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집사 일렌드는 펑펑 울고 있는 세라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말을 이어 갔다.
“아가씨를 집무실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알았어, 일렌드.”
아델리아는 세라에게서 겨우 벗어난 뒤, 작은 가방을 하나 챙겼다. 그 가방 안에는 테오스와 데릭에게 줄 선물이 들어 있었다.
‘괜히 쑥스럽네.’
선물을 건네줄 상상만으로 어쩐지 목덜미에 열이 후끈 오르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하면서 전해 드려야 할까?’
이런 걸 준비해 본 적이 있었어야지.
조마조마한 마음 반, 두근거리는 마음 반으로 테오스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아델리아는 생각보다 무거운 분위기에 선물을 전해 주겠다던 생각을 잠시 미뤄야 했다.
“앉거라, 아델리아.”
“네…….”
뭐지? 황궁에 갔던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나?
아델리아는 소파로 걸어가 데릭의 곁에 앉았다.
“오빠도 안녕.”
“응, 아델. 밥은 잘 먹었고?”
“응.”
“잠도 일찍 잤고?”
“어, 응. 당연하지.”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자 테오스가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
“네, 아빠.”
“대신관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데오나 때문이에요?”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갔던 일은 다른 일 때문이었지만, 이왕 간 김에 데오나의 일로 신전을 찾았다고 했다.
“그 아이를 중독시킨 독이 무엇인지 알아냈다고 하더구나.”
“그게 뭐예요? 해독제는요? 구하기 쉬운 약이래요?”
“…….”
아델리아의 질문에 테오스는 잠시 침묵했다.
‘뭔데? 뭐야? 왜 이렇게 심각한 건데?’
그러자 데릭이 대신 입을 열었다.
“아델, 데오나는 ‘폴디아퀸’이란 독초에 중독된 거야.”
“폴디아퀸?”
“응.”
폴디아퀸이라……. 어디서 들어 봤는데.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아델리아가 손바닥을 짝 치며 말했다.
“그거 디크레드 영지에서 재배……, 되던 독, 초였…….”
아델리아의 말이 조금씩 느려졌다.
디크레드라고?!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도 디크레드 백작가에 대해 물어봤었는데.’
아델리아가 놀란 눈으로 테오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빠, 황태자 전하께서 디크레드 영지에 대해 물어보셨어요.”
“들었다.”
아델리아의 감이 말했다. 이 일은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고. 아델리아가 테오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혹시, 황제 폐하께서도 그 독에 중독되셨나요?”
그러자 테오스가 아닌 데릭이 놀라 말했다.
“너, 그걸 어떻게…….”
역시. 그래서 황태자가 디크레드 영지에 대해 물어봤던 거구나.
아델리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황제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면 분명 독살일 거라고 예상하고는 있었다.
‘황태자 전하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도, 아빠랑 오빠가 급히 입궁한 것도.’
모두 황제가 쓰러졌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빨라…….’
테오스와 데릭이 로샤크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데까지 2년.
그 사이에 황제가 죽어 버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1년 정도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제 펠슨을 찾아보려 했는데…….’
늦은 걸까.
‘아니지. 어떤 독초에 중독되었는지 알게 되었잖아.’
과거에는 황제가 죽을 때까지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독에 당했는지 먼저 알게 되었다. 그럼 해독제를 구할 수 있다. 해독제만 구하면 황제도 죽지 않을 것이다.
‘아직 기회는 있어. 거기에다 데오나까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아델리아가 말했다.
“그럼 어서 디크레드 영지로 가요! 가서 독초를 달라고 해야죠!”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게!
“…….”
“…….”
그러나 집무실에는 난데없이 적막이 찾아왔다.
“……왜들 그러세요? 한시가 급한 일인데.”
의아해하는 아델리아를 보며 테오스가 말했다.
“갈 수 없다.”
응? 갈 수 없어?
‘가지 않겠다.’가 아니라 ‘갈 수 없다.’라고?
옆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데릭이 말했다.
“아델, ……아버지는 디크레드 영지에 들어가실 수가 없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테오스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데릭은 말은 이어 갔다.
“디크레드 영지의 영주가.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잠시 테오스의 얼굴을 살피던 데릭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디크레드 영지에 에스테르 가문의 출입금지령을 내렸어.”
……뭐어?!
***
하늘 높이 태양이 떴다. 따사로운 정오의 하늘로 작은 구름들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루드가 황궁으로 돌아온 것은 그쯤이었다.
“그냥 돌려보내셨다고요?”
“응.”
루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창틀에 앉아 다리를 늘어트린 카르세스를 바라보았다.
‘충성 맹세를 받아 내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여서 입단속을 시키신 것도 아니고.’
이렇게 느슨한 분이 아니신데.
