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 사람은 어떻게 믿지?”
카르세스의 질문에 아델리아의 표정은 더욱 진중해졌다.
“전하.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뭘?”
아델리아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신중하게 물었다.
“……이제는 저 믿으시죠?”
“아니.”
엥? 카르세스의 즉답에 아델리아의 눈이 커졌다.
“엄…….”
그럼 안 되는데? 이쯤 되면 얄팍한 신뢰 한 줄기쯤은 생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거참. 진짜 의심 많으시네.’
아델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적어도, 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의 대꾸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짜요?”
“그래.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럼, 이제는 죽이진 않는 거죠?”
“안 죽여.”
카르세스는 여전히 아델리아를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진심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다른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다.’
사실 영애라고 불러도 될는지, 그것부터 애매했다.
어떤 귀족 영애가 투기장에 뛰어들어 노예를 구해 내고, 험난한 산속을 헤집고 다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속도만 빠른 몹쓸 승차감의 마차도 군말 없이 견뎌 냈다.
사실, 카르세스에게도 마석 마차는 꽤 힘겨웠을 정도니까.
‘그 모든 게 타인을 위한 인내였다.’
카르세스는 그녀의 그러한 진심을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특하게도.’
고작 일곱 살짜리가 말이야.
카르세스는 아델리아의 머리 위를 헝클어트리며 천연하게 미소 지었다.
“들어가지.”
카르세스는 아델리아를 스쳐 공작저로 걸어갔다.
“와…….”
전하께서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봐.
아니, 커다란 카르세스는 종종 저렇게 웃곤 했었다.
그때도 미소가 참 근사하다는 생각은 했는데, 작은 카르세스 역시 작은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요망한 매력이 있었다.
아델리아는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님.]
“…….”
[누님?]
“…….”
완전히 갔네. 갔어.
리그하르트가 쯔쯔, 혀를 찼다.
[예전에 뭐라 하셨더라. 황태자 전하가 잘생긴 건 맞지만, 내가 그분께 충성하는 이유는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셨던 게 엊그제였는데 말이죠. 지금 표정만 보면 그냥 오로지 그 이유 때문인 걸로밖에 안 보이는…….]
‘혼난다.’
흠흠, 아델리아가 목을 가다듬으며 저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마차가 돌아온 것을 본 데릭이 저택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델.”
“아! 오빠!”
아델리아가 데릭에게로 달려갔다.
데릭은 초췌해진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델리아를 보며 가슴이 지끈거렸다.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런 몰골로…….’
고생이 많았나 보다, 아델…….
“아델!”
데릭이 양팔을 양옆으로 넓게 벌리고 아델리아를 안아 줄 준비를 마쳤다.
‘고생했다고, 수고 많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지.’
그러나 아델리아는 그의 바로 앞에 서서 따지듯 물었다.
“찾았어?!”
“응?”
“내가 출발하기 전에 쪽지 줬잖아.”
“아아. 그 의사?”
감동의 재회, 진한 포옹. 뭐 그런 것을 기대했던 데릭은 아쉽다는 듯 팔을 접으며 말했다.
“찾았지. 그런데…….”
“그런데?”
으음, 데릭이 공작저 2층을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일단 우리 집에 있어.”
“어?”
우리 집?
“공작저?”
“응.”
데릭이 화사하게 웃었다.
데릭을 바라보던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그렇게 순순히 따라올 사람이 아닌데?’
펠슨은 소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듣지를 않았다.
과거에도 그랬다. 악시덤의 명령을 거부하다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그때도 악시덤이 죽이니 마니, 난리였었는데.’
펠슨의 재능을 높이 산 황궁의 의원들이 모두 그의 편을 들며 사건이 일단락되긴 했지만, 그만큼 고집도 세고 성질머리도…….
어쨌든.
‘그런 사람이 순순히 집까지 따라왔다고?’
아델리아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억지로 잡아 온 건 아니지? 납치, 감금, 그런 거 아니지?”
응? 아니지? 아니라고 해. 어서 아니라고 하라고!
“아니야, 아델.”
하하, 데릭이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2층 손님방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고 심심하지 말라며 체스판도 넣어 줬고 한 번씩 같이 체스를 두기 위해 올라가기도 했다고.
데릭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방문을 걸어 잠근 것도 아니고?”
“당연히 아니지, 아델.”
“방문 밖에 문을 지키는 기사를 두지도 않았고?”
“…….”
그러자 데릭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결국,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적막이 남매 사이로 흘렀다.
“…….”
“…….”
그때, 두 사람 곁을 지나가던 카르세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은 그걸 감금이라 부르더군, 에스테르 경.”
“…….”
“…….”
아아! 아델리아가 속으로 소리치며 부랴부랴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데릭은 바보야!’
