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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41)화 (41/161)

41화

아델리아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할아버지. 제가 좀 급해서요.”

“…….”

할아버지라고……?

오벨르는 걸어오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투명하고 깨끗해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 눈동자 색은 자신의 딸과는 달랐지만, 저 머리카락과 이목구비는 영락없이 제 딸아이를 닮아 있었다.

“이, 이레네…….”

이레네아. 오벨르가 그 이름을 모두 부르기도 전에 침대에 누워 있던 백작 부인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아가!”

메릴다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아델리아에게로 달려갔다.

조금 전까지 약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던 사람답지 않게, 빠르고 강인한 걸음이었다.

“왔구나!”

“억!”

아델리아를 힘껏 끌어안은 메릴다가 흐느끼며 말했다.

“올 줄 알았다!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

“왜 이제 온 거니, 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아델리아를 끌어안은 백작 부인의 팔이 잘게 떨렸다. 아델리아는 본능적으로 이 노부인이 자신의 할머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흡사한 은발과 엄마의 사진에서 보았던 푸른색의 눈동자가 닮아 있었다.

‘할머니구나…….’

아델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고 메릴다의 등을 천천히 토닥거렸다.

‘아……. 할머니는 지금 날 엄마라고 착각하고 계셔.’

얼마나 그리우셨으면…….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조금 늦었어요.”

“오래 기다렸단다……. 다들 너는 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어. 네가 올 거라고 믿었어.”

할머니…….

메릴다는 한동안 아델리아를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아가, 아가…….

아델리아를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할 수 없었다.

***

울다 지친 메릴다가 잠에 빠져들고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오벨르 백작과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전하께서 직접 오실 줄 몰랐습니다.”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백작.”

그리고 오벨르가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많이 깃든 시선이었다.

다정하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생판 남을 보듯 무정하다고도 할 수 없는.

“아델리아, ……에스테르.”

“네, 할아버지.”

아델리아는 생긋 웃어 보였다.

어차피 아델리아 역시 할아버지와 손녀의 애틋한 만남을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얻을 것을 얻고 나면 다시 볼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우리 가문이 들어오지 못하게 출입금지령을 내리셨잖아.’

사실 따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엄마가 돌아가신 건 가슴 아프지만, 그 일로 두 가문이 이렇게 등을 돌릴 필요는 없었어.’

만약 두 가문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회귀 전 에스테르 가문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델리아는 그런 뾰족한 마음을 숨기고 웃는 얼굴로 오벨르 백작을 바라보았다.

‘한때 전장을 주름잡던 100인의 기사였다고 했지.’

세월이 흐르고 마음고생이 더해져 조금은 무뎌진 듯 보였으나, 그럼에도 날카로운 시선과 장대한 풍채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현역 기사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지금 당장 전장에 서도 이상할 게 없는 기운이야.’

주름이 깊어진 눈가에도 오벨르 백작의 매서운 기세가 어려 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보시는 거지?’

자신을 말없이 쳐다만 보는 오벨르의 시선에 아델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명령을 어기고 영지로 들어와서 화가 나신 건가…….’

이글이글하는 적갈색 눈빛에 조금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어쨌든 영주의 명령은 그 영지에서 황명과도 같으니까.

한동안 말없이 아델리아를 바라보던 오벨르가 입을 열었다.

“……많이, 컸구나.”

“…….”

아델리아의 눈이 커졌다. 오벨르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네가 방을 들어왔을 때, ……네 어머니인 이레네아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단다.”

“…….”

“그리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니, 기분이 참 묘하구나…….”

오벨르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들었다.

먼저 떠나 버린 딸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한 손녀에게 미안했던 탓일까.

오벨르의 날카롭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이제 화가 풀린 것이냐? 그래서 찾아와 준 게야?”

힘없이 가라앉은 오벨르의 질문에 아델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뭔가 이상했다.

오벨르의 표정도 표정이었지만, 화가 풀렸다느니, 찾아와 줬냐느니.

출입금지령을 내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아델리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화가 나신 건 할아버지시잖아요.”

“내가?”

오벨르는 되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델리아는 그런 오벨르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디크레드 영지에 에스테르 가문의 출입금지령을 내리셨으니까요. 지난 7년간. 계속, 쭈욱.”

“……뭐?!”

오벨르의 주름진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출입금지령이라니?!”

놀라는 오벨르의 반응에 아델리아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출입금지령을 내리신 거 아니었어요?”

으음, 오벨르가 턱 끝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맞는데……. 그거야 홧김에 그랬던 거고.”

홧김에……? 이 할아버지가 정말…….

