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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42)화 (42/161)

42화

집무실이 고요했다. 오벨르는 생각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오벨르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펠로체는 어릴 적부터 왕래하던 그리프타 자작 가문의 장자였습니다. 욕심도 없고 영지민들에게 베풀 줄 아는 아이였죠.”

7년 전. 이레네아가 죽은 뒤 메릴다 백작 부인은 앓아눕고야 말았다.

기어이 남편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저 아이 이름만 읊조리며 수시로 저택을 빠져나가 사라지곤 했다.

“메릴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저택을 빠져나갔습니다.”

메릴다가 사라진 날이면 백작저의 모든 고용인들이 그녀를 찾아 산속을 헤맸다. 그리고 저녁쯤이 되어서야 온몸에 흙을 잔뜩 묻힌 채로 발견되고는 했다.

“하녀들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가 메릴다 옆을 지켜야 했지요.”

그래서 오벨르 대신 영지를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저 펠로체라는 사람이었군요.”

“그렇단다, 아델리아.”

저렇게 변할 줄도 모르고…….

오벨르가 마른 입가를 쓸어내리며 한탄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말했다.

“자리가 사람을 변하게 하는 법이죠.”

권력의 맛을 본 자는 더욱 변질하기 쉽다.

그러자 오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계라는 이유로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 두렵다길래 사병을 허락했더니…….”

디크레드 영지 입구의 기사들 역시 펠로체가 데려온 사병이었다. 아델리아의 은빛 머리카락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아……. 오벨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실수는 바로잡으면 됩니다, 백작.”

“충고,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것보다.”

카르세스가 품에 있던 주머니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놓았다.

“이게 무엇…….”

무엇이냐고 묻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흘러나온 마른 잎사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건, 폴디아퀸입니까?”

그것도 정제되지 않은.

“그렇습니다.”

그때 아델리아가 나섰다.

“정제되지 않은 폴디아퀸이 더 필요해요, 할아버지.”

“……하지만, 아델리아. 그것은 유통이 금지되어 있다.”

오벨르는 7년간 영지 관리에서 손을 뗀 만큼, 폴디아퀸이 불법으로 유통된 사실을 모른 듯 보였다.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정제되지 않은 폴디아퀸 때문에 폐하께서 중독되셨어요.”

“뭐……라고?”

“제가 아는 아이도 중독된 상태고요. 그래서 해독제가 필요한데, 그 해독제를 만들려면 정제되지 않은 폴디아퀸이 필요해요.”

지금 디크레드 영지의 재배지 또한 모조리 불에 타거나 갈아엎어져 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오벨르는 한동안 충격받은 얼굴로 테이블 위 폴디아퀸을 내려다보았다.

그 역시 보고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아내를 돌보느라 영지를 내버려 둔 일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새삼 깨달을 표정이었다.

“메릴다가 그리 지키려 애를 썼거늘……. 내가 망쳤구나.”

“할아버지…….”

자조하는 그의 모습에 아델리아는 가슴이 아팠다.

카르세스가 입을 열었다.

“오벨르 백작. 비축되어 있는 폴디아퀸을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카르세스의 정중한 부탁에 오벨르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 같은 말을 토해 냈다.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설마, 여유분이 없습니까?”

그러자 오벨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가문의 지하 창고에 소량 여유분을 비축해 두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7년 전, 창고에 도둑이 들어 폴디아퀸이 도둑맞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즉시 여유분을 폐기 처분하고 가문의 지하 창고를 걸어 잠갔다고 했다.

그 뒤로는 폴디아퀸을 수확하는 즉시 정제한 뒤 유통했기 때문에 정제되지 않은 폴디아퀸은 찾기 힘들 거라고.

“7년 전 도둑이라. 그때 정제되지 않은 폴디아퀸을 도둑맞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때 조사를 제대로 해야 했는데.”

오벨르가 아델리아를 슬쩍 흘기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마 있지 않아 딸아이가 죽고 아내마저 정신을 놓는 바람에 조사가 흐지부지 끝이 났습니다…….”

아……. 그때가 그때구나.

아델리아가 오벨르를 위로하듯 바라보았다.

딸을 잃었다는 소식에도 하늘이 무너졌을 텐데, 부인마저 아이를 잃은 슬픔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홀로 모든 것을 감당했어야 할 오벨르의 무게를 감히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펠로체라는 놈이랑 연관이 있어.’

공교롭게도 시기가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아델리아가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7년 전에 누군가 가지고 나간 폴디아퀸이 황제 폐하의 주치의에게 넘어갔어요. 그 뒤로는 더 빼내기 쉬웠을 거예요. 펠로체 자작이 영지를 관리했으니 은밀히 폴디아퀸을 팔아넘겼을지 모르니까요.”

카르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7년 전 영지를 오고 갔던 상인들과 출입객들의 명단이 남아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전하. 다만 오래전의 자료라 찾으려면 시일이 걸립니다.”

“괜찮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에스테르 공작저로 보내 주십시오.”

“저희 집으로요?”

“응, 황궁은 위험해. 나한테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확률이 커.”

카르세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영애는 조금 더 머물다 와도 좋아.”

폴디아퀸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더 머물 이유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달랐다. 처음 보는 조부모와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가야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도 해야 하니까.”

아델리아가 오벨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시 올게요, 할아버지. 지금은 여유롭게 이야기 나눌 시기가 아닌 것 같아요.”

“……미안하구나. 도움이 되지 못했어.”

