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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25)화 (25/161)

25화

“그, 그럼 신전에서 그 독도 해독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러자 엔리마엘이 고개를 저었다.

“몸속의 독은 신전에서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해독제는 직접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엔리마엘은 중독 증상이 신력 때문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의원들도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거라고.

테오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독제는 저희가 구하겠습니다. 신력만 안정시켜 주시면 됩니다. 그럼,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각하.”

그때, 두 사람의 대화에 아델리아가 급히 끼어들었다.

“무사히 성년이 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을 정도로 건강해져야 해요!”

그러자 엔리마엘이 다정하게 웃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에스테르 영애.”

테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성검이 사라진 일로 저희 가문이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압니다.”

“예? 의심이라니요.”

엔리마엘이 금시초문이란 얼굴을 했다.

“아닙니다, 공작 각하. 오히려 의심 대상에서 완벽하게 제외한 곳이 공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리 들었다고 했습니다.”

“…….”

공작의 기세가 위압적이었다. 마치, 꼭 그리해야만 한다는 듯이.

테오스가 말을 이어 갔다.

“조금이라도 그런 의구심은 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테오스가 데릭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데릭이 등에 메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엔리마엘은 테이블 위 기다랗고 검은 천 뭉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엇입니까?”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매어 놓아 흡사 검은색의 쇠몽둥이 같기도 했다.

데릭은 검을 감싸고 있던 천을 천천히 풀었다. 그러자 천 속에 숨겨져 있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한 은색의 검날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캬아—! 다시 봐도 참 잘 만들었어요, 그쵸?]

‘조용히 하라니까, 릭.’

거짓으로 만들어진 성검을 보며 엔리마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엔리마엘이 테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데릭이 대신 대답했다.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성검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거야…….”

“그리고 성검을 찾아내어 신전에 돌려놓는 것도 우리 에스테르 가문이어야 그 의혹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겠죠.”

“각하. 그러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희 신전에서는 공작가를 한 번도…….”

그러자 테오스가 대신관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날, 신전에 밀수꾼 몇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밀수, 꾼이요?”

“예, 그들 중 하나가 혼란을 틈타 성검을 훔쳤다고 실토했습니다.”

테오스는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무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을 잡아 오려 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바람에 성검만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랬군요…….”

허허, 엔리마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이상했다.

성검이 사라진 일이나, 그 성검을 에스테르 가문이 가지고 나타난 일 때문이 아니다.

눈앞의 사내, 테오스 에스테르 공작 때문이었다.

‘이렇게 설명이 친절한 사내가 아닌데.’

엔리마엘은 테오스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봤다.

그의 부인, 이레네아가 죽고 공녀가 태어나던 날부터 지금까지.

엔리마엘이 아는 테오스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줬으며 행동으로 증명했다.

오늘 일만 해도 성검을 툭 던져 놓고 아무런 첨언도 없이 그저 돌아설 사내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상황 설명이 자세했다.

생각에 빠졌던 엔리마엘은 문득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델리아 에스테르, 공작가의 작은 별.’

처음부터 저 작은 아이의 몸에서 성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희미하고 옅었지만, 분명 성검의 것이었다.

‘진짜 성검의 기운을 가진 아이와 가짜 성검이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성검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성검이 크기를 줄일 수 있다고 듣긴 했는데…….’

엔리마엘도 대신관에게만 내려오는 고서에서 읽기만 했지, 직접 몸체를 줄이는 성검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어린 영애에게서 성검의 기운은 느껴지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성검을 자유롭게 다루고 있는 듯 보였다.

‘아아.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저 무정하고 무심한 사내가 신전을 찾아와 기나긴 설명을 덧붙이고 가짜 성검까지 내민 이유를 알 것 같다.

‘공표하지 않겠다는 경고다.’

성검이 깨어나고 성검의 선택을 받은 영웅이 나타난다는 것은 제국의 축복과 다름없다.

그러나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일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잠시 잊고 있었구나. 저 사내가 딸아이를 위해 무엇까지 했는지를.’

엔리마엘은 아델리아를 잠시 응시하다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공작 각하.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엔리마엘이 테이블 위 성검을 다시 검은 천으로 감싸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성검은 저희 신전에서 잘 보관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덕분에 신전의 체면은 지킬 수 있게 되었군요.”

