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하, 날씨 한번 끝내주네.’
[은퇴를 앞둔 변경의 노기사처럼 말하지 말라구요.]
‘은퇴를 앞둔 기사는 맞지.’
곧 은퇴하니까!
‘조금 미뤄지긴 했지만…….’
아델리아는 황태자 궁의 정원길을 걸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어.’
[그건 누님의 생각일 뿐이죠.]
‘어쨌든,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건강한 두 다리로 세계 각지를 여행할 거야.’
[오! 그건 재밌겠어요! 세계 여행이라니! 저도 데려가실 거죠?!]
그럼 그럼. 아델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쯤이면 에스테르 공작가도 안정적으로 돌아갈 테고, 악시덤을 끌어내리고 나면 황태자도 무사히 황제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주머니가 가볍지는 않겠어.’
지금의 이 고생을 톡톡히 보상받아서, 호화롭고 풍족한 은퇴 여행을 하리라.
아델리아의 입꼬리가 웃음을 숨기느라 잘게 떨렸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에.”
아델리아는 루드의 딱딱한 인사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루드를 따라 향한 곳은 황태자 궁 뒤뜰의 연무장이었다.
‘우와! 이게 얼마 만이야!’
연무장에 들어서니 미리 와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두 사람?’
한 명은 황태자 카르세스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지?’
루드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검술 스승이십니다.”
“아하.”
가까워지면 질수록, 카르세스 옆에 선 사내의 존재감은 강해졌다.
‘아빠랑 비슷한 나이대인 거 같은데.’
누가 봐도 기사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탄탄한 체구의 사내였다.
“전하, 에스테르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루드가 먼저 카르세스에게 고했다. 그러자 카르세스의 시선이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아델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여신의 가호 속에서 평온하시기를. 아델리아 에스테르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늘은 훈련복을 입고 왔군.”
“예, 전하.”
“에스테르 가문의 훈련복인가?”
카르세스가 목 언저리의 넥타이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자랑하듯 어깨를 쭉 폈다.
“네, 전하. 이번에는 복장 때문에 쫓겨나지 않아도 되겠지요?”
카르세스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던 사내에게 아델리아를 소개했다.
“클리프. 이쪽은 클리프를 밀어내고 내 검술 스승이 될 뻔했던 에스테르 영애.”
그러자 아델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굳이 그렇게 소개할 필요는 없잖아요.’
[황태자 쟤도 말을 이쁘게 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그쵸?]
‘쟤도? 전하 말고 또 누가 있는데?’
[…….]
리그하르트가 죽은 듯 조용해졌다.
곧장, 카르세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쪽은 클리프 에일러블 백작. 아직은 내 검술 스승이지.”
영애가 밀어내기 전까지는 말이야. 카르세스가 짓궂게 말했다.
하하……. 전하도 참.
아델리아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악시덤 때문에 삐뚤게 자라셔서 그런 거야. 원래 저런 분은 아니셨다고.
그때였다.
‘어, 잠깐!’
아델리아가 클리프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에일, ……러블?”
그러자 클리프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클리프 에일러블입니다. 영애의 아버지이신 에스테르 공작 각하와는 종종 전장에서 뵈었습니다.”
아델리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러다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우와! 에일러블 병법서의 그 에일러블이요?!”
그러자 클리프가 껄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 그 에일러블이 맞습니다.”
미쳤다!
‘전하의 검술 스승이 클리프 에일러블이라고?!’
에일러블 백작가는 로시안트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이자, 황실 기사단의 근본이 되는 검술을 창안한 가문이었다.
에일러블의 검술은 황실 기사단이 되면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검술이었다.
게다가 황실 기사단이 달달 외우다시피 해야 하는 기초 병법서 또한 저 에일러블 백작 가문의 것이었다.
우와! 살아 있는 화석을 만난 것 같아!
유명한 가문이었던 탓에 이름은 자주 들어 봤는데, 이렇게 직접 에일러블 가문의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르세스가 어린 시절 스승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스치듯 들었던 것도 같다.
‘워낙에 제 일이라면 말을 아끼는 분이셔서 나도 캐묻지는 않았지만.’
그 스승이 저 에일러블일 줄이야!
‘어……?’
놀랍고 경이로운 것도 잠시.
잠깐…….
클리프를 바라보는 아델리아의 시선이 작게 흔들렸다.
‘클리프 에일러블이라면, 예전에 펠슨 선생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는데…….’
-클리프 에일러블이 죽었답니다.
-……클리프라면, 에일러블 백작가의 가주가 아닙니까?
전장에서 돌아왔던 어느 날.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고 돌아와 펠슨을 찾아갔던 날이었다.
-맞습니다, 에스테르 경. 방계 혈족도, 그 처자식들도 함께 참수당했다고 하니 아마 에일러블 가문은 이대로 사라지는 거겠죠.
-저런……. 폐하께서 아끼던 가문이었는데, 어쩌다…….
-그러게 말입니다. 뭐, 또 정쟁에 휘말리거나 했겠죠.
