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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24)화 (24/161)

24화

카르세스가 서류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잠깐 말없이 생각에 빠졌던 그가 루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루드, 대장간이 다시 열렸으니 숙부도 움직일 거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노베트를 확보한다. ……숙부에게 빼앗길 순 없어.”

루드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아스틴. 너는 디크레드 영지로 다시 가서 혹시 남아 있을 재배지를 찾아라.”

“예, 전하.”

“난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 폐하를 뵙겠다.”

카르세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루드와 아스틴은 빠르게 움직였다.

***

대장간이 있는 골목은 스산했다.

번화가의 구석답게 오고 가는 행인도 드물었다.

손끝으로 긁으면 부스럼이 떨어질 것만 같은 허름한 나무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똑똑— 대장간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불친절한 목소리가 불뚝 날아들었다.

“장사 안 합니다.”

루드가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며 실내에서 풍기는 악취에 코끝을 씰룩거렸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나는 무기를 사러 온 게 아니니까요.”

“그럼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노베트는 물건을 치우며 대꾸했다. 루드가 발끝에 걸리적거리는 잡동사니를 피해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루드는 몸을 똑바로 세워 정중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베트 힐트피치 씨. 우리와 함께 일하지 않겠습니까?”

“예, 안 합니다.”

빠르게 대답한 노베트가 후, 가구 위에 쌓인 먼지를 입으로 불었다.

그러자 루드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조건도 들어 보지 않고요?”

노베트는 물건을 쓸어 담은 상자를 차곡차곡 쌓으며 대답했다.

“이미 계약했습니다.”

“뭐라고요?”

당황한 루드가 나무 바닥의 쇳가루를 버적버적 밟으며 노베트에게 다가갔다.

“누굽니까? 얼마나 대단한 분이랑 계약했길래 이야기도 들어 보지 않고 거절입니까? 이 제국의 대공 전하쯤 된답니까?!”

루드가 노베트를 슬쩍 떠보았다. 그러자 노베트가 허리를 세워 루드를 쳐다보았다.

“거기서 갑자기 대공 전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겁니까? 뭐……, 대공께서도 제안하긴 하셨지만.”

그러자 루드의 미간이 잠깐 좁혀 들었다.

“하셨지만……?”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다고? 루드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대공 전하를 거절했단 말입니까? 대공 전하 정도면 보수가 적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럼 대체 누구랑 계약했다는 겁니까?”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합니까? 얼른 정리하고 나가야 하니, 그만 나가 주시지요.”

노베트가 루드를 휙 돌려세우고 등을 떠밀었다. 루드가 떠밀려 나가며 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 조건이 더 좋을 수 있…….”

“아, 됐다고 하질 않습니까.”

“잠, 잠깐.”

노베트가 루드를 달랑 들어 문밖으로 꺼내 놓았다. 그리고 쿵,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루드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미간을 구겼다.

‘낭패다.’

악시덤에게 빼앗긴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꼭 필요한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누가 데리고 갔는지 알아봐야겠어.’

루드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문이 잠겼지 않나.”

루드가 대장간에서 쫓겨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베트의 대장간 앞에는 또 다른 사내가 섰다.

고급 원단으로 지어진 화려한 복장이 높은 작위의 귀족임을 예상하게 했다.

로시안트 제국의 대공, 악시덤 프레이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악시덤은 각이 선 눈초리로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굽신거렸다.

“소, 송구합니다. 하지만 대공 전하. 분명, 조금 전까지는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도 보았고요.”

대장간 맞은편 건물에서 골동품을 판매하는 상인, 캘빈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캘빈은 몇 달 전, 대공에게서 묵직한 골드 주머니를 받았다. 그 골드를 받는 대가로 맞은편의 대장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어갔던 사람들은?”

“그게 이상합니다. 들어는 갔는데 나오는 것은 못 봤습니다.”

그러자 악시덤이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초조해진 캘빈이 중얼거렸다.

“뒷문으로 나갔나……. 다른 사람은 안 보이고 혼자서 정리하는 것 같던데…….”

캘빈이 중얼거리자. 악시덤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정리를 해? 무슨 정리? 혹, 아이가 드디어 죽었다던가?”

“……예?”

캘빈이 눈을 크게 떴다가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드디어라고?

대공은 마치 아이가 죽길 기다려 온 사람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누가 뭐래도 한때는 제국의 영웅이셨던 분이 아니신가!’

비록 지금은 그 자리를 에스테르 공작에게 내어줬지만, 그의 업적은 두고두고 입에 오를 만큼 대단한 것이기도 했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이는 여전히 그 상태인 것 같았습니다. 조금 전 슬쩍 물어보니 곧 치료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 하더라고요.”

“……치료?!”

“예, 전하.”

캘빈의 말에 악시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는 자신의 턱 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그걸 치료할 수 있는 약을 만들 수 없을 텐데.’

악시덤은 잠시 생각하다,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시종이 묵직한 주머니를 캘빈에게 건넸다. 악시덤이 짜증이 서렸던 표정을 금세 지우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수고가 많았네. 대장장이가 다시 나타나면 오늘처럼 바로 연락을 주시게. 그때도 오늘처럼 섭섭하지 않게 사례할 테니.”

