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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34)화 (34/161)

34화

“저, 전하?”

“쉿. 내가 황태자라는 걸 다 떠벌릴 셈인가?”

“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나만 할까.”

아델리아를 똑바로 세운 카르세스가 아델리아 곁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저 아이들을 구하려는 거였나?”

“그런 셈이죠.”

그런 셈? 모호한 대답에 카르세스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르릉— 카르세스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내가 경비들을 맡을 테니 아이들을 데리고 빠져나가.”

“돕겠습니다, 전하.”

“성인을 상대로 오러부터 꺼내는 그대가? 오러를 쓰는 자가 투기장을 습격했다는 소문이 퍼지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럼 공작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야, 영애.”

“……그거야.”

그때, 아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돌아온 경비들이 카르세스와 아델리아를 발견했다.

“웬 놈들이냐!”

“영애, 어서 움직여.”

“네, 전하.”

카르세스가 검을 치켜들고 경비들을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자, 경비들이 코웃음 쳤다.

“어린 녀석이 겁대가리를 상실했군.”

그러자 아델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멍청하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려면 어린아이 변장이 최고지! 그 증거로 네놈들도 지금 방심하고 있잖아!”

그러자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

아델리아가 씩 웃으며 카르세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전하. 제가 저 녀석들의 집중을 깨트려 놨습니다. 이제 전하를 어린아이로 변장한 암살자라고 생각할 거예요! 우리 정체가 들킬 일은 없다는 거죠!”

어쩐지 의기양양한 그 모습에 황당해하던 카르세스도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보세요, 전하. 저 주춤거리는 모습을. 진짜 우리가 어린아이로 변장했다고 믿기 시작한 거예요!”

아델리아가 보란 듯이 말했다.

카르세스는 고개를 젓다가 그대로 검을 고쳐 잡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까앙—! 미처 대비할 틈 없이, 경비의 투구가 카르세스의 검날에 맞아 허공으로 솟구쳤다.

“커윽!”

연달아 다른 경비들도 발에 걷어차이거나 검에 찔려 뒤로 튕겨 나갔다.

[누님! 저 녀석이 열쇠를 가지고 있어요!]

‘좋아.’

그렇다면 나도 움직여야지.

아델리아도 단숨에 달려나가 열쇠를 가지고 있던 경비의 발을 걷어찼다.

달아나려다가 난데없이 감옥 바닥으로 고꾸라진 사내가 버둥거렸다.

“사, 살려 줘!”

“그래, 안 죽여. 좀 가만히, 아니, 움직이지 말……. 아, 정말!”

경비가 계속해서 버둥거리는 바람에 열쇠를 잡을 수 없게 되자, 아델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날에 오러를 감아 사내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끄윽!”

사내의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 이런. 조용히 열쇠만 뺏으려 했는데.’

[거짓말! 이미 조용히는 글렀다고요!]

지하 감옥의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경비들의 수가 늘어났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아델리아가 손바닥을 탁탁 털며 카르세스에게로 다가왔다.

“휴. 다친 곳은 없으세요, 전하?”

아델리아가 땀 닦는 시늉을 하며 손등으로 보송보송한 이마를 콕콕 찍었다.

그런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카르세스가 눈매를 갸름하게 떴다.

“……대담한 건지, 무모한 건지.”

“이왕이면 전자로 해 주세요.”

헤헤, 아델리아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때, 계단으로 누군가가 내려왔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놀란 표정의 루드와 아스틴이 시야로 들어왔다.

‘아스틴이잖아?’

[와! 아스틴이다! 아스틴이야!]

아델리아보다 리그하르트가 더 반가워하는 듯했다.

‘살아 있는 아스틴이라니…….’

카르세스의 호위 기사인 아스틴은 충직한 수하였으나, 종종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인 행동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카르세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보필해 온 아스틴을 아꼈다.

‘조금 철이 없지만, 정이 많았지.’

카르세스는 아스틴을 친형 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사고를 쳐 봤자,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정작 중요한 임무에서는 조건 없는 충성심을 보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스틴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때 전하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해…….’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동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게 닫힌 입술.

그는 울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스틴의 장례를 조용히 치러 줬을 뿐이었다.

아델리아가 아스틴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아델리아의 시선이 의아했던 건지, 아스틴이 눈썹을 끌어 올렸다.

“뭐야, 이 꼬맹이는?”

“아스틴.”

카르세스가 아스틴을 막았지만, 아스틴은 빠르게 걸어와 아델리아 앞에 섰다.

‘아스틴……, 너…….’

여전히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속으로 생각했다.

‘……넌 처음부터 예의가 없었구나?’

아델리아와 아스틴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사이였다.

