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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35)화 (35/161)

35화

“들어가지.”

“하지만 여긴…….”

건물 입구로 들어가려던 카르세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여길 아나?”

“아뇨? 그럴 리가요?”

하하! 제가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있겠습니까?!

아델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삐걱대는 걸음으로 걸었다.

“들어가시죠, 전하.”

“영애, 걸음이 영 이상한데. 조금 전 그곳에서 다치기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전 멀쩡합니다, 전하.”

하하!

3층까지 겨우 올라온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안내한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마실 것을 내어주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

“아, 그럼 제가…….”

“…….”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아델리아는 습관처럼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

“제가, 알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야지. 알고 있으면 안 될 일이지.”

“그렇죠.”

카르세스의 눈매가 슬며시 휘었다. 그의 미소는 순간 넋을 빼놓을 만큼 몹시도 훌륭했다.

그러나 저 미소 속 자신을 주시하는 보라색 눈동자에는 여전히 경계와 의심이 남아 있었다.

[와, 살벌하네요.]

‘너도 느껴지지? 아직도 날 의심하고 있어. 그런데 이곳에 데려왔다?’

아델리아는 잠시 침묵하며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조용히 리그하르트에게 말했다.

‘여차하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테니까 너도 그런 줄 알아.’

[네, 누님.]

어쩐지 리그하르트의 목소리도 비장함이 묻어났다.

“그곳에 왜 간 거지?”

잠깐의 침묵을 깨고 카르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요? 거기에 대체 왜 가신 거예요?”

“내가 먼저 물었어, 영애.”

“아니, 거기는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영애가 할 수 있는 걸 내가 못 할 거로 생각한 건가?”

“아…….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델리아가 시선을 피하자, 카르세스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무모했어. 루드나 내 호위가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쯤 지하로 내려온 나머지 경비와 맞닥트렸을 거야.”

“아마, 제가 다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래, 어쩌면 그 경비들까지 처리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치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어. 시간을 더 끌어 봤자, 신분이 노출될 확률도 높아지고.”

그의 말이 옳았다. 사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그 많은 수의 경비들을 혼자서 다 상대해야 했을 거다.

오러를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하.”

아델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나서지 않으셨다면 말씀하셨던 것처럼 꽤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거예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내렸다.

“의외로 순순히 인정하는군.”

“제 장점 중 하나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도움을 받은 셈이지. 영애가 미리 경비를 처리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시간에 쫓겨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곳을 벗어나야 했을 거야.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겠는데.”

그의 말에 아델리아의 눈썹이 슥 위로 올라갔다.

‘어라? 오늘따라 좀 유하신 것 같은데?’

그녀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저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신 거예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리가.”

“네? 아니, 왜요?!”

아델리아가 억울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세스는 음, 짧게 침음했다.

“아직 파악하는 중이야. 어째선지, 영애는 쉽게 결론 나지 않아.”

적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인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뛰어나다.

넝쿨째 굴러들어 온 인재라면, 그 또한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다.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으니까.

카르세스는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복잡한 카르세스의 속마음과는 달리, 아델리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다행이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까 당장 죽진 않겠네.’

[그런데 여기까지 데리고 왔잖아요.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결론을 내리겠다는 뜻이 아닐까요?]

테트 도르에는 황태자가 신뢰하는 사람이나 처리해야 할 사람. 딱 두 종류만 들어 올 수 있으니까요.

리그하르트의 말에 아델리아가 속으로 탄식했다.

‘아…….’

그렇네.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태라는 건,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결론을 내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어.

‘너, 단순한 쇳덩이는 아니구나.’

[누님!]

아델리아는 카르세스를 흘깃거리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벌써 자정이 넘었다. 곧 새벽이 올 것이고 그러면 금방 해가 뜰 것이다.

‘아빠가 오시기 전에 가야 하는데…….’

아델리아가 천천히 카르세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고여 있었다. 그러나 눈빛에 스며 있는 의심 또한 그대로였다.

‘아, 정말……. 내가 왜 의심을 받아야 하냐고!’

아델리아의 억울함은 한층 더 강해졌다.

모르겠다. 찔리는 게 없는데 내가 주눅 들 이유가 뭐가 있어?!

아델리아는 카르세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든 해 보세요. 전하께서는 현명한 분이시니까 언젠가는 알아차리시겠죠.”

“뭘?”

“제가 적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 전하의 든든한 아군이 될 사람이라는 걸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모쪼록 그랬으면 해. 나도 어린애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무척 찝찝할 것 같거든.”

“죽여요? 저를요?”

와, 진짜! 이 내가 먼 미래에 방해물이 될 배후도 처리해 주고! 황제 자리까지 올려 줄 은인인 줄도 모르고!

“어쨌든.”

카르세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문 바깥으로 상체를 조금 기울여 건물 아래를 확인했다.

미리 불러 놓았던 마차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카르세스가 말을 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영애. 지금 그대는 굉장히 위험한 단계거든.”

“그런 걸 미리 말씀하셔도 돼요? 그러다 제가 달아나면 어쩌시려고.”

카르세스는 창틀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내려가 봐. 공작저까지 타고 갈 마차가 도착했으니.”

