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출입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해도 시도는 해 봐야지.
‘황제 폐하도 그렇고 데오나까지.’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아델리아는 꽉꽉 눌러 담은 가방을 마차에 실은 뒤, 테오스의 집무실을 다시 찾았다.
이제 테오스의 허락만이 남았다.
뭐,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셔도 떠날 생각이지만.
“아버지, 아델리아를 좀 말려 주세요!”
데릭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테오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테오스는 묵묵했다.
“아버지!”
그러자 아델리아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만해, 오빠. 그런다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일단 서신을 보내 보자, 아델. 너 혼자 직접 가는 건 위험한 일이야.”
“서신은 안 돼.”
서신으로는 급박한 상황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쉬지도 않고 꼬박 이틀이나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승낙일지, 거절일지 모르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그럴 바에 직접 찾아가서 결판내는 게 낫지.’
빠르게 다녀오려면 마석으로 움직이는 마차가 필요한데…….
마석이 박힌 마차는 지금 황궁에 딱 한 대가 있었다.
‘말이라도 꺼내 봐야 하나.’
그 마차가 아니라면 아델리아는 일반 마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말보다 느린 일반 마차로는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만한 거리였다.
‘다녀오는 동안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때, 테오스가 말했다.
“내가 가겠다.”
아델리아와 데릭이 놀란 얼굴로 테오스를 쳐다보았다. 테오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너를 그곳에 혼자 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가겠다.”
아델리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테오스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직접 가신다고?’
으음. 잠깐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를 상상하던 아델리아의 입가로 뜻 모를 미소가 스몄다.
“아빠. 그건 더더욱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러자 테오스가 아델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째서……?”
……어째서라뇨.
보고 있지 않아도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것 같았다.
‘말수 적고 무뚝뚝한 아빠와 그런 아빠를 못마땅해하며 죽일 듯 바라보는 할아버지.’
아델리아는 할아버지인 오벨르 디크레드 백작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에 사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금지령을 내린 것만 해도, 대충 어떤 성격인지 짐작이 갔다.
‘이야기가 차분하게 진행될 리 없잖아.’
지금부터 시간과의 싸움이다. 최대한 빨리 해독제를 구해야 황제를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데오나까지.
이런 촉박한 상황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만나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는 게 나아.
아델리아는 각오한 듯 단단한 눈빛을 했다.
‘아빠가 기분 나쁘실 수 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날 막으실 거야.’
미안해요, 아빠.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딸을 빼앗아 간 미운 사위보다, 차라리 딸을 쏙 빼닮은 손녀가 낫지 않을까요?”
“…….”
“…….”
예상했던 적막이 찾아왔다.
이 순간, 테오스의 눈이 슬쩍 커지고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이 상황이 곤란한 것은 데릭 또한 마찬가지였다. 데릭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테오스의 표정을 흘깃거렸다.
아델리아가 테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디크레드 가문과 우리 가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정확히 몰라요. 하지만 손녀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
“게다가 전 성검도 가지고 있다고요.”
[에헴!]
아델리아가 걱정하지 말라며 마지막 말은 작게 속삭였다.
테오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테오스는 더 이상 아델리아를 말릴 여력이 없다는 걸 깨달은 데릭이 나섰다.
“하지만 아델. 너 혼자 가는 건 역시 위험…….”
“그럼 내가 같이 가면 되겠군.”
테오스와 데릭, 그리고 아델리아는 소리가 나는 문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전하……?”
황태자 카르세스가 집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감히 황태자를 막지 못한 집사 일렌드가 안절부절못한 채 식은땀을 흘렸다.
테오스가 미간을 설핏 구기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데릭과 아델리아도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카르세스는 인사를 받아 준 뒤 곧장 말을 이었다.
“상황이 급박하여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불쑥 찾아오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공작.”
황궁이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걸 테오스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급히 들이닥친 황태자를 보며 걱정이 깊어졌다.
“급박한 상황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테오스의 질문에 카르세스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이제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테오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에스테르 가문이 디크레드 영지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래서 영애를 혼자 보내는 게 어렵다면. ……내가 그 길을 동행하겠습니다, 공작.”
테오스가 조용한 시선으로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아델리아가 테오스와 카르세스를 번갈아 살폈다.
두 사람 사이로 어째서인지 위태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다 카르세스가 한숨을 내쉬며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독제를 먹는다고 해서 시력이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목숨은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꾸 없는 테오스를 향해 카르세스가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공작.”
