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33)화 (33/161)

33화

아델리아는 1층에서 미리 봐 두었던 객실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안쪽의 대화가 들려왔다.

“시시하군.”

지루해하는 목소리에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음 경기부터는 볼만하실 겁니다.”

“메인 이벤트인가.”

“예. 저기, 6시 방향을 보시면 빨간 머리의 사내아이가 보이실 겁니다.”

“……리티카야 족장의 막내 아들놈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아델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야, 릭.’

[어떻게 할까요! 문을 부술까요?!]

‘아니.’

똑똑—. 아델리아는 문을 부수는 대신 정직하게 두드렸다.

[아, 아니! 문을 두드리시면 어떡해요!]

‘벌컥 문을 여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투기장에 몰래 숨어들어 와서 경비들을 때려눕힌 건 예의고요?]

쯧, 잔소리는.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의 잔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누구…….”

방에서 나온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여기예요.” 하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제야 사내가 자그마한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사내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이게 무슨……. 어떻게 들어왔지?”

사내가 다시 고개를 들어 복도를 살폈다.

“지키던 새끼들은 다 어디에 나자빠져 있는 거야?”

“어? 어떻게 아셨지?”

그러자 사내가 아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냐.”

“다 나자빠져 있어요.”

“뭐……?”

“이렇게.”

아델리아가 오러를 칭칭 감은 단검으로 사내의 급소를 가격했다.

퍼억!

“컥!”

순식간에 기습을 당한 거구의 사내는 가격당한 급소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행히 단검은 검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 만큼,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정신을 잃었다.

[와……. 이건 좀 너무했다.]

‘…….’

아델리아는 쓰러진 사내를 조심스레 피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사내가 물었다.

“웬 놈이냐.”

오……. 아델리아가 속으로 감탄하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투기장의 주인답네.’

문 쪽에서 꽤 큰 소란이 일었음에도, 투기장 주인은 당황하지 않고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아델리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얼굴을 살피려 했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전 처음 보는데요?]

‘그래? 그럼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그때, 투기장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계집이 간도 크구나. 투기장까지 숨어들다니. 고작해야 다섯, 여섯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누님, 역시 바로 나이를 알아맞혀 버리는데요? 들키면 어쩌죠?]

그러나 아델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알아맞히기는. 일곱 살이거든? 다섯, 여섯 살이 아니라!’

아델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쯔쯔, 혀를 찼다.

“멍청하네.”

“뭐라?”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어린아이로 변장했을 거라는 생각은 왜 못 해?”

아델리아가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델리아의 말에 사내의 입매가 조금씩 굳기 시작했다.

“마법이로군.”

“그렇다.”

아델리아가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서 저렇게 오해를 해 주니, 오히려 이쪽에서 감사할 일이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아델리아와는 달리, 투기장 주인의 미간은 빠르게 좁아졌다.

‘그런 마법은 고위 마법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데……?’

그런 마법사들과는 척진 적이 없거늘, 어째서?

투기장 주인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보냈지?”

그러자 아델리아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분위기에 맞춰 그녀의 목소리도 한껏 무거워졌다.

“그건, 의뢰인과의 비밀 보장 조항 때문에라도 알려 줄 수 없다. 이 바닥을 잘 아시는 분께서 왜 이러실까?”

누가 보내긴, 내가 스스로 왔지.

[누님! 진짜 뭔가 있어 보여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사내가 아델리아 몰래 오른손을 테이블 아래로 뻗었다. 숨겨 놓은 무기를 잡을 생각인 듯 보였다.

그러나 진즉에 그 움직임을 알아차린 아델리아가 빠르게 도약하여 사내의 등 뒤로 달려갔다.

“이러면 내가 곤란해, 아저씨.”

그리고 준비해 온 단검을 검집에서 뽑아내 사내의 목에 바짝 겨누었다.

오러가 일렁거리는 단검은 금세라도 살갗을 찌르고 들어올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사내가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

‘2층의 경비들을 처리하고 호위를 단숨에 제압한 것을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다.’

게다가 조금 전, 그 몸놀림.

‘정말 어린아이로 변장한 암살자란 말인가!’

그러니까 그게 대체 누구란 말이야!

그러나 투기장끼리 세력 다툼하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떠오르는 놈들만 해도 수백에 이르렀다.

투기장 주인은 턱을 불뚝거리며 물었다.

“모, 목적이 무엇이냐. 내 목숨이냐.”

그러자 아델리아가 곧장 대답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목숨은 살려 드릴게.”

“……뭘 하면 되지?”

“오른손은 가만히 있고, 왼손으로 호루라기 꺼내.”

“……!”

아델리아의 말에 사내의 눈이 커졌다.

‘호루라기까지 알고 온 건가. 제기랄. 그럼 다 알고 왔다는 소린데.’

빌어먹을. 대체 어떤 놈들이냐!

사내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상의 안으로 숨겨 두었던 목걸이 줄을 당겨 꺼냈다.

