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디크레드 백작저의 지하 감옥.
“좋은 구경 했어, 영애.”
“하하…….”
아델리아가 힘없이 웃었다.
아델리아 일행은 입구에서 난동을 피운 죄로 백작저 감옥까지 이송되었다.
“그래도 최단 시간에 백작저까지 왔으니까요. 계획대로예요.”
아델리아는 계획대로 되었다는 말과는 달리 어금니를 꽉 힘주어 씹었다.
“처음부터 디크레드 백작이 할아버지라는 말은 왜 안 했어?”
“디크레드 영지에서 이 머리카락을 못 알아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실상, 난동 마지막쯤에는 에스테르 공작가의 문양이 찍힌 신분패를 보여 줬다.
-이것 봐요! 에스테르 공작가라니까?! 신분패 여기 있잖아!
-이것들이 위조된 신분패까지 들고 다닌다! 잡아넣어!
그것이 더 화근이 될 줄은 몰랐지만.
철창을 거머쥔 아델리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가 막혀. 어떻게 내 머리카락을 못 알아봐?”
다른 곳도 아니고 이 디크레드 영지에서?!
음, 카르세스가 팔짱을 끼며 분노한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긴, 그 점이 이상하긴 했지.’
은빛 머리카락은 디크레드 백작가의 상징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영애의 난동을 막아선 기사들도, 우리를 이곳까지 데려온 기사들도 모두 디크레드 백작가의 문양이 아닌, 처음 보는 문양의 갑옷을 입고 있었어.”
“난동이라뇨, 계획의 일부였다니까요?”
아델리아가 투덜거리면서도 카르세스의 말에 동의했다.
“다른 가문의 사병들인 거 같았어요.”
감옥 여기저기를 훑어보고 온 루드가 말했다.
“철창을 부수고 나가는 방법 외에는 출구가 없어 보입니다.”
루드의 말에 이어 아스틴이 조용히 물었다.
“부술까요?”
그러자 카르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나가는 길이 외길이라 기사들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다. 일단 누구라도 내려올 테니 기다려 보지.”
“네, 전하.”
그때, 감옥 복도를 울리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나 봐요.”
아델리아가 철창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뚜벅뚜벅, 차가운 돌바닥 위를 걸어오는 소리는 이내 아델리아 일행이 갇힌 감옥 앞에서 멈췄다.
“흐음, 이 녀석들인가?”
“그렇습니다, 펠로체 님.”
펠로체? 아델리아가 눈앞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굉장히 거만한 눈빛의 사내였다.
조금은 과하다 싶은 정도로 호화로운 의복을 갖춰 입고, 손가락마다 큼직한 보석 알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었다.
사내는 인중 양옆으로 기른 가느다란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반쯤 내리깐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훑었다.
“아델리아 에스테르? 네가 감히 에스테르 공작가를 사칭하고 영지로 들어오려 했다던 그 요망한 계집이냐?”
“뭐……?”
사칭? 요망? 계에집?
아델리아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겨우 이성을 부여잡고 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십니까?”
“나는 이 디크레드 영지의…….”
“영주이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나는 이 디크레드 영지의—.”
“영주님이 아니라고요? 영주님이 아니라면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영주님을 불러 주시죠.”
아델리아가 팔짱을 끼며 몸을 돌렸다. 어린아이가 말을 톡톡 잘라먹자, 펠로체는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이! 이 못 배워 처먹은 것! 내가 누군 줄 알고!
아델리아가 고개만 슬쩍 돌려 펠로체를 쳐다보았다.
“영주님은 아니시라면서요?”
“이 내가 영주님의 사촌 형님의 첫째 아들인 펠로체 그리프타 자작이시다!”
사촌 형님의 첫째 아들?
“아아, 방계?”
뭐야, 그쯤 되면 거의 남 아닌가? 하고 아델리아가 키득거렸다.
“뭐, 뭣이?!”
그러자 거만하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감히, 에스테르 가문을 사칭하고 영지에 숨어들려 한 주제에!”
“사칭이라니.”
아델리아가 펠로체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섰다.
불길 같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펠로체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신분패를 조사해 봤을 거 아닌가? 그럼 그 신분패가 진짜라는 것도 알아냈을 거고.”
그러자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델리아가 펠로체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이고, 이 영지의 영주께서 내 할아버지라는 게 명확한데 감히 방계 따위가 날 여기다 가둬?!”
펠로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또르르 흘렀다. 그러나 펠로체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치켜들고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아가야. 네가 진짜 에스테르라고 해도 상관없단다.”
사내는 광기 어린 눈을 하며 양팔을 옆으로 벌렸다.