카르세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협박도 아니고 애원도 아닌. 그저 부탁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테오스가 천천히 아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아 내린 딸아이는 오늘따라 제 어미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이레네아…….’
아델리아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를 부탁합니다, 전하.”
그제야 카르세스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결코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에스테르 공.”
아델리아 역시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내며 가슴을 쓸었다.
테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와! 이 마차가 그 마차죠? 마석으로 움직이는!”
공작저 정문 앞으로 나온 아델리아가 대기 중인 적갈색 마차를 보며 감탄했다. 마석을 사용하는 마차처럼 보이지 않는, 굉장히 수수하고 소박한 느낌의 마차였다.
‘이런 마차라면 눈에 잘 띄지도 않겠어.’
조용히 움직이는 데 이만한 마차는 없겠다며 아델리아가 속으로 흡족해했다.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시간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빨리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군마를 타면 마차보다 빠르게 갈 수 있지만…….
카르세스가 마차를 훑어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일곱 살 여자아이의 몸으로 군마는 무리지.’
아델리아가 마차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그때였다. 저택에서 뒤늦게 나온 테오스가 집사 일렌드와 함께 마차로 다가왔다.
“이걸 가지고 가거라.”
그러자 일렌드가 들고 있던 상자를 마차에 실었다.
“저게 뭐예요, 아빠?”
“빌렌드 산 포도주다.”
남부 빌렌드라는 영지에서 만들어진 포도주였다. 향이 그윽하고 맛 또한 깊어서 최고급 포도주로 통하는 술이었다.
테오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네 할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는 술이다.”
“…….”
“이거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이걸 보낸 의도는 알아차려 주실 거다.”
의도? 아델리아는 당장 테오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포도주가 할아버지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네, 아빠!”
아델리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
아델리아와 카르세스가 마차에 올랐다.
아델리아는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데릭이 말을 타고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기사단으로 복귀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
그가 고삐를 고쳐 잡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하게 해 줘. 마음 같아서는 디크레드 영지까지 같이 가고 싶다고.”
데릭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에스테르 공작령의 경계까지 마차를 호위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오빠가 같이 가 준다면 든든하겠지만…….’
할아버지인 오벨르 백작이 테오스와 똑같이 생긴 데릭을 보고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다 기사단 잘린다?”
“이 오라버니가 그 정도로 입지가 좁지 않아.”
마차 출발한다. 머리 넣어. 데릭이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
남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세스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맞춰 주느라 고생하는 중이죠.”
아델리아가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그러다 몸을 돌려 마차의 뒤쪽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멀어지는 공작저와 함께 아직도 마차를 응시하고 있는 테오스가 시야로 들어왔다.
‘아빠…….’
걱정을 거두지 못한 시선이, 먼 거리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여행이다! 이예에! 드디어 지긋지긋한 저택을 떠난다!]
‘…….’
먹먹해진 아델리아의 속도 모르고 리그하르트는 그저 여행 떠나는 기분을 내며 신이 나 있었다.
‘조용히 좀 해.’
[저택에서도 맨날 그 녀석들, 아니……. 아버님과 형님의 눈치를 보느라 입 다물고 있었는데 밖에 나와서도 조용히 해야 해요?!]
싫어요! 난 못 해! 차라리 날 녹여라! 리그하르트가 질색하며 파르르 진동했다.
‘릭! 진동은 안 돼!’
황태자 전하께서 있잖아!
[아, 맞다.]
죄송……. 리그하르트가 실수를 인정하며 급 조용해졌다.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카르세스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라도 청할 생각인 듯 보였다.
아델리아는 옆자리에 미리 두었던 바구니를 무릎 위로 올렸다.
“이 마차로는 얼마나 걸릴까요?”
바구니의 뚜껑을 열며 카르세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가는 데 하루, 오는 데 하루. 왕복 이틀이면 될 거야. 디크레드 백작과 만나 얼마나 이야기가 빨리 끝이 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역시 빠르네요.”
아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구니 안을 휘적거렸다.
“됐다.” 하고 짧게 중얼거리던 아델리아가 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카르세스 앞으로 내밀었다.
“짠!”
“…….”
카르세스가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보자, 아델리아가 눈매를 접으며 햇살처럼 웃었다.
“푸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