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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31)화 (31/161)

31화

로시안트 제국의 투기장은 다른 제국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아아아아주, 악질적이지.’

보통의 투기장은 성인이 된 노예와 노예 간의 대결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로시안트 제국의 투기장은 투기장에서 작정하고 키워 낸 검투사와 어린 노예들을 붙였다.

말 그대로 학살이었다.

‘훈련받은 검투사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대결시키다니.’

사람의 목숨을 걸고 벌이는 비윤리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일확천금을 손에 쥘 수 있는 도박이자 유흥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희생되는 어린아이들은 주로 외형이 특이한 소수 부족의 아이들이었는데, 그래서 귀족들은 더욱 열광했다.

아델리아가 그림자 속에 숨어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이런 투기장들이 사라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아델리아가 스물다섯이 되던 해, 드디어 로시안트 제국에서 투기장이 모습을 감춘다.

당시 황제인 악시덤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우리 황태자 전하의 업적이다, 이 말이야.’

[네에네에, 지금 누님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그 녀석 말이죠.]

‘……아주 잠깐이야. 곧 내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금방 깨달으실 거야. 굉장히 똑똑한 분이시거든!’

[아이고, 어련하시려고.]

‘…….’

사실이었다.

황태자 카르세스는 제국에서 투기장을 섬멸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 일로 귀족파들은 완벽하게 황태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귀족파의 주 수입원이 투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덕분에 더는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되었잖아.’

아델리아는 카르세스를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귀족들의 지지는 중립 귀족파들을 회유해서 끌어들이면 돼.’

귀족이라 해서 다 같은 귀족이 아니다. 썩을 대로 썩어 버린 귀족파의 귀족들보다, 차라리 소신껏 중립을 유지하는 중립 귀족과의 화합이 황태자를 황제로 만들 수 있는 길과 가까웠다.

아델리아와 리그하르트는 길드 골목을 벗어나 번화가를 사이에 둔 또 다른 골목으로 진입했다. 투기장 건물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아아, 알겠다니까요. 어서 가요, 누님. 여기서 왼쪽이에요!]

‘응.’

아델리아는 후드를 푹 눌러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완전한 밤이 하늘을 뒤덮었고 번화가 쪽 건물들은 저마다 램프의 불빛을 밝혔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밤하늘 아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아델리아는 높은 건물이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겨 가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아침이 되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럼요! 길드장만 찾아서 의뢰를 맡기면 되는 거잖아요? 설마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겠어요?]

‘하긴.’

아델리아는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공작저에서 비실비실 말라 가는 세라를 떠올리며.

‘얼른 갈게, 세라!’

원래 아델리아는 은신과 암습 기술이 뛰어났다. 용병단 일을 하면서 그리젤 용병단의 단장에게 배운 기술들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일곱 살의 작은 몸이다 보니, 숨어서 이동하는 것은 더욱 쉬워졌다.

‘은신에 오히려 좋은 체격이 되었달까.’

어둠과 어둠 사이를 오고 가는 아델리아를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러도 조금씩 써 가면서 움직이니까 지치지도 않고.’

[저도 즐겁고!]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리그하르트도 아델리아도 괜히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아델리아의 발소리는 바람에 묻히고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누님, 저기!]

리그하르트가 소리치자, 아델리아의 걸음이 멈췄다.

“어이! 상품이라고 몇 번을 말해! 다치게 하지 말라니까!”

어두운 골목 안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저쪽에서 피 냄새가 진하게 나요.]

‘저 건물인 것 같아.’

아델리아는 한 걸음 물러서며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어 그들을 지켜보았다.

“퉷! 말을 더럽게 안 듣잖아! 이걸 봐! 내 팔뚝을 물어뜯었다고! 짐승 같은 새끼, 개도 아니고.”

그러자 다른 사내가 이마를 긁적이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개라고 생각하랬잖아. 그러게 입마개를 단단히 해 놨어야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로 무대에 올라야 안에 계시는 귀하신 분들께서 좋아하신다고.”

“알았어.”

“메인 이벤트를 망치지 마.”

“아, 거참. 알았다니까.”

그리고 이내, 골목을 가득 막아선 마차에서 어린아이들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우리 제국 아이들이 아니야.’

뾰족한 귀를 가진 아이, 머리에 뿔이 달린 아이, 피부색이 푸른 아이, 그리고 신비롭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아이.

저마다 특색 있는 외모였다. 마치, 다른 종의 생명체처럼.

[역시, 투기장 무대에 올릴 아이들인가 봐요.]

‘……들어가자.’

아델리아가 아이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리그하르트가 놀라 물었다.

[예? 설마, 저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요?]

‘응, 그럼 정문으로 들어가려 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지금처럼 숨어서 들어가실 줄 알았죠.]

‘그러니까. 쟤들 사이에 숨어서 들어가려고. 나이대도 비슷하니까 들킬 위험도 적고.’

[……아가씨, 지금 귀족 영애인 건 잊지 않으셨죠?]

‘당연하지. 난 한 번도 귀족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어.’

[…….]

아델리아는 곧장 아이들의 틈으로 숨어들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이들의 나이대는 다양했고 머릿수도 많았다. 아델리아 하나쯤 끼어든다 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특히 적갈색의 허름한 망토를 구해다 입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허름하고 칙칙한 망토는 주위 아이들과 자연스레 동화되어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런데 누님. 아이들이 좀 이상해요.]

노예로 잡혀 온 아이들은 마치 살아 있는 시체처럼 움직였다. 넋이 나간 얼굴, 벌어진 입과 느릿한 걸음.

