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펠슨이 기사들에게 가로막힌 채, 아델리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방금, 나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눈썹을 살짝 덮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밝은 빛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느새 다가온 아델리아가 기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펠슨을 막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아델리아는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펠슨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왜?”
“…….”
“왜 나를 그렇게 부릅니까?”
“그야, 의사시니까요.”
“저는 아직 정식 의사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보고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 죄송해요. 버릇이라 저도 모르게. 그 부분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
아델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펠슨을 선생이라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불러 버렸어.’
아델리아가 펠슨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펠슨이 뺨을 긁적였다.
“아니, 사과할 것까지야…….”
버릇? 의사들에게 무조건 선생이라고 붙이는 건가? 그러고 보니 꿈속의 여기사는 어땠더라…….
펠슨은 빠르게 꿈 내용을 떠올렸으나, 다른 의사와 함께 있는 꿈은 꾼 적이 없어서 비교할 수가 없었다.
‘하, 애매하네.’
그러자 데릭이 나섰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들 나누시죠.”
그러자, 아델리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펠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리아는 그런 펠슨의 표정을 살폈다.
‘화가 난 분위기는 아닌 거 같지?’
[이상하네요. 누님을 보자마자 얌전해졌어요.]
리그하르트의 말대로, 기사들과 대치하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소파에 나뉘어 앉았다. 그 사이 데릭이 사람을 불렀는지, 가벼운 디저트도 나왔다.
준비를 마친 하녀들이 모두 방을 빠져나가자,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선 사과부터 드릴게요. 펠슨 선…….”
아, 맞다. 아까도 이렇게 부르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지.
‘예전에는 선생이라 불리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았는데.’
[어릴 적에는 싫어했나 보죠.]
‘그런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델리아가 호칭을 고민하는 사이, 펠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호칭은……. 편할 대로 하십시오. 펠슨 선생이라고 불러도 뭐.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크흠, 펠슨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 갔다.
“곧 의사 시험도 칠 거고, 지금도 충분히 선생이라 불릴 자격은 있으니까.”
큼, 크흐흠. 펠슨이 주먹을 입 앞에 대고 버릇처럼 헛기침했다.
‘오, 잘됐다!’
가뜩이나 입에 붙은 호칭이라 어떻게 고치나 고민했었는데.
아델리아가 싱긋 웃었다.
“감사해요. 그럼 펠슨 선생.”
아델리아는 한숨 돌린 뒤 말을 이어 갔다.
“분명 정중히 모셔 오라고 했었는데, 중간에 오해가 생긴 모양이에요.”
그러자 아델리아의 옆에 앉아 있던 데릭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델, 난 분명히 정중하게 모셔 왔어. 물론, 거절당했지만.”
“그럼 그냥 왔었어야지, 오빠. 억지로 데려오는 게 어딨어.”
“아니, 억지로 데려온 게 아니라니까?”
오빠라고? 펠슨이 시선을 들어 데릭과 아델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이 같구나. 생김새도 비슷한 구석이 많고.
남매의 대화는 이어졌다.
“아델, 저 의사가 꼭 필요하다고 했었잖아.”
“그랬었어.”
데릭은 아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저 의사께서는 다른 제국으로 가기 위해 배편을 끊어 놓은 상태였어, 아델. 우리가 도착했을 땐 항구로 출발하기 위해 집에서 막 나서던 참이었고.”
“뭐?”
“만약 그날, 이곳으로 모셔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있을걸?”
그러자 아델리아가 펠슨을 흘깃거리며 대답했다.
“어……. 그, 그래?”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아델리아의 시선에 펠슨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잘 가뒀네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고 리그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잘 가뒀다는 리그하르트의 말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사실 아델리아도 같은 생각이었다.
‘펠슨 선생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빠가 가두지 않았다면 만나지도 못했겠어.’
아델리아가 눈썹을 들썩이며 펠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데릭이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억지로 끌고 왔다, 사람을 가뒀다 하시는데.”
데릭이 펠슨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스스로 마차에 타고 스스로 공작저까지 걸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응? 스스로?
아델리아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펠슨을 쳐다보았다.
“그거야……!”
크흠!
데릭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펠슨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헛기침만 해 댔다.
데릭은 펠슨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유물 창고라고 하자마자 앞장서라며 마차에 올라타신 분이 누구셨더라?”
“어허흠!”
펠슨이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코 밑을 한번 쓱, 훑어 낸 펠슨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스스로 마차에 타고 이 저택까지 온 것은 사실인데,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가둬 둔 것 또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유물 창고? 약속?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델리아가 데릭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데릭이 눈을 깜빡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우리 집 유물 창고를 보여 주겠다고 했어.”
