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카르세스는 사람들을 불러오겠다며 다시 동굴을 나섰다.
아델리아가 놀란 얼굴로 메릴다와 메릴다가 건네준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머니……. 이걸 어떻게?”
메릴다가 흙이 잔뜩 묻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보물을 찾았으니 울지 말거라, 응?”
“울어요? 제가요?”
“그랬지. 그랬어.”
메릴다는 슬픈 눈을 하고서 아델리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아델리아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꿈을 꾸셨나 봐요…….”
엄마가 우는 꿈을 꾸셨을까? 그래서 이토록 가슴 아픈 표정을 지으시는 걸까? 아델리아는 덩달아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러자 메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아가, 맞아. 그랬어. 꿈에서 네가 울고 있었단다.”
왜 그리 서럽게 울었어? 응? 하며 묻는 메릴다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메릴다는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던 건지, 아델리아의 눈가를 엄지 끝으로 훑으며 말을 이어 갔다.
“가엾게도 엄마도 잃고, 아빠도 잃고 오빠도 잃었어.”
“……네?”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나 울었던 거야, 그치? 다리는? 다리는 이제 괜찮니? 이제 아프지는 않아? 많이 무서웠을 거야.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델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지?
순간,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설마, 지금 할머니가…….’
내 이전의 삶을 이야기하는 건가?
불현듯 지난 삶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테오스와 데릭을 전장에서 잃고 악시덤의 검이 되어 전장을 떠돌다가 결국 다리부터 시작해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 버렸던.
지금 메릴다의 말이 딱 그 상황과 일치했다.
‘그런데……. 어째서? 할머니께서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야?’
아델리아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메릴다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할머니, 제가 누구예요?”
“누구긴, 우리 아가지.”
“제 이름, 혹시 아세요?”
“그러엄! 편지에 네 이름이 가득했단다.”
편지……?
메릴다는 꿈을 꾸듯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델리아.”
“…….”
“아델리아, 우리 아가. 이레네아는 네 이야기를 한 번도 빠트린 적이 없었단다.”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아델리아는 메릴다가 자신을 통해 어머니인 이레네아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어.
‘처음부터 제대로 나를 보고 계셨어.’
메릴다가 아델리아의 다리 위로 손을 올리며 울먹거렸다.
“울지 마라, 아가. 이제는 아프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는 다를 거다. 우리가 있을 테니 말이야.”
“네, 안 울게요. 울지 않을게요, 할머니.”
“옳지, 착하고 어여쁜 우리 아델리아.”
“할머니…….”
메릴다가 아델리아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사이 카르세스가 오벨르와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메릴다!”
오벨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왜 이곳에 있는 거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커다란 오벨르가 큼직한 어깨를 들썩이며 메릴다의 품에 안겨 울었다.
그렇게 메릴다가 사라졌던 일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아델리아와 카르세스는 곧장 수도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어둡던 밤하늘엔 어느새 새벽의 미명이 옅게 깔렸다.
“따뜻한 식사 한 끼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오벨르가 메릴다와 함께 배웅을 나왔다. 눈꼬리가 축 처진 오벨르를 보며 아델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희가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죠. 다음에는 꼭 오래 머물도록 할게요.”
오벨르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 만난 손녀를 이렇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입안이 껄끄러웠다. 서운하고 아쉽다는 말로는 모두 표현되지 않을 그러한 감정이었다.
“그래,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지.”
그때, 오벨르의 옆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던 메릴다가 아델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가…….”
“할머니.”
아델리아는 메릴다에게로 다가가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를 고쳐 덮어 주었다.
“할머니.”
“응.”
“이제 저택에서 말없이 몰래 나오시면 안 돼요.”
아델리아가 메릴다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메릴다는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그러마. 이제 나갈 필요가 없단다. 보물을 찾았거든. 그 보물을 네게 주었으니 이제는 나갈 이유가 없어.”
메릴다의 대답에 아델리아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델리아는 메릴다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식사도 잘 챙겨서 드시고 약도 빼먹지 말고 드시고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아가를 보러 가지.”
“네, 꼭 오세요. 오시면 제가 우리 집 구경시켜 드릴게요.”
“그래. 그러자, 아가.”
아델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메릴다는 아쉽다는 듯 아델리아의 손을 놓지 못하고 금세 눈물을 글썽거렸다. 눈물이 고인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아델리아의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꼭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셨죠?”
아델리아가 메릴다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고서 환하게 웃었다.
“건강하셔야 해요.”
메릴다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아델리아는 마차에 올랐다.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전하. 저희 가문이 지은 죗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오벨르가 참담한 얼굴로 카르세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카르세스는 작게 웃었다.
“폐하께서 쾌차하시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아마도 폐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실 겁니다.”
“하오나…….”
“7년 전 그 사건부터 차차 해결해 보도록 하죠. 우선은, 해독제를 만들러 가야겠습니다.”
오벨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심히 가십시오, 전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펠로체라는 작자의 처분은 백작께 맡기고 갑니다.”
“걱정 마십시오. 아주 철저히, 터럭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카르세스도 마차에 올랐다. 이내, 군마를 탄 루드와 아스틴이 출발하고 그 뒤를 따라 마차도 달리기 시작했다.
짧지만 강렬한 손녀의 방문에 잠시 넋이 나가기도 했지만, 오벨르는 금세 고개를 털고서 몸을 돌렸다.
“집사.”
“예, 백작님.”
“그간 내가 집안일에 무척이나 무심했네.”
“백작님…….”
“고생했어. ……이제 다시 제자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 분부만 하십시오.”
“일단, 내 가문과 내 영지를 제 마음대로 주물럭거린 펠로체를 만나 그 녀석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짜야겠군.”
