날, 펠슨 선생이 노베트에게 데오나의 증상을 듣고서 말했다.
-신력 때문이었네요.
펠슨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수많은 환자를 접했고 그들을 치료한 경험이 있었다.
-여기서 반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 섬이 있습니다.
그 섬에서 데오나와 같은 증상의 아이를 보았다고 했다.
-결국은 신력이었습니다. 그 어린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신력.
아델리아의 몸이 강한 오러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그래서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데오나 역시 허약한 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신력이 몸에 자리 잡은 거였다.
펠슨은 그때 자신이 로시안트 제국에 있었더라면 노베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거라고 안타까워했다.
‘아, 그러고 보니 건국제에 맞춰서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한댔는데.’
여름의 끝자락. 벌써 가을빛이 제국 곳곳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건국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펠슨의 행방을 찾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해.’
길드도 빨리 찾아가 봐야겠다. 고향으로 돌아온 펠슨을 놓치기 전에.
‘그래도 걱정하지 마요, 펠슨 선생. 이번에는 내가 선생 대신 그 아이를 살릴 테니까.’
아델리아는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쉬며 말했다.
“신전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빠.”
그러자 테오스의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향했다.
“이유를 말해 주겠느냐.”
“저 아이는 지금 신력과 싸우고 있어요.”
사실, 싸운다기보다 일방적으로 괴롭혀지는 느낌이지만.
아델리아의 말에 데릭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데릭이 이를 악물고 아델리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잖아.’
아델리아가 싱글거리며 테이블 아래 발을 움직여 데릭의 발등을 꾹 눌렀다.
‘윽.’
데릭이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바로 했다.
테오스가 물었다.
“신력이 목숨을 앗아간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의 말대로 보통 신관들은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몸속의 신력이 이토록 생명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다.
아델리아는 천연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종종 일어나잖아요?”
아델리아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아빠는 겪어 보셔서 이미 알고 있었다지만, 당장 밖에 나가서 아무나 잡고 물어보세요. 성년이 되기 전에 오러가 발현된 아이를 본 적이 있냐고. 아마,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걸요?”
아델리아의 말에 테오스는 생각에 잠긴 듯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아이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단정 지었던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기도 하니까.
아델리아의 오러처럼, 데오나의 신력 또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테오스는 조용히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그게 신력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아델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성검이 알려 줬어요.”
[에?]
……제, 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