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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28)화 (28/161)

28화

브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름을 기억해 낸 기쁨도 잠시. 세니얼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브록, 우리가 독초 때문에 이러는 건 맞는데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 의원이 부족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독초, 해독제를 만들 재료가 부족해서 이러는 거죠.”

그러니 아무리 독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해독제의 재료가 없는 상황이라면 무용지물이란 소리였다.

브록 또한 알고 있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 동생이…….”

브록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건 말하지 말랬는데…….’

하지만 무려 황제가 죽어 가고 있었다. 만에 하나, 펠슨이 황제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내 출셋길도 같이 열릴 거야.’

약초 따위나 정리하는 일이 아닌, 어쩌면 황실 주치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잠시 고민하던 브록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아주 적은 양의 재료로도 해독제를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러자 세니얼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라고요?”

“황태자 전하께서 소량이긴 하지만, 폴디아퀸을 가지고 계시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세니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겁니까!”

“예? 그거야, 함구하라는 황명이 있었지 않습니까? 제 가족이긴 해도 황궁 의원은 아니니까요.”

“아…….”

세니얼이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세니얼은 곧장 약제실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가방을 꺼내어 툭툭 먼지를 털고서 브록에게 건넸다.

“어서 가요! 가서 당장 데려오란 말입니다!”

“그런데 황명이…….”

“제가 책임질 테니 서둘러 다녀오시죠!”

그러나 브록은 여전히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세니얼 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이가 틀어져서……. 데려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상황이 급박하여 일단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브록은 자신이 없었다.

펠슨은 명예나 재력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의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황실 의원도 코웃음 치던 녀석이었다.

-황궁으로 같이 가자니까? 거기서 의원이 되면 명예도 재력도 다 가질 수 있다고.

-형이나 가. ……내가 어딜 가든, 그걸 정하는 건 형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뭐?

-그런 게 있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어. 일단 형은 아니었어.

펠슨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브록이 시무룩해지자, 세니얼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시도해 보는 겁니다. 어쩌면 브록이 폐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단 말입니다.”

세니얼이 강하게 말했다. 그러자 브록이 각오를 다잡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

카가가각—! 채앵—!

은빛 검날 두 개가 굉음을 내며 붙었다가 빠르게 떨어졌다.

연무장의 흙바닥은 이미 두 사람의 긴 대련으로 움푹움푹 패인 상태였다.

연습용이라 검날이 날카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시 잊고 있었던 전장의 감각을 깨우기엔 충분했다.

‘이게 얼마 만이야.’

회귀 이후, 한 번도 검을 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쥐었던 것처럼, 손바닥에 쫙쫙 붙는 느낌이 들었다.

‘재밌어!’

대련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힘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즐거워졌다.

[좋겠다. 나도 재밌고 싶다. 나도 다른 쇳덩이들이랑 깡, 깡, 하고 부딪혀 보고 싶다.]

리그하르트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 주인이 다른 검을 들고 신이 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순간, 카르세스의 검이 방향을 틀어 찌르고 들어왔다.

아델리아는 검을 비스듬히 내려 공격을 흘려 보낸 뒤 그대로 카르세스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검을 쳐 내며 훌쩍 물러섰다.

잠시 카르세스와 거리를 벌린 아델리아는 손잡이의 끝과 끝을 꽉 틀어쥐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빈틈이 없네.’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서로를 주시하며 원을 그리듯 천천히 돌았다.

도약을 위해 발끝으로 힘을 모으던 그 순간.

짜악—!

“거기까지.”

손뼉 소리와 함께 클리프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검을 내리고 똑바로 섰다.

후우. 아델리아가 짧게 심호흡했다.

“테스트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델리아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곧장 카르세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 전에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뭐가?”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마지막 공격이요. 분명 봤거든요.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하신 거. 그래서 슬쩍 흘려 보내려고 했는데!”

“왼쪽 옆구리에 스쳤지.”

“맞아요! 그거 어떻게 하셨냐고요. 그렇게 바로 각도를 틀 수 없을 텐데.”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의 공격을 흉내 내며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이렇게였나? 아닌데.”

그러자 카르세스가 귀찮다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검을 돌리며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자, 이걸 봐. 여기서 손목을 이쪽으로…….”

