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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26)화 (26/161)

26화

[히익. 누, 누님! 그놈이에요! 그 빌어먹을 누렁이 놈!]

‘…….’

아델리아보다 리그하르트가 먼저 반응했다.

리그하르트는 악시덤을 누렁이라 불렀다. 그의 머리카락 색깔 때문이었다.

황금색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하고 맑은 레몬색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하고.

마치 새하얀 벽지가 오래되어 색이 바랜 것처럼 칙칙한 누런색이었던 탓이다.

데릭의 연하고 고운 밀색과는 확연히 달랐다.

‘저 인간도 보통 인간은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미동도 하지 마, 릭.’

[넵!]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에게 주의를 시키고 자신도 데릭보다 한 걸음 뒤에 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데릭의 망토를 거머쥐었다.

데릭의 시선이 잠시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만나는 건 처음인 것 같군.”

“그렇습니다, 전하.”

악시덤이 푸근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왜 저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을까.’

매번 출정 명령을 내리던 그 목소리였다.

-우리 제국의 땅을 밟은 야만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오거라.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그때, 다시 악시덤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궁도 아니고 신전에서 에스테르 경을 만나다니. 오늘 운이 좋은 모양이오. 아,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이왕 이렇게 마주친 거, 같이 식사나 하지 않겠소?”

악시덤이 호탕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그러나 데릭은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닙니다, 전하. 일행이 있으신 듯한데 식사는 다음에 하시지요.”

“아, 일행.”

악시덤은 정원 입구를 한 번 돌아본 뒤 말을 이어 갔다.

“내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오. 그보다, ……에스테르 경도 일행이 있는 것 같은데?”

“…….”

악시덤의 시선이 데릭에게 가려진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데릭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악시덤이 혹시라도 아델리아의 오러를 알아볼까 봐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그러자 악시덤이 얕게 웃었다.

“에스테르 경? 소개해 주지 않을 거요? 이것 참, 조금 민망해지려 하는데……?”

악시덤이 다시 재촉했다.

아델리아는 악시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두고두고 끈질기게 괴롭혀 대는.

그 수법이 몹시도 흉악하고 은밀하여 제법 귀찮아진다는 것도.

아델리아는 저 악시덤 대공의 괴롭힐 대상 목록에 데릭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어쩌시려고요? 저 인간도 오러 발현자인 건 아시죠?]

‘응, 알아.”

하지만 제국의 대공을 앞에 두고 인사하지 않는 것도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일단 오러 큐브에 모두 집어넣을 거야. 희미하게 새어 나오긴 하겠지만, 오빠 옆에 있으니까 오빠의 오러라고 생각하겠지.’

데릭의 오러도 매우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오러 큐브에 최대한 오러를 숨긴다면 데릭의 오러에 가려질 것이다.

‘게다가 어린아이의 오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아델리아는 몸속에 일부 남겨 두었던 오러들을 서둘러 큐브 안으로 숨겼다.

그리고 데릭의 등 뒤에서 빠져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전하. 아델리아 에스테르라고 합니다.”

그녀는 데릭의 옆에 나란히 선 뒤, 드레스를 가볍게 잡고 올렸다가 놓으며 미소 지었다.

“오…….”

악시덤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잠시 그의 가느다란 시선이 아델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매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 소문의 작은 별이로군.”

아델리아는 저 눈빛을 안다.

악시덤이 황제로 있던 시절,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아델리아를 꼭 저런 눈으로 훑어내리곤 했다.

상대를 가늠하려는 듯한 무례하고 불쾌한 시선이었다.

[으악. 누님, 쟤 또 저렇게 웃어요.]

약속대로 얌전히 있던 리그하르트가 불쑥 떠들었다.

악, 꼴 보기 싫어. 내 눈! 내 눈!

리그하르트도 악시덤을 싫어했다. 그것도 매우 싫어했다.

저 악시덤에게 닿느니, 차라리 말발굽이 되겠다던 리그하르트였다.

‘그래, 알아. 나도 싫어.’

아델리아가 말갛게 웃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잠깐이지만 악시덤의 얼굴을 살폈다.

20년이나 젊은 악시덤은 황제였던 악시덤과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얼굴 곳곳에 주름으로 자리 잡았던 세월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분명 칙칙한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제법 멀끔하게 생긴 편인데, 어째서인지 사람 좋아 보이는 저 미소조차 비열하게 느껴졌다.

[그냥 누님 눈에 이미 밉보였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가?

하긴, 자신을 죽을 때까지 굴리고 또 굴렸던 상관이었다. 곱게 봐 주려야 봐 줄 수 없는 사이랄까.

‘거기다 우리 황태자 전하도 그렇게 괴롭혀 댔다지?’

