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푸딩……?”
카르세스의 한쪽 눈매가 일그러졌다.
어쩐지, 타면서부터 달콤한 냄새가 나더라니.
아델리아가 푸딩이 담긴 접시를 쑥 내밀자, 카르세스가 얼떨결에 그 접시를 받았다.
“어차피 긴 여정이 될 텐데 입이라도 즐거워야죠!”
“…….”
그리고는 카르세스의 다른 손에 스푼을 쥐여 주었다.
“드셔 보세요, 전하.”
“좋아하지 않아.”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아빠도 이 푸딩은 잘 드세요. 오빠도 그렇고.”
“……그 에스테르 공작이?”
“네!”
단 걸 싫어하던 사람들도 정신을 놓고 퍼먹게 되는 마성의 푸딩이라고 아델리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성의, 푸딩……?
카르세스는 자신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시럽을 뒤집어쓴 매끈한 푸딩의 표면이 반질거렸다. 마차의 진동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꽤 탄력적이었다.
좁은 공간이었던 탓에 푸딩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랏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역시 난…….”
못 먹겠다고 말하려던 그 순간.
카르세스는 제 앞에서 푸딩 하나를 와구와구 먹어 치우는 귀족 영애의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귀족의 체면이나 품격 따위 집어던진, 맛있는 음식 앞에서 본능적으로 덤벼드는 모양새였다.
맛있게도 먹네.
‘저렇게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보던 카르세스는 황홀하다는 듯 미소 짓는 아델리아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특이하단 말이지.”
“욕이에요?”
“칭찬.”
치. 괴팍하다느니, 괴짜라느니. 그런 말이야 종종 들어 왔다.
‘특이하단 말은 또 첨이네.’
아델리아가 입속에 푸딩을 머금은 채, 카르세스를 향해 어서 먹어 보라며 스푼으로 떠먹는 시늉을 했다.
그에 카르세스가 다시 푸딩을 내려다보았다.
황궁에서조차 음식을 먹지 못하던 카르세스였다. 남이 주는 음식에 대한 불신이 깊었던 탓이다.
게다가 디저트를 즐겨 먹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아델리아가 먹는 걸 보고 있노라니 자신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델리아를 한 번 쳐다본 뒤 스푼으로 푸딩을 떴다.
그리고는 스푼에 볼록하게 뜬 푸딩을 입속으로 천천히 넣었다.
음, 카르세스는 입속의 낯선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어쩌면 곧장 뱉어 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도하게 달콤한 맛이 그런 잡생각마저 흩트려 놓았다.
카르세스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어때요? 맛있어요? 먹을 만하죠? 아니, 진짜 맛있죠?’
아델리아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수많은 질문을 담고 있었다.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 버린 푸딩을 꿀꺽 삼킨 카르세스가 결국 또 웃음을 터트렸다.
“……맛있어.”
“그렇죠? 거봐요. 전 거짓말 안 한다고요.”
아델리아가 남은 푸딩을 입속으로 넣으며 말갛게 웃었다.
***
마차가 에스테르 영지 경계에서 한 번 멈춰 섰다.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마차에서 내려 호위로 따라왔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아델.”
데릭이 말에서 내려와 아델리아 앞으로 왔다.
“정말 괜찮겠어?”
“응. 괜찮아.”
아델리아는 잠시 카르세스를 흘깃하더니, 데릭의 손을 잡고 조금 먼 곳으로 걸어갔다.
“왜 그래, 아델?”
“오빠.”
“응?”
“나 도와주기로 했었지.”
“그랬었지.”
“그럼, 이거.”
아델리아는 반듯하게 접어 놓은 쪽지를 데릭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거기에 적힌 사람 좀 찾아 줘. 내가 돌아오면 바로 찾아갈 수 있게.”
“누군데?”
“해독제를 만들어 줄 사람.”
“…….”
아델리아는 운이 좋아 폴디아퀸을 많이 구한다 해도, 아무에게나 해독제 제조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를 오랫동안 속이며 약을 먹인 사람이 주치의라고 했으니, 지금 황제의 곁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셈이다.
“꼭. 꼭 찾아 줘야 해. 알겠지?”
“응. 알아볼게.”
아델리아는 데릭의 확답을 듣고 난 뒤, 그제야 안도했다.