아델리아가 가늘게 뜬 시선으로 바라보자, 크흠. 오벨르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곧장 출입금지령은 거둬들였단다. 사위 놈은 밉더라도 손자와 손녀를 보지 못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

오벨르는 출입금지령을 내린 지 이틀도 되지 않아, 명령을 거둬들이게 했다고 말을 덧붙였다.

응? 뭐야?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명령을 누구한테 하셨는데요?”

“그거야, 영지 일을 잠시 맡기려고 부른 첼로ㅊ…….”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루드와 아스틴이 들어왔다. 말을 이어 가던 오벨르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저희가 조금 늦었습니다. 쉽게 입을 열지 않던지라,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루드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스틴이 기다렸다는 듯이 목덜미를 붙잡고 있던 사내를 응접실 바닥에 메다꽂았다.

“크윽!”

오벨르가 놀란 얼굴로 그 사내를 보았다.

“체, 펠로체?!”

바닥에 피떡이 되어 널브러진 사내를 쳐다보던 카르세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백작께서 정신이 없는 듯 보여 제가 대신 심문했습니다.”

“시, 심문이라니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오벨르를 불렀다.

“할아버지.”

“엉?”

“그래서, 그 명령을 누구한테 내리셨다고요?”

오벨르는 아델리아를 바라보다, 다시 바닥에 쓰러진 펠로체를 보았다.

“펠로체라고. 저기 저 사내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디크레드 가문의 방계 혈족이란다. 나는 네 할머니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펠로체에게 잠시 영주 대리인을 맡겼지.”

그게 7년이나 길어질 줄 몰랐지만, 말이다. 오벨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역시. 저 인간 때문이구나.’

아델리아가 어금니를 조용히 사리물었다. 그리고 곧장 소파에서 일어나 오벨르의 옆자리로 달려갔다.

“할아버지이…….”

“그, 그래, 아델리아.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야?”

아델리아는 오벨르의 옷소매를 꼭 붙잡고 두려움이 가득 깃든 눈동자로 펠로체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밤새 달려온 황태자 전하와 저를 지하 감옥에 가둔 사람이 저 사람이에요.”

“……뭐라?”

오벨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저더러 에스테르를 사칭한 요망한 계집이라고 했어요.”

“…….”

화르르륵— 눈동자에 불꽃이 이는 소리가 난다면 아마 지금과 같으리라.

소파를 거머쥔 오벨르의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자 쩌억— 나무로 된 소파 손잡이가 손쉽게 갈라졌다.

“못 배워 처먹었다고도 했고.”

쩌억, 쩌저적—!

“자기가 이 영지의 주인이고 자기 말이 법이라고도 했고요. 제가 진짜 에스테르라고 해도 상관없댔어요. 오는 길에 죽어 버렸다 하면 그만이라고요.”

아델리아는 알뜰하게 고자질을 했다. 그리고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펠로체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저 사람이…….”

“…….”

“할머니더러. ……죽은 딸의 망령을 붙들고 미쳐 버렸다고 했어요…….”

그 죽은 딸의 망령이 제 어머니인 거예요? 제 어머니가 망령이 되어 떠돌고 계신 거예요? 하며 아델리아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입술을 떨었다.

콰지직— 기어이 소파 손잡이가 큼직한 손아귀 아래 뜯겨 나갔다.

“펠로체에……! 이 괘씸하고 배은망덕한 노옴!”

오벨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찢어 죽일 듯한 시선으로 펠로체를 쏘아보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있던 펠로체가 벌벌 기어와 오벨르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 아닌니다. 저거뜨리 저르 모항, 모함하느 거니다!”

앞니가 모조리 빠지고 뺨이 부풀어 발음이 온전하지 못했다.

“닥쳐라!”

오벨르가 발을 들어 펠로체의 손등 위를 찍어 내렸다.

“끄아아악!”

“오갈 데 없는 것들을 거두어 키웠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이 금수만도 못한 놈!

오벨르가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거리며 소리쳐 기사들을 불렀다.

“펠로체를 감옥에 가두고 펠로체가 데리고 온 사병들도 모조리 잡아들여라!”

그러자 디크레드의 기사들이 들어와 펠로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펠로체에게 넘겼던 권한을 모두 회수하고 그리프타 자작 가문의 모든 재산을 회수하며 그 가족들 역시 모두 잡아들이도록 해라!”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펠로체를 끌고 나갔다. 질질 끌려 나가던 펠로체가 버둥거렸다.

“배, 배짜니! 배짜니! 어굴, 어, 어굴한니다!”

펠로체가 오벨르를 불렀으나 그 외침은 빠르게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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