“앞장서겠습니다.”
오벨르는 끝까지 마차를 바라보던 메릴다를 의자에서 안아 올렸다.
그리곤 잠시 아이들이 사라져 간 곳을 메릴다와 함께 바라보다 저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지.”
“예, 백작님.”
전장을 호령하고 영지민들의 존경을 받던 디크레드 백작의 귀환이었다.
무너져 가던 디크레드 백작가의 재기를 알리는 축포가 비로소 터진 셈이었다.
***
마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카르세스가 물었다.
“공작이 준 와인은?”
전해 주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그의 물음에 아델리아가 대답했다.
“아, 그건 아까 짐 정리할 때 미리 전해 드렸어요.”
수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할 때, 짐가방에 들어 있던 술병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이거 아빠가 전해 드리라고 했어요.
-……빌렌드 산 와인이로구나.
-네, 이 와인이 할아버지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 와인을 선물한 마음은 알아주실 거라고 하셨어요.
-……마음이라.
오벨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 잘 전해졌노라 전해다오.
아델리아가 오벨르의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잘 전해 드렸어요.”
싱긋 웃는 아델리아를 보며 카르세스도 웃었다.
“그래, 다행이군.”
아델리아가 폴디아퀸이 든 상자를 끌어안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커다란 두 눈으로 잠이 쏟아졌다.
꿈뻑꿈뻑,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너무 아쉽다.’
엄마 방도 구경하고 싶었고, 왜 출입금지령까지 내렸는지도 궁금했는데.
‘특히 그 와인. 금지령이야, 엄마가 돌아가셔서 홧김에 내렸다 하더라도 와인은 무슨 이야기일까?’
그리고 꿈에 대한 것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디크레드 영지를 떠나기 전까지,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응응. 아가, 맞아. 그랬어. 꿈에서 네가 울고 있었단다.
‘분명, 꿈이라고 하셨어. 그런데 단순한 꿈이라기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고.’
예지몽이라도 꾸신 걸까? 아니면, 정말 내 과거를 보신 건가……?
‘궁금한 게 너무 많아…….’
[다음에 와서 물어보면 되죠!]
‘그렇지? 이 일이 마무리되면 내려와서 한참 동안 놀다 가야지.’
아! 아빠랑 오빠도 같이!
[저도요!]
‘당연하지이…….’
흐아아암. 아델리아가 하품을 길게 하고서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러자 황태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거 이리 주고 편히 자.”
“시러……. 내가 들고…… 갈…….”
아델리아는 발음이 뭉개지는 줄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상자를 품으로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못 말린다며 카르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고집하고는.’
카르세스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델리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값깨나 나가 보이는 드레스의 밑단은 온통 뜯겨 나갔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흙먼지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옷맵시를 다듬기 전에 급히 떠나오느라, 군데군데 미처 떼어 내지 못한 나뭇잎의 흔적들도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빛이 났다.
눈밭 같은 새하얀 피부와 햇살 같은 천연의 은발은 같은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귀족 특유의 고귀한 분위기는 가려지지 않았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가 귀족 영애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그러다 고집스레 산속을 뛰어 올라가던 아델리아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세스가 외투를 벗어 아델리아의 상체에 걸쳐 주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그대는 그러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카르세스가 작게 웃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서 눈을 감았다.
마차 안은 고요해졌다.
***
마차는 빠르게 달려 수도로 향했다. 이번에는 야영 없이, 조금 무리해서라도 밤새 마차를 달렸다.
해가 뜨고 다시 저녁이 찾아올 때까지.
식사를 해결하느라 잠시 멈췄던 것을 빼면 마차는 쉬지도 않고 흙길과 돌길을 먼지 나게 달렸다.
“우욱.”
아델리아가 상자를 베개 삼아 베고서 의자에 누웠다. 낯빛이 새파랬다.
먼지를 뒤집어써도 생기 넘치던 두 뺨도, 펄떡대는 생명력으로 넘실거리던 붉은 두 눈동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가 걱정되었던 모양인지, 카르세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괜찮아?”
“아……, 네. 저는 괜찮…….”
[우웁!]
아델리아가 괜찮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리그하르트가 먼저 소리를 내었다.
‘너까지 왜 그래?!’
[저도 소, 속이……, 우붑!]
리그하르트까지 반응하자, 참고 있던 아델리아 또한 속이 더욱 뒤틀렸다.
“우웁.”
“이런.”
쉬지도 않고 마차를 달린 탓에 아델리아는 몹시도 지쳐 있었다.
‘디크레드로 갈 때 전하께서 야영을 준비한 이유를 알겠어.’
이건 미친 일정이야…….
산세가 험악했고 마차는 몹시도 빨랐으며 승차감은 너무도 구렸다.
첫째 날 야영을 결정해 준 황태자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델리아가 반 시체처럼 의자에 뻗어 있는 사이, 마차는 에스테르 공작저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고, 먼저 내린 카르세스가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쉬고 있어, 영애. 폴디아퀸은 내가 옮길 테니.”
그러자 으으으, 아델리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베고 있던 상자를 품에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안 돼요……. 해독제는 제가 직접 옮길 거예요.”
“영애는 곧장 저택으로 들어가 쉬도록 해. 폴디아퀸은 내가 황궁으로…….”
“황궁은 더더욱 안 돼요, 전하.”
아델리아는 카르세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며 말을 이어 갔다.
“신뢰하던 주치의가 폐하께 독을 올렸다고 했죠?”
“……그랬어.”
조금 전까지 몽롱했던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서 전 지금 황궁 사람 모두를 믿을 수 없어요. 또 누가 회유되었는지 우린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럼?”
아델리아가 상자를 끌어안으며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한테 맡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