생각보다 심드렁해 보이는 펠슨의 모습에 아델리아가 물었다.
-친했던 거 아니에요?
-으음. 친했다기보다는……. 제가 치료해 준 적은 있지요. 원체 커다랗던 기사여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펠슨이 아련한 눈빛으로 클리프의 소식을 전해 준 적이 있었다.
에일러블 백작가는 에스테르 공작가와 마찬가지로 충성심이 강한 가문이었다.
악시덤이 황제가 되었을 때도, 에일러블 백작가는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래서 악시덤 역시 그런 에일러블 백작가를 가까이했다.
‘맞아. 클리프 에일러블은 죽기 전까지 악시덤의 사람이었어.’
그런데, 악시덤의 충신이었던 클리프가 왜…….
‘황태자 전하랑 같이 있어?!’
그것도 꽤 친해 보이기도 하고.
“영애?”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불렀다.
“아! 네, 전하!”
“통성명은 여기까지 하고. 받아.”
“아!”
그가 목검을 아델리아에게 건네며 클리프를 향해 말했다.
“시작하지.”
“예, 전하.”
클리프는 두 사람 앞에 섰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우니, 그 장대한 신체가 더욱 커다래 보였다.
큼큼, 목을 가다듬던 클리프가 아델리아에게 말했다.
“아카데미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입학은 취소했지만요.”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클리프가 물었다.
“폐하께서 함께 훈련하라 하셨으니 황태자 전하와 비슷한 실력이라 보면 되겠습니까?”
“으음.”
잠깐 뜸을 들이던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곁눈질하며 히죽거렸다.
“수준이 다르면 훈련 내용도 달라져야겠죠. 그러면 각자 다른 내용의 훈련을 받아야 하니까, 그건 그거대로 굉장히 비효율적이라 생각해요. 한마디로 시간 낭비죠.”
“그렇지요.”
“저는 황태자 전하의 훈련을 방해하러 온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아델리아가 두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제가 황태자 전하의 실력에 맞춰 드리면 됩니다.”
그러자 클리프의 두툼한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클리프가 카르세스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희미하게 웃고 있을 뿐, 어린 영애의 무례한 말에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크흡. 클리프가 웃음을 참으며 들고 있던 목검을 연무장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황태자 전하의 진도에 맞추겠다? 그렇다면 진검 어떻습니까?”
“저야 좋죠. 목검은 걸음마 시작하면서 뗐는걸요.”
아델리아도 들고 있던 목검을 멀찍이 던져 버렸다.
으하하하하! 결국 클리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말솜씨만큼이나 검술 실력도 좋은지 테스트 좀 해 보겠습니다.”
“얼마든지요.”
***
황궁 약제실의 문이 열렸다.
“또 피를 토하셨습니다.”
새롭게 황제의 주치의가 된 세니얼이 들어오며 탄식했다.
“정신을 잃으셨다가 돌아오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 달도 견디지 못하실 겁니다.”
세니얼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해독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폴디아퀸을 구할 수가 없으니…….”
‘폴디아퀸’은 디크레드 영지에서만 재배되고 판매되던 독초의 이름이었다.
독초이긴 했지만, 유통되는 것들은 정제를 거치면서 독성은 사라지고 몸에 이로운 성분만 남았다.
“그동안 디크레드 영지에서 철저히 정제를 거친 뒤 유통이 되었는데, 이번에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세니얼에게 물컵을 갖다 준 의원 하나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세니얼이 한숨을 내쉬었다.
“독초에 대한 것을 함구하라는 황명 때문에 해독제 구하는 일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대체 어디에서 해독약 재료를 구해야 할지…….”
그때, 약제실 한편에서 약재를 정리하던 의원이 세니얼을 불렀다.
“저, 세니얼 님.”
책상 위로 엎어져 있던 세니얼이 초췌해진 얼굴을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브록?”
평소에도 소심했던 사람이었는데, 오늘따라 브록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저, 잠시 집에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집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습니까?”
세니얼의 질문에 브록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게…….”
내키지 않는 듯 말끝을 늘어트리던 그가 말을 겨우 이어 갔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왔다고 연락이 와서요…….”
“……집을, 나갔던?”
세니얼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브록, 지금은 때가 때이니만큼…….”
“그게……. 그 동생이, 사이가 틀어져서 연락을 안 한 지 좀 오래되긴 했는데…….”
“했는데?”
“그 동생이 독초에 대해 잘 알거든요.”
그러자 세니얼이 그제야 기억이 났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제 기억이 납니다. 브록 집안이 대대로 의원 일을 했다고 그랬었지요.”
“네, 특히 동생은 독초와 해독 분야에 유독 특출났었어요.”
“네, 그랬었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던 세니얼이 말했다.
“그 동생이 집을 나갔었습니까? 그리고 오늘 돌아왔고?”
“네. 집을 나가 떠돈 지는 오래되었는데 건국제를 앞두고 잠시 고향 집을 찾아오곤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뭐랬더라…….”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던 세니얼이 눈을 반짝 뜨며 말했다.
“그래. ……펠슨. 펠슨이라고 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