그 선량했던 황태자가 지금 그렇게 삐뚤어진 게 다 저 대공 때문이다, 이거잖아!

아델리아는 미소를 유지한 채, 속으로 악시덤의 흉을 보고 있었다.

악시덤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아델리아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소문 속 영애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군요.”

그놈의 소문.

아델리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는 악시덤을 따라 초승달처럼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전하. 소문으로만 들었던 제국의 영웅, 대공 전하를 이렇게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

찰나였지만 악시덤의 미간이 꿈틀거리고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잠깐 사라졌다.

‘여전하네. 영웅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건.’

아델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악시덤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영웅이라 칭하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제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악시덤 대공이었다.

‘스노우번 전쟁이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꿨지.’

악시덤은 마지막으로 출전했던 스노우번 전쟁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보고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한다.

‘그 일로 영웅으로서의 명예와 체면이 바닥까지 처박혔었어.’

그때, 빼앗긴 땅을 되찾고 포로로 잡혔던 악시덤까지 구해 낸 사람이 바로.

‘우리 아빠란 말이지!’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악시덤은 영웅이라 불리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영웅이라는 말이 테오스를 떠올리게끔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악시덤이 다시 호방하게 웃었다.

[으, 저 웃음!]

‘응. 속마음을 숨기려고 억지로 끌어올린 웃음.’

악시덤은 젊은 시절에도 속내를 숨기는 일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영웅이라니, 당치도 않소. 이 제국의 영웅은 영애의 친부이신 에스테르 공작이 아니겠소?”

물론,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델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싱긋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누가 영웅이라 불리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제국을 위해 힘써 주셨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음……. 그렇, 지…….”

악시덤이 내키지 않는 듯 띄엄띄엄 대답했다. 아델리아는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바닥을 짝짝짝 부딪치며 말했다.

“마침 잘됐어요! 곧 저희 아버지께서 나오실 거예요! 식사하자고 하셨죠? 여기서 저희랑 같이 기다렸다가 아버지께서 나오시면 함께 식사하러 가는 건 어떨까요?”

그러자 악시덤의 눈가가 씰룩거리고 입매가 어렴풋이 비틀어졌다. 그는 아델리아가 가리키던 방향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큰 실례를 할 뻔했군.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방해할 순 없지. 식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죠.”

“아……, 너무 아쉽네요. 두 분의 영웅담을 듣고 싶었는데…….”

악시덤의 얼굴에서 거짓 미소마저 자취를 감췄다. 불쾌한 내색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악시덤은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다음에. 다음에 합시다, 그런 건. 오늘은 너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으니, 아쉽지만 이쯤에서 헤어지도록 하죠.”

악시덤이 아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델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했다.

“네! 그럼 다음에 꼭 시간을 내어주셔요, 대공 전하. 조심해서 가시고요!”

“살펴 가십시오.”

고개를 살짝 끄덕인 악시덤이 몸을 돌려 정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원을 들어올 때와 달리 매우 언짢아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통쾌한 아델리아였다.

속으로 시원하게 웃고 있자니, 크헹헹헹 리그하르트의 웃음소리도 덩달아 들려왔다.

***

신전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델리아의 방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드레스 안 돼.”

“아이참……. 그래도 황태자 전하를 만나러 가는 건데요…….”

“훈련복으로 입고 오라고 하셨어. 명령이라고. 내가 전하의 명령을 어기게 할 셈이야?”

힝. 세라가 울상이 되었다. 기대에 부풀어 잔뜩 꺼내 놓은 드레스도, 알록달록 각양각색의 리본도 모두 집어넣어야만 했다.

“앞으로 황태자 전하를 만나는 날엔 무조건 훈련복이야, 세라.”

“네에…….”

“대답이 작아, 세라.”

“네! 아가씨!”

씩씩한 세라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자, 아델리아는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델리아는 드레스를 맞추며 함께 맞춤 제작한 훈련복을 꺼내어 입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은빛 머리카락을 한데 모았다. 높이 들어 올려 질끈 묶은 뒤, 잔머리를 정돈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옛날 생각나네.’

매일 새벽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했었지.

‘그러고 보니 잘 있을까.’

시간을 돌아온 뒤로 연무장은 물론, 공작가의 기사단원과도 만나지 않았다.

‘지금쯤 서운하다며 날 원망하고 있을 거야.’

사실 한동안 검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다른 귀족 영애의 삶을 배워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연무장과 기사단을 의도적으로 멀리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성검과 오러가 운명처럼 다시 손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번 생 또한 검을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델리아는 에스테르의 문양이 새겨진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노베트 일을 얼른 마무리 짓고 기사단을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녀올게, 세라!”

황태자와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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