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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39)화 (39/161)

39화

그러다 자신의 반도 안 되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긴장을 풀었다.

“뭐야. 어린애잖아?”

“저 마차에 타고 있던 애 중 하나인 거 같은데.”

“그럼 쟤를 인질로 잡자.”

“그냥 바로 죽이는 게 낫지 않겠어?”

그때, 그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잠깐. ……저 아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저 아이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떠들어 대던 사내들이 입을 다물고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사내가 물었다.

“너, 보통 아이가 아니로군.”

[오, 눈썰미가 제법인 녀석도 있었네요.]

오합지졸인 줄 알았는데, 리그하르트가 키득거렸다.

아델리아는 후드를 코끝까지 끌어내린 뒤, 건강해 보이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게, 쟤는 눈치 빠르네.”

그녀는 천진하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보자, 소리 없이 움직이는 걸 보면 암살에 최적화된 집단인 거 같고.”

아델리아가 사내들의 허리춤을 흘깃거렸다.

“장검 하나에 단검 세 개라.”

“…….”

“너희.”

아델리아가 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에이블화이트?”

“……!”

그러자 사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허! 형님! 쟤가 우릴 아는데요?”

“닥쳐, 새끼야!”

멍청이들.

[멍청이들!]

크히히힝! 리그하르트가 웃겨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블화이트는 그리젤 용병단과 마찬가지로 꽤 긴 역사를 가진 용병단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주로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그리젤 용병단과는 달리, 에이블화이트는 의뢰보다 제 몸집을 키우기 위해 움직였다.

‘의뢰도 세력을 키우기 위해 받는 거니까 크게 다를 건 없지만.’

하아아암. 아델리아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저씨들. 나 일찍 자야 하거든? 그러니까 한꺼번에 덤벼, 응?”

“지금 쟤가 뭐라는 거냐? 덤비라고?”

“…….”

아델리아가 단검을 꺼냈다. 단검을 검집에서 빼내자, 검날의 표면으로 잔잔한 황금빛 오러가 일렁거렸다.

“혀, 형님! 저거 오러가 아닙니까? 어째서……. 오러가 저런 어린아이한테…….”

그러자 형님이라 불린 사내가 매서운 눈빛을 하고 말했다.

“변장 마법이다.”

엥? 아델리아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들어 본 적이 있다. 고위 마법사 중에서 외형을 바꿔 주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다고.”

얼씨구?

저건 내가 쳐야 할 대산데 왜 자기가 해?

아델리아가 먼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자기네들끼리 퍼즐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첫 번째 퍼즐부터 말도 안 되는 곳에 놓긴 했지만.

하지만,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나?

“그렇다.”

아델리아가 묵직해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알아보는 자가 없을 줄 알았더니, 개중에도 똑똑한 녀석이 하나 있었군.”

후후후. 아델리아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카르세스가 입가를 손으로 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루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대체 저게 무슨 말입니까?”

“특이한 설정을 잡은 거지. 저 어린 영애께서.”

“저희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아니, 조금 더 지켜봐.”

“오러를 알아볼 만큼 실력자들입니다. 저러다 에스테르 영애께서 오러를 쓴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합니까?”

“대기했다가 달아나는 자들은 우리가 처리한다.”

“예, 전하.”

간단히 저녁을 먹고 막사로 돌아가 있던 카르세스는 야영지 주위로 몰려드는 기척을 느꼈다.

루드와 아스틴을 데리고 그 기척을 찾아왔더니, 그들보다 먼저 도착해 암살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아델리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러를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저 사내들의 실력을 우습게 볼 수 없다는 뜻일 터.’

설마, 죽여서 입을 닫게 할 생각인 건가.

그 순간, 째앵—!

쇠붙이가 빠르게 치고 빠지는 소리가 숲을 울렸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에 사내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전하, 저건 황실 기사단의 검술이 아닙니다.”

“…….”

루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드는 아델리아와 카르세스의 대련을 본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듯하고 정석대로의 검술을 사용했다.

대체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으면 저 검술이 습관처럼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걸까.

그런 생각에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모습은…….

“저, 저게 지금 뭡니까?”

아델리아가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 본 아스틴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 얌전 떨며 앉아 있던 귀족 영애가 맞아?

물론, 에스테르 영애가 황태자 전하의 검술 동기라는 것은 루드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괴물이라고는 안 했었잖아.”

한동안 사내들 사이에서는 적막이 흘렀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검날의 마찰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다, 아스틴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런 움직임은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 보는 검술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건장한 사내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감탄을 넘어 경악의 수준이었다.

반듯하고 정직했던 황실 기사단의 검술과는 달리, 사납고 난폭하며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빈틈이 너무 많아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 빈틈이 전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아스틴은 한껏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기사의 검이 아닙니다.”

“우리 영애께서는 암살에도 능하신 모양인데.”

그러자 루드가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일곱 살이요?”

“그래, 저 일곱 살이.”

한동안 일방적인 공격은 계속되었다.

나뭇잎을 흔들고 불어온 바람에 피 냄새가 짙게 뱄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렀다.

정확히 일곱 구의 시체가 숲속 길 위로 나뒹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숲속 한가운데, 우뚝 서서 숨을 고르던 아델리아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카르세스는 멀어지는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곧 돌아올 거다. 이미 우리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알고 있는 것 같고.”

마차로 돌아온 카르세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간이침대 위로 걸터앉은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오랜 세월 그 일을 해 온 사람처럼.