그녀가 알고 있는 펠슨은 절대 강요에 의해 약을 제조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보다 첫인상이 중요했고 그래서 데릭을 보냈었다.
데릭은 몹시도 정중한 사람이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펠슨을 잘 설득하여 데려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납치에다 감금이라니!’
아델리아의 속도 모르고 리그하르트가 낄낄거렸다.
[그 펠슨 선생이 감금이라니.]
깔깔깔깔. 재미난 구경 하겠다며 신나게 웃어 댔다.
***
테오스는 입궁하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온 아델리아가 카르세스에게 말했다.
“전하.”
“응.”
“1층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같이 가면 안 되는 건가?”
카르세스의 질문에 아델리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났을 텐데, 대화 도중에 험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아서요. 그리고 무척이나 예민한 사람이라 최소한의 인원이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음.”
잠시 생각하던 카르세스가 계단으로 향하던 걸음을 되돌렸다.
“알겠다. 그럼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잠시 말을 멈춘 카르세스가 아델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부탁하지.”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맡겨 주세요, 전하.”
아델리아는 데릭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우왁!”
“응? 왜 그래, 아델?”
“나 지금까지 이런 꼴이었어?!”
“응. 그래도 예뻐, 아델.”
“…….”
데릭은 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휴! 이런 꼴로 펠슨 선생을 어떻게 만나러 가라고!’
아델리아는 아니지만, 펠슨에게는 아델리아와의 첫 만남이었다.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아델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오빠. 혼자 가서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아델리아는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급히 세라를 불러 옷부터 갈아입었다.
“어머나, 세상에! 아가씨이!”
세라는 잔소리를 퍼부으며 아델리아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카락과 얼굴에 붙은 먼지도 닦아 주었다.
“잔소리는 나중에 들을게, 세라! 지금 좀 바빠!”
아델리아는 방에서 나와 데릭과 함께 다시 계단을 올랐다.
“험하게 다루진 않았지? 다친 곳도 없고?”
아델리아가 노파심에 물었다.
“응. 당연하지, 아델.”
데릭이 여전히 천진한 얼굴로 아델리아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아델리아는 2층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2층 복도에 올라서자마자, 복도를 울리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비켜 주시죠.”
“나가시면 안 됩니다.”
아델리아의 예상대로 에스테르 기사와 펠슨이 문 앞에서 대치 중이었다.
[누님! 그 돌팔이예요! 펠슨! 그 펠슨 선생이요!]
조금 어린 얼굴이긴 하지만.
‘응, 나도 한눈에 알아보겠어.’
펠슨은 기사들 사이로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렸다.
“막무가내로 끌고 와서 사람을 가둬 두다니!”
“저희는 가둔 적이 없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둬 두는 게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버럭 화를 내는 소리에 아델리아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우와. 펠슨 선생이 저렇게까지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인데요?]
‘……그러게.’
펠슨은 단단히 뿔이 난 것처럼 보였다.
겨울을 이겨 내고 봄에 싹을 틔운 새싹처럼, 밝고 깨끗한 녹색의 눈동자에는 평소보다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설득은 물 건너간 것 같지?’
[저대로라면 아마 창문으로 뛰어내려서라도 공작저를 벗어나려 할 거예요.]
‘하아…….’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때, 펠슨의 짓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들이 원하는 약을 만들지 않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내게서 약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이 한둘인 줄 압니까? 그중에 단 한 명도 내 약을 얻어 간 사람이 없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델리아가 천천히 펠슨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마음먹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단코 약을 만들어 주지 않았…….”
주먹을 움켜쥔 채, 기사들을 협박하던 펠슨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데릭을 발견했다.
“하! 날 가둔 사람이 이제야 오는 모양이군!”
그래! 대체 무슨 속셈으로 나를 잡아 가뒀는지 들어나 보자!
뾰족하게 날 세운 그의 시선이 복도를 걸어오는 데릭을 향했다가, 그보다 앞에 선 아이에게로 향했다.
‘……여자아이?’
펠슨은 인상을 구긴 채로 다가오는 아이를 응시했다.
그러다 아이의 생김새를 보고서 서서히 눈이 커다래졌다.
붉은 눈동자, 그리고.
‘……은발!’
불현듯, 그동안 셀 수도 없이 꿔 왔던 꿈속 여자의 모습이 그 아이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펠슨 선생, 성격 좀 죽이십시오. 대체 몇 번쨉니까? 약 조제실보다 실은 감옥이 더 좋은 거 아닙니까?
매번 감옥에 갇혔던 자신을 꺼내 주던 여기사가 있었다.
얼굴은 흐릿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보이는 은발 머리카락과 목소리만큼은 선명했던 꿈이었다.
‘설마…….’
펠슨이 아델리아를 멍하게 바라보던 그때.
“펠슨 선생.”
“…….”
자신을 칭하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펠슨 선생,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