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사실, 아델리아는 디크레드 가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디크레드 백작가와는 완전히 교류가 끊어졌으니까…….’
아델리아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없을 것 같아요. 교류가 없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부분이 없거든요.”
“교류가 없었다?”
“네, 전하. 필요하시다면 아버지께 따로 여쭤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군.”
담담하게 대답한 카르세스가 다시 유리컵을 들어 냉차를 마셨다.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루드가 급하게 다가왔다.
“전하.”
루드는 아델리아를 한 번 흘깃거린 뒤, 카르세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세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눈가나 입매가 눈에 띄게 굳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쳐다보지 않고 정면을 보며 말했다.
“그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만 돌아가도록 해.”
아델리아가 루드와 카르세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러나 카르세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루드.”
“네, 전하.”
“영애를 배웅해 드려라.”
“예.”
그리고 카르세스는 곧장 연무장을 떠나 황궁으로 향했다.
가시죠. 루드가 아델리아에게 말했다.
아델리아는 멀어지는 카르세스의 등을 잠깐 바라보다 루드를 따라 황태자 궁을 빠져나갔다.
***
공작저로 돌아오니 가게를 모두 정리한 노베트가 아델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노베트 경!”
아델리아가 반가운 마음에 냉큼 달려가 그의 앞에 섰다.
“노베트 경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냥 노베트라고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아가씨.”
“그럴게요. 앉으세요, 앉아서 이야기해요.”
아델리아는 노베트를 이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쭈뼛거리는 노베트를 소파에 앉게 하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가게는 잘 정리하셨어요?”
“예, 살펴 주신 덕분에 깔끔하게 처분했습니다.”
“서운하시죠?”
“아닙니다. 이제 제가 머물 곳은 공작저인데 서운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빠는요? 만나 보셨어요?”
“예, 아가씨. 편히 지내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아빠 말씀대로 편하게 지내세요. 데오나가 돌아오면 함께 지낼 거처도 구해 놨으니 걱정 마시고요.”
고맙습니다……. 작게 대답한 노베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공작 각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 데오나가……, 신력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네, 맞아요.”
“그것도 모르고 저는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이고 있었군요…….”
무지하게도……. 노베트가 한숨처럼 말했다.
“노베트, 자책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데오나가 견딘 건 기적이랬어요. 데오나는 알고 있는 거예요. 노베트가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가씨…….”
“지금 자책하며 기운 빼는 일은 신전에서 홀로 견디고 있을 데오나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아요. 아시겠죠?”
“네, 아가씨…….”
“자, 일단 짐 풀고 쉬고 계세요. 어느 정도 정리되시면 그때 관리하실 대장간도 보여 드리고 사람들도 소개해 드릴게요.”
노베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저, 비록 망치질밖에 모르는 놈이지만 맹세를 우습게 여긴 적은 결코 없습니다. 무엇이든 시켜 주십시오.”
아델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전 아빠 좀 만나고 올게요! 아! 데오나가 어떤 약들을 먹었는지 기억하세요?”
“예, 아가씨. 종이에 적어 공작 각하께 전해 드렸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럼, 쉬고 계세요!”
아델리아는 노베트에게 데오나의 중독 증상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기 위해 그동안 어떤 약을 먹었는지 알아야 한다고만 했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약을 먹여 왔던 일로 자책하던 노베트였으니까.
아델리아는 테오스의 집무실로 곧장 향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집무실 앞에 집사 일렌드가 서 있었다.
“일렌드, 왜 나와 있어요?”
“아가씨 오셨습니까. 지금 손님이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아.”
아델리아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먼저 씻지 뭐.’
아델리아는 방으로 올라가 몸부터 씻었다.
땀은 흘리지 않았지만, 연무장의 흙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으니까.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세라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어휴! 귀한 아가씨가 이게 무슨 꼴이래요!”
“또 잔소리.”
“며칠간 훈련 안 하시길래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으셨나 했더니!”
아델리아는 세라의 잔소리를 들어 가며 깨끗하게 씻고 머리카락을 말린 뒤,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훈련복이 좋았는데…….”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죠. 훈련하실 때 훈련복 입는 건 이해할 테니, 평소에는 꼭 드레스를 입으시라고요.”
“알고 있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출복이 아닌 실내복이라서 비교적 덜 화려하고 치렁거렸다는 거다.
‘그래도 불편한 걸 어떡해.’
아델리아는 발등 위로 간질간질 흔들리는 레이스를 내려다보다 테오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그래.”
“왔어? 아델?”
“응!”
데릭의 물음에 아델리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어?’
그러고 보니 데릭은 외출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테오스 역시 외출 준비로 바빠 보였다.
‘어디 나가시려는 건가?’
그가 마지막으로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망토의 매듭을 단단히 묶으며 물었다.
“훈련은 할 만했느냐.”
“네, 재밌었어요. ……그런데 외출하세요?”
아델리아가 테오스와 데릭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테오스는 아델리아에게로 걸어왔다.
“황궁에 다녀와야겠다. 오늘은 들어오지 못할 거다.”