목걸이 줄 끝에 작은 호루라기가 달려 있었다.

‘말 잘 듣네.’

아델리아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사내가 꺼낸 호루라기를 확인했다.

‘저거 맞아.’

아델리아는 과거, 용병으로 일하며 투기장과 관련된 여러 임무를 맡아 해결했었다. 그랬기에 투기장을 운영하는 인간들의 방식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저 호루라기를 이용해 경기를 중단시키는 거였다.

아델리아는 입으로 호루라기를 가져가는 사내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불어. 머리 굴리지 말고.”

“…….”

“어서.”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사내의 살갗에 가느다란 붉은 선이 생겼다.

“아, 알았다고!”

잠시 호루라기를 입에서 뗀 사내가 말했다.

“세 번.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알지?”

“……젠장.”

호루라기를 세 번 분다는 것은 경기를 중단한다는 의미였다.

삑, 삑, 삐이이이익—

높은음의 호루라기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그러자 투기장 무대에 올랐던 검투사와 아이들을 무대 위로 이동시키던 경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가 보고 올게. 일단 신호대로 움직여. 경기는 중단이다. 사람들 내보내고 아이들은 지하로 옮겨.”

경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2층에서 통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착한 수하들이네. 교육이 참 잘된 것 같아.”

“이제, 목숨은 살려 주는…….”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내 의뢰인께서 이 투기장이 아예 문 닫기를 바라시거든?”

“…….”

“왜? 싫어? 이게 고민할 거리나 돼? 아저씨 목숨보다 이 투기장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아델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자, 투기장 주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 목에 겨눈 단검이 그대로였다. 아이 모습을 한 암살자가 웃을 때마다 살갗이 조금씩 베이는 느낌이 선연했다.

“무……, 문을 닫겠다.”

“잘 생각했어, 아저씨. 조금만 더 대답이 늦었으면 내가 변장을 풀 뻔했잖아.”

아델리아는 고개를 숙여 사내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몸만 어린애 몸이지, 변장이 풀리면 더 대단하고 잔인한 녀석이거든, 아저씨.”

물론, 그 변장이 풀리려면 십 년은 더 있어야겠지만.

아델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델리아는 목에 단검을 겨눈 채, 창문 밖을 살폈다.

“보자……. 나 이제 가야 하는데.”

1층의 아이들을 정리하던 경비들이 보이지 않았다.

‘빠르네.’

아델리아가 단검 때문에 뻣뻣하게 경직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어디서 본 얼굴인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을 이어 갔다.

“아저씨, 이제 나는 갈 건데. 그 사이에 수하들 불러서 나 쫓아오고 그러면 내가 또 굉장히 피곤해지겠지? 그래서 말이야. 조금, 아주 조금 아플 거야.”

“무슨 짓을 하려……, 컥!”

아델리아는 곧장 단검의 손잡이로 투기장 주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사내는 힘이 축 빠진 채, 소파에 널브러졌다.

“휴, 다행이다.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잘 끝냈어.”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이 정도면 충분히 조용히 끝낸 거지.”

아델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투기장 주인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투기장을 정리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이 제국에서 투기장을 몰아내는 건, 온전히 황태자 전하의 업적이 되어야 해.’

그런 의미로.

“자, 그럼 우린 바라크를 데리러 가 볼까?”

아델리아는 곧장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

지하 감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을 지하로 옮겨 놓은 경비들이 우르르 몰려 올라왔던 탓이다.

‘저렇게 허술해서야.’

아델리아는 경비들이 어느 정도 빠진 뒤에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관중들이 골드 뱉어 내라고 난리가 났다고.”

“그거야 위에서 알아서 하겠지. 우린 노예들이나 잘 지키고 있으면 돼.”

지하를 지키고 있던 경비들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마저도 아이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이제 투기장 주인이 당했다는 게 알려질 거야. 그 전에 바라크를 데리고 빠져나가야 해.’

[2층에서는 유인해서 처리했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았지만, 지금은 너무 모여 있는걸요?]

‘할 수 없지. 오러를 왕창 꺼내야겠어.’

[예에? 안 돼요! 아직 한 번도 연습 안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하자고. 그 연습.’

[누, 누님!]

아델리아는 곧장 오러 큐브에 집중했다.

그러자 은빛 머리카락이 조금씩 나부끼고 그 위로 금색의 잔잔한 오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아델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돌려세웠다.

“아!”

아델리아가 휘청거리자, 어깨를 붙잡았던 손이 아델리아의 등을 받쳤다.

“설마 여기서 오러를 쓸 생각은 아니겠지.”

맑지만 조금 낮은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다.

“어?!”

아델리아가 자신을 붙잡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어, 어, 어떻, 게…….”

어떻게 이 자리에 있냐고 묻는 아델리아의 시선에 그는 옅게 웃으며 되물었다.

“오늘의 이 난리가 모두. ……영애의 작품인 건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