“이렇게 잘해 줄 거면서 죽인다는 소리는 왜 하시는 거야.”

아델리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영애, 속마음이 나온 것 같은데.”

“전하께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으신가 보죠.”

하하, 카르세스는 훈련하는 날에 또 마차를 보내겠다며 달콤하게도 웃었다.

‘저렇게 예쁘게 웃질 말든가.’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에게 꾸벅 인사한 뒤,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마음 바뀌어서 쫓아오시진 않겠지?’

[설마요. 그렇게 변덕쟁이는 아니었잖아요?]

‘그건 그래.’

신중할 뿐이지.

테트 도르에서 빠져나온 아델리아는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굴러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의자에 푹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힘든 하루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이제 조용히 들어가서 대충 씻고 잠들면…….”

아! 아델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리 세라!’

자신의 방에서 삐쩍 말라 가고 있을 세라가 떠올랐다.

***

어둑한 밤하늘에 새벽이 물러가고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흐어어엉! 이제, 오시면, 히끅. 어, 어떡해요! 흐윽.”

공작저에 도착하니 이미 햇무리가 산등선 너머로 불쑥 떠오르고 있었다.

“미, 미안……. 세라, 울지 마. 응?”

하룻밤 사이에 세라의 낯빛이 초췌해졌다. 어쩐지 살이 쏙 빠진 것도 같고.

‘혹시라도 누가 들어올까 봐 침대 속에 베개를 겹쳐 놨어.’

그 모습이 짠하면서도 고맙고 귀여워서 웃음이 살짝 흘러나왔다.

“웃음이 나오세요?!”

“그래, 그래.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래도 안 다치고 돌아왔잖아?”

헤헤, 하고 웃자 세라가 버럭거렸다.

“그걸 말이라고요!”

“미안……, 세라.”

“절 괴롭, 히시려고. 흐윽. 제가 미워서, 이러시는 거예요??”

세라는 가슴 가득 들어찼던 울분에 말까지 더듬거렸다.

아델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세라. 내가 우리 세라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난 세라를 피를 나눈 친언니라고 생각하고 있어.”

“……정말요?”

“그럼! 맹세해!”

훌쩍훌쩍.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세라가 코를 팽, 풀며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히끅. 약, 약속하세요!”

“응, 응. 약속할게.”

높은 확률로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테지만, 세라를 달래기 위해 아델리아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아델리아가 세라의 등을 토닥거렸다.

‘세라 마음고생시킨 건 미안하지만, 덕분에 아이들도 구했고 바라크도 구했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빠랑 오빠가 관련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바라크처럼 예전 친우들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

그때마다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아니, 난 그렇게 못 해.’

그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아델리아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끝까지 그녀의 친우이자 가족이니까.

“아, 맞다.”

세라의 등을 두드려 주던 아델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선물 사 왔어, 세라.”

“선물이요?”

“응!”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장신구 가게를 찾았다. 이른 새벽이라 문을 열어 놓은 가게가 없었다.

포기하고 있던 찰나, 불을 밝힌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가게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좋은 품질의 장신구들이 있었다.

-운이 좋으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상 장신구들이 잔뜩 들어오는 날이라 일찍 문을 열었거든요!

가게 주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장신구들을 꺼내 놓았다.

아델리아는 가게에서 테오스와 데릭의 선물을 샀다. 그리고 마음고생 하고 있을 세라의 것까지.

‘정말 운이 좋았어. 하마터면 또 빈손으로 돌아올 뻔했잖아.’

길드장을 만나지 못해 의뢰도 맡기지 못했는데, 선물까지 사지 못했다면 꽤 억울했을 것이다.

아델리아는 세라의 왼쪽 가슴 위에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꽃 모양의 작고 귀여운 브로치였다. 다섯 개의 붉은 루비는 마치 별 모양의 꽃잎 같았다. 그리고 그 꽃잎 한가운데는 자그마한 은구슬이 수술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별 모양 꽃잎을 보고 만든 브로치래. 꽃말이 예뻐서 세라가 생각났어.”

훌쩍.

세라가 놀란 눈으로 브로치를 바라보다 물었다.

“꽃말이 뭔데요?”

“항상 사랑스러운.”

그러자 눈가의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던 세라가 아델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가씨.”

겨우 울음을 멈췄던 세라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어……. 울라고 한 소리는 아닌데.”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철이 드셨대! 세라가 감격에 소리쳤다.

“세라도 참.”

브로치 하나에 이렇게까지 감격하다니.

‘자주 사 줘야겠네.’

물론, 입막음용으로.

“나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고 있다는 거 알아, 세라. 그래도 나 버리면 안 돼. 알겠지?”

“제가 어떻게 아가씨를 버려요!”

“결혼도 내 허락받고 해.”

“……네?”

“특히 고향의 소꿉친구 같은 건 더더욱 안 돼.”

“…….”

세라가 눈물 젖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번엔 그 소꿉친구 놈이랑은 절대 결혼 안 시켜.’

아델리아가 세라를 향해 웃으면서도 어금니를 으드득 갈았다.

그때, 집사 일렌드가 아델리아의 방을 찾아왔다.

“아가씨,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테오스와 데릭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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