황궁? 아까 손님이 왔다더니 아빠를 데리러 온 건가? 아델리아가 다시 물었다.
“두 사람 같이요?”
“응, 아델.”
데릭은 혹여라도 아델리아가 외로워할까 봐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내일 점심시간 전까지는 돌아올 거니까, 점심은 같이 먹자.”
그렇게나 오래 황궁에 머문다고? 아델리아가 테오스에게 물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랑 관련 있는 일이에요?”
그러자 테오스의 미간이 빠르게 구겨졌다.
“황태자? 왜 황태자 이야기가 나온 것이냐?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전하께서도 무슨 보고를 받고는 급하게 나가셨거든요. 혹시 연관이 있나 해서…….”
음, 테오스가 침음했다.
“그래…….”
테오스가 잠시 생각에 빠지자, 아델리아가 테오스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지금 바로 황궁으로 가셔야 하는 거죠?”
“그래야 할 것 같구나.”
어쩌지. 디크레드 백작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왜, 할 말이 있느냐?”
“아, 아니에요. 다녀오신 뒤에 해도 될 것 같아요.”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바쁘다는 테오스를 붙잡아 가면서까지 급하게 꺼낼 이야기가 아니라고 판단해서였다.
‘전하께서 급하게 알아봐 달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아델리아가 테오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게다가, 바빠 보이는 아빠에게 매달려 칭얼거릴 정도로 편한 사이는 아니니까…….’
그래도 이전 삶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관계였다.
아침마다 얼굴을 보며 인사도 나누고, 매번 함께 식사하며 별거 아닌 일로도 대화가 오고 갔다.
‘예전에는 애초에 저택에 계시지 않으셔서 대화 자체가 어려웠지.’
이 정도면 훌륭한 발전이었다.
‘이거면 충분해…….’
더 욕심내면 벌 받을지도 모르니까.
아델리아가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빠.”
그러자 테오스가 아델리아의 머리 위로 손을 한 번 올렸다가 내리며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다녀와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델리아가 몸을 돌려 테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갖다 대며 대답했다.
“……네, 아빠.”
근래 확실히 아빠가 다정해지셨어.
‘이런 거, 어쩐지 간질거려.’
아델리아는 머리에서 손을 내리며 흠흠, 헛기침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테오스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아주 조금씩 빨라졌다.
헤헷.
순식간에 방으로 올라온 아델리아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그리고는 서둘러 창문으로 뛰어갔다. 투명한 창문에 찰싹 붙어 테오스와 데릭을 찾았다.
‘아빠다.’
그 뒤로는 데릭이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말을 타고 정문을 나섰다. 한동안 아델리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몸을 돌려 세라를 불렀다.
“세라!”
“네, 아가씨?”
“은밀히 마차를 준비해 줘! 어느 가문인지 알아볼 수 없는 마차로.”
“네? 또 어딜 가시려고요? 곧 저녁 시간이에요, 아가씨.”
은밀히는 또 뭐고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히죽 웃었다.
“어디긴 어디야! 수도지!”
“네……?!”
테오스와 데릭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우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일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빠가 황실 기사단으로 복귀하는 날까지 기다렸다 움직여도 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라는 거다.
‘길드를 찾아갈 절호의 기회!’
***
“이제 정말 얼마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너무 오랫동안 독을 복용하셨어요.”
황제의 주치의 세니얼이 고개를 저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침대에 누운 황제 켄드릭이 병색 짙은 얼굴로 허허 웃음을 흘렸다.
테오스가 주치의에게 물었다.
“……정신까지 놓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입니까?”
그러자 세니얼 대신 켄드릭이 대신 대답했다.
“얼마 안 되었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네.”
켄드릭은 세니얼에게 그만 나가 보라며 손짓했다. 세니얼이 침실에서 나가자 켄드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테오스. 자네 딸아이 이야기나 해 봐. 훈련은 마음에 들어 하던가?”
“겨우 한 번 다녀왔을 뿐입니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고?”
“없었습니다.”
“저런.”
황제가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테오스 공. 황태자를 부탁하네.”
“본인의 아들은 본인이 책임지셔야지요.”
“야박하게 그러지 말고.”
“폐하께서는 일어나시게 될 겁니다. 그러니 폐하의 아드님은 폐하께서 책임지십시오.”
단호한 테오스의 말에 켄드릭이 씁쓸하게 웃었다.
켄드릭과의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다시 켄드릭이 정신을 놓아 버린 탓이었다.
급히 주치의가 들어오고 빠르게 조치했으나, 켄드릭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테오스는 켄드릭의 상태가 안정을 되찾은 뒤에야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에스테르 공.”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테오스를 불렀다.
황태자 카르세스였다. 그는 데릭과 함께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무슨 일로?”
테오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데릭이 대신 대답했다.
“아버지, 전하께서 하실 말이 있으시다고 하셔서요.”
데릭의 말에 테오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싫지 않아요! 좋아요! 좋아서 수락한 거였어요!
불현듯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좋다고 했었지.’
저 녀석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복도 위 세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 사이로 묘한 적막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