그리고 작은 가방 하나를 또 내밀었다.
토끼 모양을 한 분홍색 털 가방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 가방을 건네받은 데릭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또 뭐야?”
그렇지 않아도 아까 집무실을 들어올 때부터 들고 있던 가방이라,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크흠, 아델리아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내리며 작게 대답했다.
“……물이야.”
“응? 뭐라고, 아델?”
아, 거참.
아델리아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 아빠랑 오빠 주려고 산 선물이라고!”
“…….”
“원래 직접 전해 드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됐잖아. 그래서 전해 드릴 타이밍을 놓쳤어. 오빠가 아빠한테 전해 줘. 그리고 오빠 거도 안에 있으니까, 뭐……. 하고 다니든지, 말든지.”
“…….”
휙, 아델리아는 차마 데릭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곧장 몸을 돌렸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데릭이 뒤늦게 아델리아의 뒤를 쫓아왔다.
“……고마워, 아델.”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라서.”
“정말, 정말 고마워.”
“알겠어.”
“진짜 고마워.”
“알겠다니까.”
아델리아가 코끝을 쓱 훔치며 작게 미소 지었다.
데릭은 아델리아와 다시 마차로 돌아와 황태자에게 인사했다.
“아델리아를 부탁드립니다.”
뭔가 딸아이를 시집보내는 아버지가 된 것처럼 어감이 묘하게 불쾌했지만, 당장 부탁할 사람은 황태자밖에 없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스테르 경. 나 역시 가족이 걸린 일이니까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데릭은 황태자의 대답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쪼록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고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카르세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마차에 올랐다.
“다녀올게, 오빠.”
“응, 조심해.”
“알았어!”
아델리아도 카르세스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황태자의 마차는 곧장 출발했다.
서서히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데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우리 아델 좀 지켜 주세요.’
몸이든, 마음이든.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
공작령을 벗어난 마차는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쉬지도 않고 달리던 마차는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멈춰 섰다.
“내리지.”
먼저 마차에서 내린 카르세스가 마차 안 아델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
뭐지? 잡으라는 건가?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며 옛 기억을 빠르게 뒤적거렸다.
‘다른 영애들은 어쨌더라?’
가끔 연회장을 스쳐 지나가다 마차에서 내리는 영애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파트너로 따라왔던 사내들이 마차에서 먼저 내려 손을 내밀던 게 기억이 났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이렇게 했던 거 같은데.
아델리아는 카르세스가 내민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며 말했다.
“어머나, ……자상하신 분이로군요.”
여느 귀족 영애들처럼 나긋해진 아델리아의 말투에 카르세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런 말투 관둬. 그대답지 않으니까.”
“…….”
치. 뭐가 나답지 않다는 거야? 다른 영애들이 하던 것과 똑같이 했는데!
[푸항항항!]
리그하르트도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오모나아. 자상하신 분이로군용!]
푸헹헹헹! 급기야 리그하르트는 아델리아를 따라 하기까지 했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마차에서 내리고 나니, 작게 꾸려진 야영지가 시야로 들어왔다.
루드와 아스틴이 먼저 도착해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아니었어요?”
“마차를 타고 장거리 이동은 처음이라며.”
카르세스는 아까 데릭한테서 들었다며 말을 덧붙였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급하잖아요? 그냥 밤새워서 달려도 되는데.”
“됐어. 저 마차 덕분에 시일을 많이 단축했으니 하룻밤 정도는 괜찮아.”
“…….”
그러니까 지금, 전하께서 날 걱정하느라 야영까지 준비했다는 거야?
‘웬일이래.’
맨날 의심과 경계만 하던 사람이?
그러한 생각을 아델리아의 표정에서 읽었는지, 카르세스가 옅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디크레드에 도착하면 영애가 가장 바빠질 테니까.”
“아.”
그럼 그렇지.
폴디아퀸을 구하는 데 필요한 존재니까 지치지 말라고 신경 써 주는 거였구나.
[아니, 그럼 뭘 바라셨는데요?]
‘아니, 뭐……. 이제 그대를 의심하지 않아, 라든가. 이젠 그대가 내 사람이라는 걸 믿어, 라든가?’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혀를 찼다. 쯔쯔.
[욕심이 과하셨네요.]
‘…….’
