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세상에! 바라크라고?!
한 사내아이를 바라보는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데요, 누님. 저 녀석 눈이 멀쩡한데요?]
‘눈을 다치기 전인 거야.’
아델리아가 처음 바라크와 만났을 땐 이미 오른쪽 눈을 잃은 상태였다.
-투기장에서 얻은 상처다. 이 정도로 그친 게 다행이지. 다른 아이들은 목숨을 잃었으니까.
오른쪽 눈썹의 앞부분부터 시작된 흉터는 귓불 아래까지 사선으로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비가 오는 날마다 시큰거려서 찜질을 하고는 했었는데…….’
바라크는 리티카야 부족의 족장 아들이었다.
평균보다 월등히 큰 체격과 강한 힘, 그리고 불꽃같이 붉은 머리카락.
리티카야 부족의 어린아이들은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귀족들에게 좋은 놀잇감이었다.
‘릭.’
[네, 누님.]
‘나, 바라크를 구해야겠어.’
[네? 어떻게요? 아까는 구하기 힘들다면서요? 게다가 이제 곧 무대에 올라갈 거예요.]
투기장 무대 위로 올라간 아이들의 운명은 딱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죽음,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검투사의 살벌한 공격을 버티고 스스로 살아남는 거였다.
‘쟤가 정말 바라크라면 살아남을 거야.’
대신, 다시 눈을 잃을지도 모르지.
‘할 수 있다면, 바라크가 다치지 않길 바라.’
[설마, 여길 때려 부수시려고요?! 누님, 그렇게 되면 진짜 일이 커지는 거예요!]
‘알아. 그래서 아이들만 구할 거야. 그 뒤에 살아남는 건 아이들의 몫이 되겠지. 여기서 검투사한테 허무하게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죠. 리그하르트가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이들만 구하는 거야. 바라크를 구할 겸, 겸사겸사.’
아이들을 책임질 수 없으니 구하지 않겠다던 마음이 바라크를 보자마자 흔들렸다. 전우의 위기를 보고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델리아는 망토 속에 숨겨 온 단검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건물은 부수지 못하지만, 한동안 투기장을 운영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게 만들어 줄 수는 있어.’
오늘 단 하루, 이 투기장의 모든 경기를 취소시키면 된다.
그럼 판돈을 되돌려 받으려는 투기꾼들의 분노를 상대하느라 도망친 아이들을 뒤쫓는 일은 뒷전이 될 것이다.
‘자, 그러려면.’
다시 인파를 비집고 높은 장소로 이동한 아델리아가 투기장 내부의 전체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이 투기장의 주인부터 찾아야겠지?’
1층……. 그리고 2층.
아델리아가 시선을 올리자, 투기장의 투박하고 두꺼운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2층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1층 관중석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겉에서 봐도 호화롭네.’
[악취미네요. 저 커다란 창문으로 이 광경을 내려다보는 거죠?]
‘맞아.’
많은 인원이 뒤엉킨 1층과는 달리, 2층의 관중석은 객실처럼 나누어져 있었다.
커다란 유리 창문으로 투기장의 모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는데, 신분 노출의 염려도 없었기에 고위 귀족들이 주로 찾아왔다.
‘오페라 극장의 관람석도 저것보다는 덜 화려하겠다.’
그러다 아델리아의 시선이 2층 객실 중 하나에 꽂혔다.
‘저기야.’
아델리아는 투기장 주인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냈다.
가장 높고 화려한 객실이었다.
[누님은 어떻게 매번 그놈들이 있는 장소를 바로 찾아내시는 거예요?]
리그하르트가 감탄하며 말했다.
‘경험이지.’
[경험? 그 경험, 저도 같이했는데 왜 저는 모르죠?]
‘그건 지능.’
[…….]
아델리아는 전장에서 돌아와 짧은 자유 시간이 생기면 곧장 용병단 일을 맡았다.
그중에는 투기장 주인을 처리해 달라는 의뢰들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투기장을 운영하는 세력 간의 다툼 때문이었다.
‘투기장 주인 놈들은 대부분 허영심이 있었어.’
[허영심이요?]
‘응, 그 녀석들에게 이 투기장은 자신들이 만든 작은 왕국이거든.’
한마디로, 투기장의 주인은 그 왕국의 왕이었다.
그들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모두를 내려다보며 왕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자신의 명령 하나에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니까, 거기에 희열을 느끼는 거지.’
그래서 대부분의 투기장 주인들은 가장 크고 넓으며 화려한 장소에서 투기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는 지루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아델리아가 망토 속 단검을 한 손에 꼭 쥐었다.
‘그리젤 길드장도 저 호화로운 객실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안타깝지만 시간상, 길드장을 찾는 일과 투기장의 주인을 찾는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의뢰는 다음에 맡길 수 있지만, 바라크의 눈은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잠시 고민하던 아델리아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
테오스와 데릭은 황제의 침실과 가까운 방으로 안내받았다.
당장 황제의 증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었기에, 황궁에서 머물며 황제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이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되시는 걸까요?”
데릭이 소파에 앉아 테오스를 바라보았다.
데릭을 등지고 선 테오스는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해독제를 구하지 못한다면 죽게 되겠지. ……그러나 한동안은 버티고 있어 줄 거다.”
그리 약한 사내는 아니었으니까.