“아니에요.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죠. 다음엔 아버지랑 같이 올게요. 아, 오빠도요.”

“……그래, 그리하거라.”

“아, 맞다. 아빠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술을 하나 주셨는데……. 불현듯 테오스가 준 포도주가 생각났다. 아델리아가 짐가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때.

콰앙— 집무실 문이 급히 열리며 하녀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배, 백작님!”

“무슨 일이냐.”

“마님께서, 마, 마님께서 또 사라지셨습니다.”

오벨르가 벌떡 일어났다.

“당장 기사들을 숲속으로 보내라! 당장!”

“네!”

오벨르가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배웅은 힘들 것 같습니다. 부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아델리아, 조만간에 또 보자꾸나.”

“…….”

오벨르가 다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오벨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가세요. 전 할머니를 찾고 가겠어요.”

아델리아도 집무실을 빠르게 달려나갔다.

“전하, 어찌해야 합니까?”

루드의 질문에 카르세스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백작 부인은 분명, 아델리아를 끌어안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가’를 만났다며 안도하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뜨자마자 저택을 빠져나갔다?’

무언가가 있다. 백작 부인이 그리워하던 ‘아가’를 두고 저택을 나서야만 했던 이유.

-온몸에 흙을 잔뜩 묻힌 채로 발견되고는 했습니다.

‘뭔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카르세스는 루드와 아스틴을 돌아보며 말했다.

“루드.”

“예, 전하.”

“어차피 오늘까지 디크레드에 머무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지.”

“그렇긴 합니다.”

“우리도 오늘까지는 디크레드 기사단들과 같이 움직인다. 서둘러라.”

“예, 전하.”

명령을 내린 카르세스도 아델리아를 쫓아 집무실을 나섰다.

***

해는 금방 저물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늘에는 먹구름까지 잔뜩 끼었다.

횃불로 어두운 숲속을 밝혀 가며 수색을 진행했으나 좀처럼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진 않았다.

산 중턱까지 올라온 아델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릭, 느껴지는 거 없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중에 한 사람의 기척만 찾는 건 힘들어요. 게다가 크고 작은 동물들도 너무 많고요.]

온전히 수색을 통해 찾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영애.”

단검으로 수풀을 베어 내며 앞서가던 카르세스가 아델리아를 불렀다.

“이거, 백작 부인이 입고 있던 옷인 거 같은데.”

“아! 맞아요!”

나뭇가지에 찢어진 옷자락이 걸려 있었다.

거의 다 따라잡은 것 같았다. 그 체력으로는 이 이상 올라가기 힘들 테니까.

‘릭, 이 근처야. 힘들겠지만 집중해 보자.’

[예, 누님. 한번 해 볼게요!]

목걸이를 꺼낸 아델리아가 리그하르트를 꽉 거머쥐었다. 리그하르트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에 손 전체가 잘게 흔들렸다.

[으음……. 음. 으흠…….]

뭐든 척척 빠르게 해내던 리그하르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진동만 하던 그때.

[찾았다!]

“어디!”

“영애?”

[동쪽으로 열다섯 걸음!]

“동쪽?!”

아델리아가 막무가내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델리아!”

카르세스 역시 아델리아의 뒤를 쫓았다.

[북쪽으로 스무 걸음!]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다섯 걸음, 서쪽으로 열 걸음, 북쪽으로 스물두 걸음!

리그하르트의 목소리에 의지한 채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자그마한 동굴이 나왔다.

하아…….

나무 기둥을 붙잡고 숨을 고르던 아델리아가 동굴 입구를 바라보며 섰다.

‘저기야?’

[네, 누님. 할머니인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이 산속에서 미동도 없이 숨만 쉬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할머니가 아닐까 하고.]

‘그래, 그렇지. 모두 수색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카르세스가 아델리아 옆에 섰다.

“저긴가?”

“네, 전하.”

아델리아가 천천히 동굴로 향했다.

동굴 안 공기는 몹시도 차가웠다. 입구는 좁았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천장이 높고 바닥은 넓었다.

“할머니……?”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할머니이…….”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계속 메릴다를 불렀다. 그때.

“아가……?”

동굴의 벽 한편에 기대어 있던 사람을 발견했다.

“할머니!”

아델리아가 달려가 메릴다를 끌어안았다.

“괜찮으세요? 세상에……. 이게 뭐예요!”

메릴다는 신발도 신지 않고 나와 발과 손끝이 모조리 흙투성이였다. 아델리아가 준비해 온 숄을 꺼내어 메릴다의 어깨에 올려 주었다.

“아가. 왔구나.”

“왜 여기에 계세요. 모두들 할머니를 얼마나 찾았는데요.”

“이거, 이거 주려고.”

“네?”

메릴다는 소중하다는 듯 껴안고 있던 상자 하나를 아델리아에게 건넸다. 흙이 묻어 있긴 했지만, 흑단 나무로 만들어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였다.

“보물을 찾아야 했어. 너한테 줄 보물을.”

“보물이요?”

“응, 응. 네가 이 보물을 찾아 헤매던 것을 난 보았단다.”

“네?”

“그래서 미리 숨겨 두었어. 다른 나쁜 놈들이 빼앗아 가지 못하게. 네가 와서 가져갈 수 있게. 네가 꼭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 이 보물을 찾으러 올 거라고.”

“…….”

아델리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메릴다가 건넨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어……, 이건.”

아델리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 상자 안에는 새카만 색을 띠고 있는 식물의 마른 잎사귀가 들어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폴디아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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