검을 다루는 방식에서부터, 사소하게는 먹는 취향까지.

어느 하나 맞는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델리아는 그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지금의 재회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게 뭔데?

-너, 이번에 셰크리나로 출정이라며.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거기 흑마법 주술 때문에 기사들이 많이 다쳤던 곳이라더라. 이거 들고 가면 좀 괜찮을 거야. 다리 두 개 부러질 거 하나 정도로 막아준댔어.

-너……. 내가 성검의 주인인 건 알고 있지?

-염병. 성검의 주인은 뭐 무적이냐? 흑마법에 당할 수도 있고 검에 베이기도 하고 걷어차이면 다리도 부러지고 하는 거지! 아, 됐어! 들고 가기 싫으면 말고!

-아니야. 이리 줘. 가지고 갈게. ……고마워, 아스틴.

-고맙긴. ……얼마 안 하는 건데, 뭐.

신전에서 산 부적이라며 작은 목걸이를 챙겨 주던 아스틴은, 정작 자신이 흑마법에 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멍청아, 그건 내가 아니라 너한테 필요한 거였잖아…….’

아스틴은 카르세스보다 다섯 살 많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철없는 친형 같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아델리아에게도 그랬다. 어쩐지 챙겨 줘야 할 것 같은, 철부지 오빠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아스틴의 죽음은 아델리아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아델리아는 아스틴을 조금 더 올려다보다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가지런히 땋아 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어……?”

아스틴이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알아보고 입을 뻥긋거렸다.

“에, 에, 에스…….”

그러자 카르세스가 아스틴을 루드에게 밀어 주고 아델리아 앞에 섰다.

“여기 정리는 내 보좌관에게 맡겨 놓고 우리는 나가지.”

“아, 잠시만요.”

아델리아가 몸을 돌렸다. 잠겨 있는 감옥 안쪽을 살피며 두리번거리자, 카르세스가 물었다.

“찾는 아이가 있었나?”

“네, 있어요.”

아델리아는 감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의 뒤를 따라갔다. 아델리아는 자신을 따라 걷던 카르세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 많은 아이를 다 어쩌시려고요?”

“내가 후원하는 보육원이 있어.”

아, 그럼 다행이다. 역시 우리 전하는 그릇마저 큰 사람이야.

어차피 아델리아는 아이들을 풀어 줄 생각만 했지, 저 아이들을 거두어 살필 생각은 없었다.

황태자 전하라면 믿을 수 있지.

‘잠깐. 그러면 내가 지금 바라크를 찾을 필요가 없잖아.’

바라크 역시 공작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바라크에게는 바라크만의 삶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을 도륙한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실력을 키울 테니까.

아델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카르세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돌아가요, 전하. 찾는 아이는 없…….”

그 순간, 스쳐 지나온 감옥 안쪽. 황금빛 안광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바라크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철창을 붙들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아델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고 등을 돌렸다.

“리티카야 부족의 아이로군.”

“네.”

그때였다.

“아까 널 봤어.”

바라크가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아델리아가 바라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너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그걸 봤다고?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오러까지 사용해서 빠르게 움직였는데?

[역시, 눈이 좋은 녀석이에요.]

리그하르트가 감탄했다. 아델리아 역시 바라크에게 속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일단 거기서 꺼내 줄 거야. 그럼 저쪽 사람들을 따라가. 이곳보다 훨씬 살기 편할 테니까.”

아델리아가 한쪽에 서 있던 루드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바라크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넌, 내가 필요 없어?”

“내가 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 분명히, 날 아는 것처럼 쳐다봤잖아.”

“…….”

대체 감이 어디까지 좋은 거야?

[그냥 이참에 데리고 가시죠?]

‘안 돼. 쟤는 여길 나가서 복수하러 가야만 해.’

복수를 위해 힘을 기르고 결국 복수에 성공하는 것이 바라크의 운명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그 운명에 많은 개입을 했다.

‘더는 안 돼.’

아델리아는 바라크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넌 네가 가야 하는 길을 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움직이지 말고.”

“…….”

“그리고 강해져. 널 발아래 두려던 자들이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아델리아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다시 바라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어?”

아델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천진함이 남아 있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아마도.”

***

루드와 아스틴은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투기장과 떨어진 건물로 향했다.

‘어? 여기는…….’

바람에 앞뒤로 흔들리는 익숙한 간판이 그녀를 반겼다.

<테트 도르>

황태자의 비밀 근거지였다.

저 건물로 들어간 사람들은 두 분류로 나뉘었다.

카르세스가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카르세스가 은밀히 처리해야 하는 사람이거나.

아델리아는 새카맣게 어두운 건물 입구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일단, 황태자가 아직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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