테오스의 말에 데릭이 시선을 떨구었다.
“하필 폴디아퀸이라니…….”
게다가 황태자의 말에 의하면 더는 폴디아퀸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재배지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어요.”
“황제의 주치의가 발각되자, 곧바로 움직였겠지. 우리 쪽에서 해독제를 만들지 못하도록.”
“그건 그쪽에서 황태자 전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소리네요.”
“그것보다, 주치의의 행방이 묘연해져서 눈치챘을 거다. 어떤 식으로든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테고, 그 연락이 끊어지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을 테지.”
그렇군요. 데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필, 폐하께 독을 올린 주치의가 네카르라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 회유당한 것이다.”
에스테르 공작가를 찌를 검이 필요했던 거겠지.
테오스의 말에 데릭은 더욱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네카르는 데릭이 데려온 사람이었다.
당시 네카르는 야만족의 습격에 아내와 아이를 동시에 잃고 좌절에 빠져 있었다.
때마침, 전쟁을 끝내고 귀환하던 데릭이 네카르가 있던 마을에 도착했다.
-온통 시체입니다. 장례를 치를 여유도 없어 그저 시체를 방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역병이라도 돌지 모르니, 서둘러 지나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수하의 보고에도 데릭은 쉽사리 등을 돌리지 못했다. 가족을 잃은 비애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던 탓이다.
-전리품을 나누어 주고 장례를 도와라.
-하지만, 부단장. 전리품을 함부로 사용하셨다가는…….
-돌아가는 즉시 에스테르 공작가에서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면 된다. 지금은 당장 필요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라.
-예, 부단장.
데릭이 이끌던 기사단은 즉시 마을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를 모아 공동 장례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날 밤, 네카르가 데릭을 찾아왔다.
-기사님 덕분에 제 아내와 아이를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이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요……. 고맙습니다, 기사님.
그리고 데릭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아내와 아이의 추억으로 가득한 이 마을에서 더는 혼자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며.
-제가 의술을 조금 배웠습니다. 데려가 주신다면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데릭은 잠깐 고민했지만, 그의 정직한 눈을 믿었다.
의술을 조금 배웠다던 말과 달리, 네카르의 의술은 조금 배운 수준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황궁의 의원보다 나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함께 전장을 다녔다. 데릭은 제국민을 지켰고 네카르는 그런 데릭과 그의 기사단을 지켰다.
짧다면 짧지만, 그렇다고 얕은 신뢰는 아니었다.
‘인정에 휘말려 쉽게 사람을 믿은 대가인가.’
회유당했다고는 하더라도, 배신은 배신이다. 데릭은 가슴을 치는 배신감에 입술을 꾹 말아 씹었다.
“데릭.”
그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테오스가 데릭을 불렀다.
“예, 아버지.”
데릭이 테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태산 같은 뒷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자책하지 마라.”
“…….”
테오스의 묵직한 위로에 데릭은 온몸의 긴장이 작게나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데릭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아버지.”
***
우와아아아아! 투기장의 열기는 함성과 함께 더욱 치솟았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찾으며 이동하는 내내, 아델리아의 시선은 투기장 무대를 바쁘게 오고 갔다.
[곧 다음 아이들이 올라갈 것 같아요.]
‘……조금만 버텨, 바라크.’
아델리아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올라오니, 1층과는 달리 조용했다.
1층에서는 보이지 않던 경비들도 꽤 많은 수가 돌아다녔다.
[이젠 어쩌죠? 1층은 복잡한 구조라 숨을 장소라도 있었지만 여긴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요.]
‘비어 있는 방을 알아봐.’
[네.]
잠시 집중하던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저기 다섯 번째, 녹색 문이요. 안에 인기척이 안 느껴져요.]
‘좋아. 지금부터 복도에서 마주치는 경비들은 죄다 거기에 잡아넣을 거야.’
[……네? 누님, 일이 커지는 거 아니에요?]
‘기절만 시키는 거야, 기절만.’
그러니까요……. 그게 일이 커지는 거잖아요. 중얼거리는 리그하르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아델리아는 단검을 들었다.
‘간다, 릭.’
[자, 잠깐만요!]
기다리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복도를 소리 없이 달렸다.
그리고 녹색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 놈 온다.’
그리고 문을 열어 놓은 채로 기다렸다가 방안에서 일부러 소리를 내었다.
톡, 톡톡.
“이게 무슨 소리야. 여긴 또 왜 문이 열려 있…….”
아델리아는 경비를 방 안쪽까지 유인했다. 그리고 경비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즉시, 단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뒤통수를 세게 가격했다.
퍼억—!
“억!”
짧은 비명과 함께 경비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놈 처리했고.’
[……오러를 사용하시면 어떡해요.]
‘어쩔 수 없잖아. 내 근력만으로는 저런 건장한 놈들을 기절시키는 건 힘들다고.’
그리고 시체, 아니 기절한 사내들을 구석으로 몰아 놓으려면 오러의 힘은 더욱 필요하거든. 아델리아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걱정하지 마. 아무리 봐도 여긴 오러 발현자가 없어. 내 오러를 알아보지 못해.’
[어휴.]
못 말린다며 한숨을 내쉬던 리그하르트가 이어서 말했다.
[세 놈 와요.]
‘응!’
퍽. 퍼억, 퍽―!
녹색 문 안으로 기절한 경비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