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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30)화 (30/161)

30화

“아가씨, 마차가 준비되었…….”

마차를 준비시킨 뒤 아델리아의 방으로 올라온 세라가 멈칫했다.

“아, ……가씨?”

소파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어야 할 아델리아가 보이질 않았던 탓이다.

“아가씨?!”

욕실에 계시나?

욕실로 달려가는 세라의 걸음이 초조했다.

‘안 계셔!’

세상에! 어떡해!

“아가씨! 장난치지 마시고요! 아델리아 아가씨! 아가……!”

방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세라가 협탁 위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올게!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세라! 추신: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무슨 뜻인지 알지?>

털썩—! 세라가 허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아, 아가……씨.”

아가씨이이!! 세라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

황태자의 집무실은 나이답지 않게 중후했다.

어두운 목재를 사용한 가구 하며, 벽지나 바닥의 카펫 또한 어느 하나 어린애다운 구석이 없었다.

카르세스가 소파에 앉아 바로 입을 열었다.

“디크레드 영지의 폴디아퀸이 필요합니다.”

“…….”

카르세스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급박했다. 체면을 차리느라 돌려 이야기하는 시간에도 황제의 목숨은 빠르게 꺼져 가고 있었다.

집무실은 한동안 고요했다.

테오스는 카르세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제가 아니라 디크레드 영주와 논의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전하.”

“제가 디크레드 백작가와는 접점이 없습니다.”

그때, 데릭이 나섰다.

“송구하오나, 전하.”

카르세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저희 에스테르 공작가 역시 오랜 시간 디크레드 가문과의 교류가 끊어졌었습니다.”

“알고 있어, 에스테르 경.”

“……예?”

카르세스가 다시 테오스를 쳐다보았다.

“에스테르 영애에게서 들었습니다.”

아델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테오스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아델리아와 닮아 있던 붉은 눈동자는 그녀와 달리 따사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공작의 반응에 카르세스 역시 속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테오스의 짙은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아이에게 디크레드 가문의 이야기를 하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경솔하셨습니다.”

테오스의 붉은 눈동자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미를 잃은 아이 앞에서 어미의 가문에 대해 언급하시다니요.”

“에스테르 공작.”

“나조차도 그 아이 앞에서는 감히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쉬우셨단 말입니까.”

그의 말에 카르세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스테르 공작. 따님을 너무 어리게만 보시는 것 같습니다.”

테오스가 어금니를 짓이기며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카르세스는 매서운 시선에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 갔다.

“에스테르 영애는 그 이야기에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슬픈 낯빛이 잠시 스치기는 했으나, 태연하고 초연했습니다. 지금의 에스테르 공작보다 더더욱.”

“…….”

“공작의 분노를 이해합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카르세스가 테이블 위로 작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공작. 나 역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테오스의 시선이 그 주머니에 짧게 머물렀다가 올라갔다.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폴디아퀸이라고 불리는 독초입니다. 정제되기 전에 영지를 나온 겁니다.”

그러자 그 독초를 알고 있던 테오스의 눈썹이 좁혀 들었다. 데릭 역시 놀란 얼굴로 독초와 테오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카르세스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서는 끝까지 함구하고 은폐하라 하셨습니다만.”

카르세스는 작은 주머니를 열어 테이블 위로 쏟아부었다.

쏟아부었다는 말이 민망할 만큼, 소량의 독초였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 독초에 중독되셨습니다.”

“…….”

“폴디아퀸. 디크레드 영지에서만 생산되는 이 독초에 말입니다.”

“전하.”

데릭이 급히 입을 열었으나, 테오스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럴 사람들이 아닙니다.”

“압니다.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이라면 자신의 영지에서만 생산되는 독초로 암살을 시도할 리가 없겠죠.”

“그럼 주치의가 바뀐 이유도…….”

“그렇습니다. 전 주치의였던 네카르. 그가 이 독초를 어떠한 경위로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폐하께 꾸준히 올렸습니다.”

테오스는 독초를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한때, 네카르가 공작가에 은혜를 입어 공작저에서 생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데릭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테오스가 데릭을 한 번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에스테르 공작. 폐하께서는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신경 쓰게 될까 봐 걱정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공작이 알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공작은 폐하께서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친우니까.”

“…….”

카르세스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폐하를 살려 주십시오.”

테오스는 알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인 소년은 고귀한 황족이 아닌,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은 그저 아비를 걱정하는 자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동안 대화가 오고 갔다. 대화는 제법 길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에스테르 공작의 입은 무거웠다. 아무래도 디크레드 백작가와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이에는 앙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주면 고맙겠습니다, 공작.”

테오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세운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집무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카르세스는 창가에 섰다.

“에스테르에서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아버지께서 믿고 있는 친우다. 아버지를 버릴 리 없어.”