“아이고, 아무렴요! 고맙습니다, 대공 전하!”

캘빈이 땅에 닿을 것처럼 허리를 굽혀 머리를 숙였다.

악시덤이 탄 마차가 느릿하게 굴러갔다.

***

[으으, 가기 싫은데.]

‘그러니까 오지 말랬잖아.’

리그하르트는 신전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내내 중얼거렸다.

성검은 신전을 ‘하얀 감옥’이라고 불렀다. 하얀 감옥의 신관 나부랭이. 리그하르트의 입버릇이었다.

‘과거로 돌아오면서 더 심해진 것 같아.’

가뜩이나 신전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성검 주제에 신전을 꺼리다니.

아델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시 찾은 신전은 이전보다 더욱 조용했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탓인지, 외부인의 출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스테르 공작가의 방문 소식에 신관들은 잔뜩 긴장하는 눈치였다.

“에스테르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지누엘 신관이 아델리아 일행을 맞이했다. 어째서인지 며칠 사이에 그는 몹시 초췌해져 있었다.

그러면서 데릭과 아델리아에게도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아, 이 아이가 서신에 적혀 있던 그 아이입니까?”

“그렇습니다.”

지누엘 신관은 데릭의 품에 안겨 있는 데오나를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하시죠.”

“예, 각하.”

지누엘 신관을 따라 대강당을 지나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 대신관은 집무실이 아닌 숙소로 보이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선 아이를 이쪽으로.”

“네.”

대신관 엔리마엘이 데릭에게 침상을 가리켰다. 데릭은 그곳에 데오나를 조심스레 눕혔다.

새파랗게 질린 데오나는 식은땀을 쏟아 내고 있었다. 끙끙 앓고 있던 데오나를 보며 엔리마엘이 혀를 찼다.

“이것 참, 갑자기 오셔서는 이런 아이를 보여 주시다니…….”

엔리마엘이 탄식하며 말했다.

데오나를 가만히 주시하던 그는 아이의 이마 위로 손을 살짝 올렸다.

백금색에 가까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아주 잠깐 데오나의 몸을 감쌌다가 사라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거칠던 숨소리가 천천히 평온을 되찾았다.

음, 엔리마엘이 침음하며 손을 떼어 냈다.

“이 아이가 신력 때문에 이리되었다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엔리마엘의 질문에 대답은 테오스가 대신했다.

“전쟁을 하러 떠돌다 보면 여러 현상을 접하게 됩니다. 어디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증상이 신력과 관계있었다는 것을 겪어 봐 알고는 있었습니다.”

테오스가 뻔뻔한 얼굴로 유창하게 거짓을 꾸며 댔다. 아니,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 수 있다.

테오스의 말대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곳에서 수많은 경험을 했을 테니까.

그의 설명에 엔리마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말씀하신 것처럼 신력이 맞습니다. 그런데…….”

엔리마엘이 데오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 갔다.

“몸속 기운의 흐름이 이상합니다. 신체를 상하게 만든 것은 신력이 맞긴 한데…….”

으음……. 잠시 침음하던 엔리마엘이 물었다.

“혹시, 아이가 독을 삼키기라도 했습니까?”

“예? 독이라니요?!”

아델리아가 독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대신관은 침실을 나서며 말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자리를 옮기지요. 옆방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러시지요.”

데오나의 곁으로 여신관들이 붙었다. 아델리아는 아이를 잠시 돌아본 뒤, 방을 나섰다.

“우선.”

엔리마엘은 옆방으로 옮겨 자리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일전의 일부터 사과를 드려야겠지요.”

엔리마엘은 성검이 에스테르 공작가 사람을 공격한 일에 대해 사죄했다.

“신전의 책임자로 분명히 말씀을 드리건대, 신전은 에스테르 공작가를 벗이자 전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코, 척을 지려 했던 적은 없습니다.”

대신관의 음성과 눈빛은 단호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성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신전의 책임이 확실합니다. 공작가의 사람들이 다칠 뻔했던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엔리마엘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목소리와 눈빛에 진중함이 가득했다.

‘조금 찔린다.’

[찔릴 게 뭐가 있어요. 그러게, 날 가둬 놓지 말았어야지!]

‘쉿! 무려 대신관 앞이야. 그렇게 떠들어 대다가 널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래!’

[히잉…….]

엔리마엘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테오스가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테오스가 잠시 말을 끊고 엔리마엘을 쳐다보았다.

“옆방의 아이를 살려 주시죠.”

“…….”

엔리마엘은 대충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이 일을 덮어 주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와드려야지요. 알겠습니다. 저 아이의 신력은 제가 책임지고 안정시키겠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아까 독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데오나가 독에 중독된 상태란 말씀이세요?”

아델리아의 질문에 엔리마엘이 데오나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 맞습니다. 분명, 미량이긴 하지만 독을 섭취한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대신관의 대답에 아델리아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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