데릭은 아델리아에게 소곤거렸다.
“우리 유물 창고에 있는 약초나 여러 도구를 보여 주려고 했지. 신기한 게 많잖아.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거 하나쯤은 찾을 거 같아서.”
펠슨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유물 창고! 그런데 그 유물 창고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공작저에 도착한 이후로 유물 창고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에 이번에는 데릭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그건 맞아. 집으로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 하필 입궁하셨다잖아. 그래서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저 의사 양반께서 영 성미가 급하셔서.”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물 창고의 물건들이 신기한 부분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위험한 물건들도 있었다.
그래서 유물 창고는 항상 결계로 보호받고 있었는데, 그 결계를 풀 수 있는 사람은 테오스뿐이었다.
그 유물 창고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가져온 전리품 중에서도 희귀하고 신기한 물건들만 모여 있었다.
‘기억나.’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명예나 재력에 큰 욕심이 없던 테오스가 유일하게 챙겨 오는 것이 전쟁의 전리품들이었다.
‘신기한 물건을 모으는 취미라도 있으신 걸까?’
피를 흘리는 저주받은 술잔이라든가, 표정이 바뀌는 가면이라든가, 또는 활자가 계속 바뀌는 소설책이라든가.
‘만지는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보석도 있다고 했었어.’
으으, 아델리아가 소름 끼친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문제는, 펠슨 선생도 대륙을 다니며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봤을 거라는 거지.’
게다가 테오스가 황궁에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벌써 나가겠다고 난리 치는 걸 보면, 펠슨의 인내력에도 한계가 찾아온 것 같았다.
‘아빠는 언제 오실지도 모르고, 막상 창고 안을 구경시켜 줘도 펠슨의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어.’
괜히 애매한 물건들을 보여 주는 것보다, 펠슨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한 신기한 게 없을까.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유물 창고는 아버지께서 오시면 꼭 보여 드릴게요. 대신 지금은 그런 물건 말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기한 사람은 어떠세요?”
“신기한 사람이요?”
“네, 예를 들어 성년이 되기 전에 오러가 발현된 사람이라든가.”
“뭐라고요?”
그 순간, 펠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델?”
놀란 것은 펠슨만이 아니었다.
“……설마, 그걸 보여 주려고?”
데릭이 작게 속삭였다. 그에 덩달아 아델리아 역시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것만큼 신기한 건 없잖아, 오빠.”
“그렇긴 한데…….”
아델리아가 펠슨의 눈치를 한번 살핀 뒤, 데릭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이건 곧 드러낼 힘이야. 공표되고 나면 더는 신기한 힘이 아니라고. 신기할 수 있을 때 써먹어야지.”
아델리아는 이미 테오스와 데릭이 있는 자리에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오러는 평생 숨기지 못할 힘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오러를 공표할 시기까지 정해 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펠슨은 오러에 대해 관심이 많아.’
의사로서의 호기심을 떠나, 오러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펠슨과 친해졌던 계기 역시, 그의 오러 연구를 도와주면서부터였으니까.
그러나 데릭은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표까지는 꽤 시간이 많이 남았어. 몇 년은 더 있어야 한다고. 그 사이 저 의사가 다 떠들고 다니면 어떻게 할 건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델리아는 이미 저 정체불명의 의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 보였다.
‘대체 어디서 접점이 있었던 거지?’
데릭은 짧게 펠슨을 쳐다본 뒤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저 사람에게 호의적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순 없어, 아델.”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
아델리아는 펠슨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펠슨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데릭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
“난 저 의사에게 감시를 붙여야겠어.”
그리고 누구와 접촉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더니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네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면.”
데릭의 따스했던 붉은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난 머뭇거리지 않고 저 의사를 죽일 거야, 아델.”
그런데도 그걸 보여 줄 거야? 하고 되묻는 시선으로 데릭이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델리아는 조금은 낯선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펠슨 선생을 믿어.’
펠슨은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신뢰를 얻고 친분을 쌓게 되면 절대 그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다.
“알았어, 오빠. 그때가 오면 오빠 마음대로 해도 돼.”
“……알았어.”
남매가 속닥거리는 사이, 고민에 빠졌던 펠슨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이래 봬도 의원 일을 하며 읽은 서적이 수천 권에 달합니다. 의학 서적은 물론이고, 고서도 적잖이 읽었지만 그런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건 신기하다기보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절대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펠슨은 허리를 조금 숙이며 은밀하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정말 알고 있습니까?”
펠슨의 물음에 아델리아가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었다. 사냥용 단검이었다. 이를 본 데릭과 펠슨이 놀란 눈을 떴다.
“무, 무슨!”
화들짝 놀란 펠슨은 소파 뒤로 몸을 빠르게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