중간에 불쑥 뛰어 들어온 아델리아 때문에 동요할 법도 한데, 아이들은 아델리아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흑마법인 것 같은데?’

노예로 잡아 온 것으로도 모자라, 사특한 흑마법까지 사용하다니.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아이들을 옮기던 경비들이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반복되는 일에서 오는 나태함이 고스란히 허점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의 무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델리아는 다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몸을 작게 웅크린 아델리아가 사내들에게 이끌려 멀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아이들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 모습이 계속 발길을 붙잡았다.

[저 아이들은 어쩌죠?]

리그하르트가 되물었다. 잠시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짧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네?]

이곳에서 저 아이들을 꺼내 줄 순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내가 저 아이 모두를 공작가로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아이들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 줄 수도 없다. 특히, 외형이 특이한 아이들을 숨겨 줄 보육원 역시.

‘저 아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지금의 난, ……영웅이 아니니까.’

앞으로도 다시 영웅이 될 생각은 없지만, 당장은 가족을 구하는 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게다가 잘못하면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투기장을 습격해 노예들을 빼돌렸다며 귀족파의 세력들이 들고일어날 일이다.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한동안 그녀를 괴롭히겠지만.

아델리아는 많은 생각이 스민 눈동자로 아이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족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명확했으나, 가슴 한편에 피어오르는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자, 릭.’

[네, 누님.]

리그하르트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델리아의 결정이 그녀를 얼마나 괴롭혀 댈지 이미 알고 있었던 탓에.

아델리아는 다시 은밀한 걸음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뒤쪽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요.]

‘응, 나도 들었어. 이쪽 방이 비어 있는 것 같으니까 지나갈 때까지 숨었다 가자.’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아델리아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으로 들어가 잠시 몸을 숨겼다가, 사내들이 지나간 뒤에 다시 나왔다.

[누님! 스무 걸음 앞에 성인 남자 다섯!]

‘알았어. 왼쪽으로 우회해서 가는 게 좋겠어.’

리그하르트 덕분에 투기장의 경비들과는 마주치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오……. 비범해 보이는 문 발견!]

‘저 안에서 함성이 들려.’

[맞아요, 누님.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요.]

적색 도료가 흉흉하게 칠해진 문이었다. 겉모습도 그랬지만, 실제로도 저 문은 지옥과 이어진 문이었다.

저 안쪽 상황은 아이들에게 있어 지옥이 분명할 테니까.

아델리아는 문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 문으로 걸어갔다.

[지키는 녀석들이 없네요?]

‘예전에도 그랬어. 이 문은 1층과 이어진 문이야. 작위가 없는 하층민들이 들어가는 문이지.’

투기장의 관중석은 크게 1층과 2층으로 나뉘었다.

1층은 자리 구분 없이 모두가 한 곳에 뒤엉켜 투기장을 관람하는 관중석이었다.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고 매우 거친 분위기가 흘렀다.

그에 비해, 2층은 귀족 작위를 가진 귀족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경비를 세워 철저히 신분을 확인한 뒤 들여보냈다.

‘그래서 1층은 굳이 경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어차피 지금은 투기장의 도박이 불법도 아니었다. 아무나 들어와 판돈을 키워 주면 이득이니까.

아델리아는 즉시 적색의 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갔다.

우와아아아아아—!

투기장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분위기는 단박에 바뀌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이 뒤바뀐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쏟아지는 함성에 귓가가 저릿했다.

‘벌써 시작됐어.’

아델리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대가 보이는 곳까지 이동했다.

[누님, 저길 보세요! 이미 당한 아이들이 있어요!]

무대 위에는 벌써 여러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크아아아아!”

어린아이들을 무참히 짓밟은 검투사가 대단한 일을 이룬 용사처럼 포효했다.

그러자 관중석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저 미친 인간들이…….’

아델리아가 이를 까드득 갈았다.

그렇게 또 검투사는 제 몸집만 한 장검을 휘둘렀고, 또 아이들은 무력하게 쓰러졌다.

“에잇, 이번에도 몰살이잖아. 한 명 남는다에 걸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한 놈만 살아도 그동안 잃었던 골드는 다 회수하는데 말이야.”

투기꾼들이 아깝다며 투덜거렸다.

말아 쥔 아델리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 누님!]

그때. 리그하르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 저 녀석!]

저 녀석? 아델리아는 무대 아래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무리를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그 무리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아이를 발견했다.

‘붉은색 머리카락…….’

흔하게 볼 수 없는 머리카락 색에 시선이 붙들렸다.

게다가 그 아이는 다른 아이에 비해 체격도 커다랬다. 머리카락 색 때문이 아니더라도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아이가 등을 돌리자. 목덜미에 선명한 낙인이 드러났다.

아델리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낙인을 보자마자,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목소리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아, 이거? 리티카야 부족의 낙인이다. 족장의 혈육에게만 찍는 거야.

-붉은 머리카락도 리티카야 부족의 특징이라 했었지?

-맞아, 아델리아. 기억하고 있었어?

-당연하지. 예쁜 색이야. 탁하지도 않고 강해 보이는.

-……남들은 전부 불길하다고들 하던데. 피를 뒤집어쓴 것 같다고.

-보는 눈이 없는 사람들만 만났나 보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말했잖아. 아름답고 강해 보이는 색이라고. 절대 불길하지 않아, 바라크.

바라크……! 설마, 진짜 그 바라크?!

아델리아가 앞쪽 난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지난날, 그녀가 잠시 몸담았던 그리젤 용병단의 단장.

바라크 타라이트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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