카르세스는 정원길을 걸어 나가는 에스테르의 두 사내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몸을 돌렸다.

“우리도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폐하께서 누워 계신다 해도 하던 일을 멈출 수는 없어. 루드, 말을 준비해. 오늘이 그게 열리는 날이니까.”

“예, 전하.”

카르세스가 망토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쓰며 집무실을 나섰다.

***

아델리아는 옆자리에 올려 둔 주머니 두 개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짤그랑—

장신구와 보석들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났다.

꽤 묵직한 주머니 하나는 길드 의뢰를 위한 선수금이었다.

‘아무래도 길드 의뢰를 공짜로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

시간을 돌아온 뒤로, 아델리아는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부지런히 모았다.

‘품위유지비로 나온 것도 거의 안 쓰고 모아 놨지.’

품위유지비로 나온 골드는 물론, 오래된 보석함에 잠들어 있던 사용하지 않는 장신구나 보석도.

‘어차피 얼마 전에 오빠가 사 준 장신구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다른 주머니를 들었다. 의뢰 선수금이 들어 있던 주머니보다는 가벼웠지만, 아델리아는 그 작은 주머니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빠랑 오빠 선물도 사야지.’

얼마 전, 데릭과 외출했을 때는 자신의 것만 잔뜩 사 들고 돌아갔었다.

물론, 테오스와 데릭의 선물을 사겠다는 생각은 그때도 하고 있었다.

‘오빠가 따라붙는 바람에 사지 못했을 뿐이지.’

너무 정신이 없었으니까.

[제 거는요?]

‘네 거 뭐? 아, 목걸이 줄을 바꿔 줄까? 아니면 검집? 지금 네 몸에 맞는 검집이 있기는 하고?’

[……짓궂으세요!]

키득키득, 아델리아가 웃었다. 그러자 너무하다며 투덜거리던 리그하르트가 곧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걸이 줄이요.]

‘응?’

[은으로 만든 체인으로 바꿔 주세요.]

‘……싫은 거 아니었어?’

[생각해 보니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제 날렵한 몸매와 화려한 빛깔과.]

‘……알았어, 사 줄게.’

[크헤헹.]

리그하르트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짙은 남청색의 마차가 수도 거리로 들어섰다.

부드럽게 구르는 마차 바퀴가 으슥한 골목을 앞두고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괜히 세라한테 미안하네.’

마차 창문 너머의 수도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세라가 떠올랐다.

[정말 미안하긴 하신 거예요?]

‘……당연하지.’

대체 날 뭐로 보고.

‘들어갈 때 세라 선물도 하나 사 가야겠다.’

큼큼, 아델리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곧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적갈색 망토를 후드까지 깊이 눌러썼다. 그리고 세라가 대여한 마차의 대금을 마부에게 지급한 뒤 보냈다.

거리는 한적했다. 아델리아는 낯설지 않은 거리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누님! 저 건물이에요!]

‘나도 알아봤어.’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드나들었던 건물이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지.

낡은 나무 문으로 가까이 다가선 아델리아가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통통, 통, 토옹, 통통통—

아델리아는 귀를 쫑긋 세우고 문 안에서 들려올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노크 소리가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다.

‘응? 왜 아무도 안 나와? 암호가 틀렸나?’

다시.

통통, 통, 토옹, 통통통—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안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분명, 이 암호가 맞는데.’

아델리아가 다시 문을 두드리려 손을 뻗었다가 갑자기 멈췄다.

‘뭐야. 설마 문을 닫은 거야? 망했나? 아니면…….’

아, 맞다! 투기장!

암시장이나 투기장이 열리는 날에는 그리젤 길드는 문을 닫았다.

현재 그리젤 길드의 길드장이 그 암시장과 투기장을 이용하여 거액의 이익을 얻고 있었던 탓이다.

‘아, 어쩌지? 오늘처럼 혼자 빠져나올 수 있는 날은 또 없을 텐데…….’

[밤에 몰래 나오면 되지 않겠어요? 한 번 해 봤는데, 두 번은 더 쉽죠!]

‘그런가……. 그래도 아빠나 오빠가 저택에 있을 때는 들킬 위험이 크단 말이야.’

다른 길드를 찾아볼까? 아니야……. 모아 놓은 게 그렇게 여유롭지 않아.

‘이왕 맡기는 거 정보력만큼은 최고인 곳에 맡겨야지.’

그 길드가 아무리 비열하고 치졸하다 해도 말이야.

지금의 길드장이 뒤가 구리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당장 그리젤 길드만큼 정보력이 좋은 길드는 찾기가 힘들었다.

‘투기장으로 가자. 거기라면 길드장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얼굴도 알고 있으니까.

[우와! 투기장!! 좋아요!]

누님! 여기서 왼쪽! 피 냄새가 납니다! 어서요!

리그하르트가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길 안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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