아무리 어릴 적부터 검을 잡았다 한들, 그 날카로운 움직임과 잔혹한 판단력은 일곱 살의 것이라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천재. 단순히 천재라는 말로도 그 모든 것이 이해되는 수준은 진즉에 넘어섰다.

뭘까. 넌 대체 뭐지?

***

아델리아는 근처 물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을 발견하고 피가 묻은 손을 씻기 시작했다.

“후우…….”

차가운 물 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손 전체를 붉게 물들인 기분 나쁜 액체들을 씻어 내며 투덜거렸다.

‘저택에서 떠나온 첫날부터 이게 뭐야!’

[황태자가 보고 있었던 건 아시죠?]

‘응. 알아.’

[의심이 더 커질 거예요.]

‘어쩔 수 없지, 뭐.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시간을 더 빼앗겼을 거야.’

투기장에서는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새벽부터 다시 마차는 움직여야 했다.

평소라면 암살자들을 잡아다가 누가 보냈는지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해독제를 빠르게 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게다가 에이블화이트는 입이 무거워. 좀 멍청한 구석은 있는데, 의뢰인이 누구인지 밝힐 정도로 의리가 없진 않아.’

어차피 붙잡아 고문해 봤자, 시간만 빼앗길 거라 판단했다.

그랬기에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빠르게 처리하고 이곳을 떠난다.’

피부에 묻은 피를 모두 씻어 낸 아델리아가 마차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 새 옷으로 갈아입고서 황태자가 머무는 막사로 향했다.

“전하? 주무세요?”

“들어와.”

그리고 대답과 동시에 막사 안에서 불이 켜졌다.

아델리아는 막사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근처에 쥐새끼들이 많아서.”

카르세스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치, 좀 도와주시지.”

“몸에 피 묻는 걸 안 좋아해.”

“저는 뭐 좋아하나요?”

“즐기는 것 같긴 하던데.”

“…….”

카르세스가 옅게 웃었다.

아델리아는 휴,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올 거고 시체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럼 근처에 있는 우리가 공격당할 게 분명하고요.”

“그래.”

“……그러자고요?”

“그러자며.”

“…….”

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 거지?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조금 전 상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카르세스는 궁금해하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그렇겠죠.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끈질기게 물어볼걸요?]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겠다며 리그하르트가 충고했다.

‘그렇겠지? 하긴,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이니까.’

카르세스가 몸을 일으켜 천막 입구로 걸어가며 말했다.

“뭐 해? 이동해야 한다며.”

“아, 네! 갑니다!”

***

날이 밝기 전에 마차를 움직인 덕분인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디크레드 영지 입구에 도착했다.

“저긴가 봐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요.”

디크레드 영지는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일정한 크기의 돌을 쌓아 올려, 견고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우리도 줄을 서야겠죠?”

“그래야지.”

카르세스가 묵묵히 마차에서 내렸다. 아델리아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역시,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러자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맞아.”

사실 황태자라는 것을 내세우면 입구 정도는 쉽게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신분을 숨겨야만 했다.

“지금 황궁은 폐쇄되어 있어.”

“폐하의 건강 때문인가요?”

“그렇지. 나는 공식적으로 그 황궁 안에 있고. 그러니 내가 다른 곳에서 신분을 드러낼 수는 없어.”

어? 그럼 지난밤에 암살자들은 뭐지?

‘황태자 전하를 노리고 온 게 아니었나?’

[누님이 투기장을 털었다는 게 들통난 거 아닐까요?!]

‘털다니, 누가!’

불쌍한 아이들을 구한 거지.

[그거나, 그거나…….]

에이블화이트가 단순히 도적질을 하려는 건 아닐 거고…….

아델리아가 의문으로 고민하던 사이, 아델리아 일행의 신분 확인 순서가 되었다.

“이제 영애 차례야.”

“빠르게 처리하고 올 테니 여기에서 기다리세요.”

“기대하지.”

아델리아가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기사 앞으로 걸어갔다.

기사가 아델리아의 뒤쪽을 힐끔거리더니 말했다.

“뒤쪽도 일행입니까?”

“네.”

“방문 목적을 적어 주시고 신분패를 보여 주시죠.”

기사의 요구에 아델리아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 고이 간직해 왔던 보물을 꺼내듯,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의 후드를 천천히 뒤로 넘겼다.

아침 햇살이 따사로웠다. 그 햇살 아래, 천연에 가까운 눈부신 은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영지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던 다른 이들의 시선도, 신분패를 달라며 손을 뻗었던 기사의 시선도 모두 그 은빛 머리카락에 닿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제가 바로 그 디크레드 백작가의 하나뿐인 손녀…….”

“뭐 하십니까? 신분패 달라니까요?”

“……네?”

[누님, 뭔가 이상한데요?]

기사가 심드렁한 얼굴로 손바닥을 다시 내밀었다.

“신분패.”

“아니, 그러니까 내 머리카락요. 은색. 은빛. 이거 보고도 모르겠어요?”

“그게 뭐 어쨌다고요? 신분패 없습니까? 신분패 없으면 통과할 수 없습니다. 다음!”

“아, 아니! 잠깐만!”

“뒤에 사람들 줄 서서 기다리는 거 안 보입니까! 방해하지 마십시오, 다음!”

“아니, 이 머리카락을 못 알아본다고? 이걸? 이거 몰라? 어?!”

대체 이걸 어떻게 못 알아봐?! 디크레드 가문 기사단 교육 수준이 뭐 이래! 영 글러 먹었네!

영주 나오라 그래! 어?!

아델리아가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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