“이곳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이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부조리를 고발하러 온 영지민의 사정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말 한마디면 그것이 정의가 되고 진실이 된다는 말이지!”
실상, 저 계집아이 일행이 디크레드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내 수하들밖에 모른다.
“그러니 진짜 에스테르의 영애께서 디크레드로 향하던 도중 변을 당했는지 어땠는지, 알 게 뭐야!”
여기서 죽여 버리고 디크레드에는 도착한 적이 없다, 발뺌하면 그만이지!
말을 이어 가며 서서히 자신감을 얻은 펠로체가 철창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며 아델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파충류처럼 반질거리는 회색 눈동자가 번득였다.
“……이제야 네가 처한 상황이 어떤 건지 알겠느냐?”
“쓰레기네.”
“음.”
카르세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그게 영주님의 뜻은 아닌 것 같고. ……우리 할아버지 어쨌어?”
“할아버지? 아아, 디크레드 백작?”
사내가 이죽거리며 웃었다.
“디크레드 백작께서는 죽은 딸의 망령을 붙잡고 미쳐 버린 백작 부인을 돌보느라 영지를 돌볼 겨를도 없지.”
죽은 딸의 망령…….
감히 내 엄마를…….
아델리아가 또 한 걸음 철창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작고 뽀얀 손을 뻗어 거칠고 새카만 철창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아델리아는 펠로체를 쏘아보며 어금니를 까득까득 짓이겼다.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정신없는 틈을 이용해 영지를 개판으로 만들어 놨다는 거네?”
클클클클, 펠로체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 한들, 그 안에 갇힌 네 녀석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많아.”
“뭐?”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다고!”
철창을 잡고 있던 아델리아의 두 손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그러자 지하 감옥 전체가 뒤흔들렸다.
“응?”
펠로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뒤에 서 있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그, 저, 저희도 잘…….”
기사들도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펠로체가 아델리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설마, 네 짓이냐!”
“뭘 할 수 있는지 물었잖아. 잘 봐 둬.”
그러자 사내와 사내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델리아가 잡고 있던 철창이 강렬한 황금빛에 휩싸였다.
“무, 무슨 짓을—!”
펠로체는 본능적으로 저 아이를 막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뎅강— 철창이 잘렸다.
“히익!”
“헉!”
마치 톱으로 썰리기라도 한 듯 절단면이 깔끔했다.
“괴, 괴물……!”
컥!
괴물이라 했던 기사가 날아온 철창에 맞고 뒤로 나자빠졌다.
“어디, 숙녀더러 괴물이래.”
아델리아는 남은 철창 막대 하나를 손바닥 위로 투욱, 툭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자, 이번에는 누구 차례?”
으아악—!
괴물? 괴에물? 더 해 봐! 더! 이젠 내가 뭐로 보이냐? 아직도 괴물이야?!
아델리아는 철창 막대를 무기처럼 이용하여 기사들과 펠로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세스가 나직이 읊조렸다.
“가장 좋은 무기는 그 순간, 자신이 들고 있는 그 물건이라 했던가.”
“예?”
“자신이 한 말을 실행에 옮길 줄 아는 사람이군.”
“…….”
카르세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경고했다.
“너희들도 입조심해. 괴물이라는 말 함부로 하지 말고.”
그에 뜨끔한 아스틴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
디크레드 백작저 2층.
오고 가는 고용인들조차 몇 남지 않아, 백작저는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점심시간부터 저택이 조금 소란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오벨르 백작은 자신의 아내를 돌보는 일로도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내 아가……. 내, 내 아가.”
침대에 누워 무기력하게 입술만 움찔거리던 백작 부인을 바라보며 오벨르가 눈꼬리를 내렸다.
“그래요, 메릴다. 이 약부터 먹고 우리 아가를 찾으러 갑시다, 응?”
“아가……. 우리 아가…….”
“메릴다. 약을 먹지 않으면 아가를 만나기도 전에 그대가 쓰러질 거요.”
“보물을 찾아야 하는데……. 아가에게 줄 보물을 찾아야 하는데…….”
오벨르가 허공을 휘젓는 메릴다의 손을 꼭 붙잡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약을 먹읍시다. 그리고 기운 차려서 보물을 함께 찾으러 가십시다.”
오벨르 백작이 약을 뜬 스푼을 메릴다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나 주르르— 메릴다는 이제 약을 삼킬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콰앙—!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약그릇을 들고 있던 오벨르가 놀라 몸을 돌렸다.
“이게 무슨 짓…….”
활짝 열린 문으로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그 아이가 은빛 머리카락을 나풀거린 채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