그리고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신관을 불러 성검을 건넸다. 가짜 성검은 곧장 밖으로 나가 다시 유리관 속에 전시될 것이다.

[짠하네요.]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응? 뭐가?’

[저걸 만들지 않았다면 제가 또 저 신세가 되었겠죠?]

또 유리관에 갇혀서 누님만 애타게 부르고 있었을 거예요. 으으, 리그하르트가 중얼거리며 몸서리쳤다.

가짜 성검이 신관들에 붙들려 방을 나간 뒤, 엔리마엘이 다시 공작에게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그에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데릭과 아델리아를 내보냈다.

엔리마엘과 테오스, 둘만이 남았다.

“공녀께서 성검의 주인이 되신 겁니까?”

엔리마엘은 돌려 묻지 않았다. 그러자 테오스가 시선을 올려 대신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대신관까지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가짜 성검을 만들어 오신 것을 보니, 밝히실 생각은 없으신 거겠지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렇군요, 엔리마엘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께서는 아셔야 합니다.”

테오스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저희 에스테르의 의도와는 달리, 내 딸아이가 성검의 주인이라고 세상에 공표라도 되는 날에는.”

테오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짧은 침묵에 엔리마엘은 마른침을 조용히 삼켰다.

테오스의 붉은 시선은 놀라울 정도로 매서웠다.

“이 제국에는 그동안 겪어 보지 못했던 혼돈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는 그 혼돈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각하.”

엔리마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성검의 주인, 영웅의 등장으로 황실과 신전의 세력이 더욱 강해질 겁니다.”

애초에 ‘영웅’이라는 칭호는 성검의 주인에게만 붙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백 년간 로시안트 제국에는 성검이 깨어나지 않아, 영웅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북으로는 야만족 연합군이, 서쪽 해상에서는 노르만족이 수시로 로시안트 제국을 위협했고 이에 지친 제국민들은 신전과 황실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족파의 귀족들 사이에서 영웅을 대체할 만한 사람을 내놓았다.

‘그 사람이 악시덤 대공이었지…….’

그의 활약으로 영광과 명예는 귀족파의 것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귀족파는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키웠다.

물론, 지금은 에스테르 공작이 나타나 그들의 기세가 주춤하긴 하지만.

또 언제 귀족파에서 에스테르 공작을 능가하는 제2의 악시덤을 만들어 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성검이 선택한 영웅이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나왔으니,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기회? 이용?”

테오스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날카롭게 빛났다.

“대신관. 지금 내가 황제 폐하의 기사로, 이 제국의 공작으로 이 자리에 온 것 같습니까?”

그의 질문에 대신관은 말문이 턱 막혔다.

공작의 눈빛은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제국과 신전을 도륙 내고 있었다.

엔리마엘은 소리 없이 한숨을 토해 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데릭과 아델은 방에서 나와 근처 정원으로 향했다.

신전에서 테오스가 나왔을 때, 자신들을 곧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적당한 자리의 벤치를 찾아 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정원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말수가 적어진 아델리아를 보며 데릭이 물었다.

“독이라잖아.”

“노베트가 그랬어. 안 먹여 본 약이 없다고. 그중에 아이랑 맞지 않은 약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같이 먹여서는 안 되는 약을 함께 먹였을지도 몰라.”

“…….”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렵지 않게 해독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독을 먹게 했다면? 그 독초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쉽지 않겠지만 해독제를 만들려면 시간도 적지 않게 들 것이다.

‘역시, 빨리 펠슨의 거처를 알아내야…….’

그때였다.

“아니, 에스테르 경이 아니오?”

정원 입구를 지나치던 한 인영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정원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에스테르 남매를 보며 반가워하며 아는 척했다.

“아…….”

데릭이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응? 왜? 누군데 그런 표정이야?

아델리아가 데릭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정원 입구로 들어서는 사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데릭이 앞으로 나서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뭐……? 대공?

아델리아의 눈이 커졌다.

이 제국의 대공이라면 유일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황제가 되어 자신을 쥐락펴락했던, 바로 그 악시덤 프레이르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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