그 모습을 보며 클리프가 흐뭇하게 웃었다.

실력을 가늠도 해 볼 겸, 앞으로의 훈련 방향도 다시 세울 겸.

황태자와 공녀에게 황실 기사단의 기본 검술만 사용하여 대련을 부탁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카르세스 전하께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실 줄 알았는데…….’

카르세스는 클리프가 가르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황실 기사단의 신입 단원들은 이미 황태자의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에스테르의 어린 영애가 카르세스와 비등한 수준의 검술을 보여 주었다. 그것도 겨우 일곱 살짜리가.

‘분명, 체격과 근력 차이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을 터.’

그럼에도 어린 영애는 속도를 앞세워 황태자와 동등한 승부를 이끌어 갔다.

‘이거야 원. 천재라고 해 봤자, 뭐 얼마나 다르겠나 했더니.’

클리프의 기준에서는 카르세스 역시 천재였다. 그리고 아델리아 역시, 카르세스와 어깨를 나란히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천재였다.

황태자의 훈련 동기가 일곱 살 여자아이라는 소리에, 클리프는 처음으로 황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의 판단이 옳았던 거다.

확실히, 저 두 아이는 서로에게 끊임없는 자극제 역할이 되어 줄 테니까.

‘일곱 살에 아카데미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다더니…….’

클리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만해.’

클리프는 마주 보고 서서 조금 전 대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분발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어린 천재를 앞에 두고 선생 노릇을 하자니.

‘죽을 맛이로군.’

앞으로 더 얼마나 대단한 광경을 보게 될지, 클리프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기대가 되기도 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시죠. 통성명만 하고 흩어지려 했는데, 두 분께서 워낙 열정적이셔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하하하하! 클리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세스는 루드에게 검을 맡기며 아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차 한잔하고 가지, 영애.”

그러자 아델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주신다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전하.”

웬일이야. 훈련 끝났다고 바로 쫓아낼 줄 알았더니.

아델리아도 루드에게 검을 건넸다.

“고마워요, 루드.”

“…….”

그리고는 카르세스의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얼떨결에 아델리아의 검까지 받아 든 루드가 잠시 멍하니 섰다.

툭툭, 지나가던 클리프가 루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보좌관께서 졸지에 보모가 되셨군.”

“……클리프 경.”

“어쩌겠나. 황태자 궁, 그리고 이 연무장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저 어리신 두 분을 잘 보필해야지.”

“…….”

클리프의 말에 루드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닫았다.

***

차 한잔하자던 카르세스는 집무실이 아닌 연무장 한편에 마련된 벤치로 향했다.

그가 벤치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앉아.”

“아, 네.”

아델리아도 카르세스가 턱 끝으로 가리킨 벤치에 앉았다.

커다란 나무 그늘 속, 대리석을 다듬어 놓은 벤치가 시원했다.

아델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야외 연무장의 하늘 지붕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평소보다 느리게 흐르는 구름을 보다 보니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때, 병기 정리를 마치고 어딘가로 사라졌던 루드가 다시 돌아왔다.

“시원하게 준비해 봤습니다.”

루드가 두 사람 앞으로 쟁반을 내밀었다. 그러자 짤랑— 투명한 크리스털 유리잔 속 얼음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고마워요, 루드 경.”

아델리아는 냉큼 유리컵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짜릿한 시원함에 읏! 소리가 절로 났다.

꼴깍꼴깍꼴깍—

아델리아는 숨도 쉬지 않고 냉차를 쭈욱 들이켰다.

푸하! 입안에서 청량한 향기가 가득 맴돌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을 달구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꿀을 듬뿍 넣어 그런지 쓰지 않고 달아.’

훈련 후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는 무조건 옳지.

아델리아가 유리컵 속 찻물을 반쯤 비워 낼 때까지, 카르세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가끔 유리컵을 들었다 놓을 뿐.

아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이 있으신 거죠?”

“맞아.”

카르세스는 컵을 내려놓았다.

“디크레드 백작가에 대해 알려 줬으면 해서.”

“디크레드 백작가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문의 근황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

아델리아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디크레드라면.’

아델리아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엄마의 가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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