“신뢰하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아니. 오히려 이번 일로 의심이 더 커지면 커졌지, 의혹이 풀린 건 아니다.”
그에 루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죠. 일곱 살짜리 귀족 영애가 투기장에 잠입해서 경비들을 죄다 처리했다? 어디, 경비뿐입니까?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투기장 주인까지 협박해서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카르세스가 옅게 웃었다.
“그 영애의 보고서에 적힌 일 중에 말이 되는 게 있긴 했었던가.”
그건……. 루드가 보고서 내용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카르세스가 말을 이어 갔다.
“확실한 건 아이들을 구하려고 했다는 거지.”
그러다 루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빨간 머리 사내아이는?”
“보육원에 도착하는 동안에도 얌전했습니다. 말수가 적은 녀석이긴 했지만, 꽤 협조적으로 움직여 줬습니다.”
으음.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에스테르와는 무슨 관계지?”
“그게, 자신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루드는 이동하는 중간중간,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알아낸 거라고는 ‘바라크’라는 이름뿐이었다.
-여자아이요?
-그래, 마지막에 너랑 대화했던. 적갈색의 망토를 입고 있던 여자아이 말이야.
-아……. 그 아이는 저도 오늘 처음 보는 아이였어요. ……걔 이름은 뭐예요?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바라크라는 사내아이도 아델리아를 처음 본다고 했다.
“처음이라. ……글쎄. 그 자유로운 귀족 영애께서 아무 이유 없이 투기장을 뒤집어엎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잠깐 생각하던 카르세스가 루드에게 말했다.
“바라크라고 했던가. 그 사내아이에게 호위를 붙여. 혹시라도 에스테르 가문에서 사람을 보낼지 모르니까.”
“예, 전하.”
창틀에서 내려온 카르세스는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로는 그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잔뜩이었다.
그중 하나를 펼쳐 들며 물었다.
“투기장 주인은 죽었나?”
“아니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희가 상대했던 경비 몇을 빼고는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애가 상대한 사람 중에는 죽은 사람이 없다?”
“그렇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기가 막히는 실력이다.
그 누가 그것을 일곱 살 여자아이의 솜씨라고 보겠는가.
-멍청하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려면 어린아이 변장이 최고지!
-전하. 제가 저 녀석들의 집중을 깨트려 놨습니다. 이제 전하를 어린아이로 변장한 암살자라고 생각할 거예요!
우스갯소리처럼 들렸지만, 덕분에 경비들이 혼란스러워했다는 건 확실하다.
‘모순적이게도 정말 그렇게 되고 말았어.’
혹시 일이 커지게 되어 범인을 잡겠다고 나선다 해도, 아무도 어린아이의 소행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훈련받은 경비들을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켜 놓았다고.
“그러니까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먹힐 만도 하지.”
“예?”
“아니, 그런 게 있어.”
어쨌든 일은 더 이상 커지지 않을 것이다.
콧대 높고 자존심 강한 투기장 사장이 한 명에게 탈탈 털렸다는 소리를 직접 하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문제는 그 투기장이 숙부와 연관이 있다는 거지.’
그날 하루, 투기장이 손해 본 금액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다.
카르세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부에 대해 들어온 소식은 없고?”
“예, 아직 잠잠하다고 합니다.”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전해.”
“예, 전하.”
그때, 쾅쾅! 황태자의 집무실 문이 요란하게 울렸다.
“저, 전하! 폐하께서 위독하시다고 합니다!”
그에 카르세스가 서류를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드.”
카르세스는 망토를 어깨에 걸치며 루드를 불렀다.
“예, 전하.”
“황궁을 봉쇄한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기사단을 배치해.”
“예, 명 받들겠습니다.”
***
“아델, 정말 갈 거야?”
“응.”
아델리아는 가방을 준비해 옷가지들을 담고 있었다.
데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디크레드 영지 입구에서 들어가지도 못할 거야.”
디크레드 영지는 독초를 관리하는 영지인 만큼, 드나드는 사람들의 신분을 철저히 확인했다.
“에스테르 문양이 찍힌 신분증을 내밀면 당연히 입구에서 쫓겨날 거고, 그렇다고 신분증을 위조할 수도 없잖아.”
“…….”
“아델…….”
데릭의 설명에도 아델리아는 기어이 가방 하나를 꽉 채우고 허리를 폈다.
“에스테르 문양이 찍힌 신분증도, 위조된 신분증도 필요 없어.”
“그럼 어떻게 들어가려고?”
그러자 아델리아가 한 갈래로 땋아 두었던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며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이거.”
“…….”
“이 은발 머리카락이 날 할아버지 앞으로 이끌어 줄 거야.”
디크레드 백작가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이자.
‘엄마와 똑같이 닮은 이 머리카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