시끄러……. 리그하르트의 말에 뜨끔한 아델리아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나무에 묶인 군마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군마가 더 빠르네.’
카르세스의 수하들은 마차가 아닌 군마를 타고 앞서 달려나갔다.
마석으로 움직이는 마차라고 해도 기동성으로는 군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우리 울프만 있었어도 나도 말을 타는 건데.’
울프는 아델리아와 함께 전장을 뛰었던 그녀의 애마였다.
-말에게 울프라는 이름이라니. 악취미로군.
과거, 울프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카르세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전장 위를 늑대보다 용맹하고 매섭게 달리는 울프를 보며 이름값 제대로 하는 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누님 체격으로 군마는 무리일 텐데요?]
아마 울프도 못 타실 텐데? 리그하르트의 말에 아델리아가 아, 짧게 탄식했다.
‘그렇네? 울프도 군마였지.’
일곱 살의 몸으로 우람한 체격의 군마를 타고 달릴 순 없으니까.
쩝, 아델리아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탁, 타닥, 타닥.
장작불이 지펴졌다.
아스틴이 장작을 주워 와 불길을 키우고 루드는 저녁 식사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아델리아는 대충 다듬어 놓은 나무 밑동을 의자 삼아 앉았다.
고요한 숲속의 밤. 바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전우들과 함께 야영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녀석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그들도 지금은 자신처럼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겠지.
“영애, 받아.”
카르세스가 투박한 나무 그릇을 건넸다.
“귀족 영애에게 이런 걸 먹여 미안하긴 한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전장에서는 이런 걸 먹지도 못하는 날이 얼마나 많.”
아델리아가 말을 하다 말고 합, 입을 급히 다물었다.
“많?”
카르세스가 더 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잠시 뜸을 들이던 아델리아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많, ……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영애의 아버지가 전쟁 영웅이니 그런 이야기는 질리도록 들었겠어.”
“그렇죠.”
사실은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었지만.
크흠. 아델리아는 멀건 수프가 든 그릇을 받고 후루룩 마시듯 먹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안 드세요?”
“응, 난 생각 없어.”
“에이, 그래도 좀 드시죠?”
갈 길이 먼데, 배라도 든든해야지.
그러자 카르세스가 엷게 웃었다.
“영애나 많이 먹어.”
예전에는 뭐든 잘 드셨는데, 어릴 적에는 편식하셨나 보네.
“그런데도 어떻게 그토록 장대하게 자라셨나 몰라.”
“응?”
“아닙니다. 그렇게 편식하시다가는 키가 안 크실 거예요. 근육도 안 붙을 거고, 그럼 장검을 들지도 못하는 사내가 되실 거고요.”
“키 큰 사람이 영애의 취향인가?”
“취향이요?”
아델리아가 고개를 기울이자, 카르세스가 웃으며 루드에게 손짓했다.
“그럼 먹어야겠네. 영애의 취향에 맞춰 크려면 말이지.”
“……왜 제 취향에 맞추시는 건데요?”
“배신하지 말라고.”
“제가 외모에 홀딱 넘어가는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으면 고민은 해 보겠지.”
“음, 그건…….”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할 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카르세스의 호위를 맡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외모 때문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전하께서 날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을 이야기지만.’
카르세스는 루드에게 수프가 든 그릇을 건네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숲속의 첫날 밤이 깊어졌다.
구룩, 구루룩—
깊어진 숲속의 밤.
달빛이 은은하게 새어 들어오는 어두운 숲 한가운데.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호위로 보이는 기사 둘이 먼저 야영 장소를 물색하더군요.”
“마차에는?”
“귀족 아이들로 보였습니다. 후드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남매로 보이는 아이 둘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이들만 마차에 타고 있었다?”
“뭐, 부모를 일찍 잃어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으음, 보고를 듣고 있던 사내가 침음했다.
“마차 안에는 어떤 물건이 있는지 확인은 했나?”
“검은 커튼이 처져 있어서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털어 보면 알게 되겠지.”
“지금 움직일까요? 모두 잠이 든 것 같았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린다.”
“예, 형님.”
그때였다.
“아저씨들은 누구예요?”
사내들 뒤로 앳되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면을 쓴 사내들이 순식간에 검을 빼 들었다.
“누,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