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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46)화 (46/161)

46화

데릭이 아델리아가 꺼낸 단검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델, 그런 허접한 단검은 어디서 났어? 오빠한테 말하지 그랬어. 그럼 더 예쁜 걸로 구해 줬을 텐데.”

“괜찮아. 나름 잘 썼어.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조금 무리해서 썼더니 날이 싹 나갔더라고.”

“그럼 오빠가 좋은 녀석으로 구해 줄게.”

“아니야. 노베트한테 부탁하면 되는걸.”

“아. 그렇네.”

남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듣던 펠슨이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일곱 살짜리가 단검을 가지고 다니는데, 무리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날이 무뎌졌다는데,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뭐야, 검날에 묻어 있는 저거 피, 피 아니야?

펠슨의 안색은 검날에 묻은 검붉은 얼룩을 보며 더욱 파리해졌다.

뭐야, 이 가문은…….

펠슨의 흔들리는 시선에 아델리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 죄송해요. 손님을 앞에 두고 너무 저희끼리 떠들었네요.”

“아닙, 니다…….”

“보여 드리려면 이게 나을 거 같아서요.”

“뭘, 말입니까?”

저 단검으로 대체 뭘 하려고…….

단검을 사이에 둔 아이의 눈매가 싱긋 미소를 띠었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오러가 발현한 사람요.”

“…….”

설마…….

그때였다. 화르륵— 마치 불꽃이 이는 듯한 소리가 방 안을 채우더니 난데없이 꾀죄죄한 단검의 날에 황금빛 불꽃이 붙었다.

“허……! 오, 오러?”

오러다……. 진짜 오러야!

아델리아는 황금빛 불꽃이 붙은 단검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대답했다.

“네. 오러예요.”

“…….”

펠슨이 할 말을 잃고 입을 쩍 벌렸다.

‘그 꿈이, 진짜였어!’

펠슨이 떨리는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꿈에 나온 기사는 여자였다.

일단 거기에서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로시안트 제국에는 여기사가 없었으니까.

-경! 성년이 되기 전에 오러가 발현되었기 때문에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제 좀 하시라고요!

꿈속의 자신은 어째서인지 그렇게도 들어가기 싫어하던 황궁에서 의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황실 기사단의 주치의였다.

그는 매번 꿈속의 여자에게 소리치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알았다고 대답하던 여자는, 결국.

‘죽어 버렸지.’

꿈속의 여기사는 어린 나이에 오러가 발현되었다고 했다.

‘내가 그 기사를 살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꿈에서 깨어난 뒤로 항상 좌절감에 휩싸였다.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렸지만 결국 그녀를 살리지 못했었지.’

꿈의 마지막 장면은 항상 그녀의 죽음이었다.

새로운 약을 만들었다며, 기쁜 마음으로 오두막을 찾았다. 그러나 그 은발의 여기사는 더 이상 약을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싸늘하게 주검이 되어 있던 그 모습이, 그 와중에도 햇살보다 눈부셨던 은발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저 아이…….’

펠슨이 맞은편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꿈속 여기사보다 한참이나 어린 아이였다.

‘하지만 은발이야.’

게다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오러까지 발현되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을까?’

펠슨의 흔들리는 녹안이 단검을 감싼 오러와 아델리아를 오고 갔다.

아델리아가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어때요? 신기하죠?!”

신기한 거 맞죠? 그렇죠? 그렇다고 말해요. 어서.

그러자 펠슨이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기하네요.”

그 꿈과 일치하는 이 상황이.

그 꿈속 여기사와 저 작은 어린아이가 겹쳐 보이는 이 상황이.

펠슨이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여러 차례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하더니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뭘 만들어 드리면 되는 겁니까? 역시, 약을 만드는 일입니까?”

그러자 아델리아가 환한 얼굴로 물었다.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자 펠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예에? ……또요?”

여기서 뭘 더 어쩌라는 거냐고, 욕심도 많으시다며 아델리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괜스레 울컥하는 펠슨이었다.

***

펠슨은 은빛 머리카락을 찾기 위해 대륙 곳곳을 돌아다녔다.

당연히 성년식을 치른 은발의 여기사만을 찾아다녔다. 그러니 애초에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아이는 조사 대상에서 빠진 상태였다.

어린 나이에 오러가 발현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말 꼬맹이였네.’

그것도 오러가 발현해 있는.

‘이러니까 못 찾았지.’

확실히, 나이를 제외하고는 꿈속의 여기사와 상당히 비슷했다.

‘아……. 어쩌지.’

얼마 전, 황궁에 일이 생겼다며 브록이 집까지 찾아왔었다.

-기회라니까! 일확천금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폐하께서 깨어나시기만 하면 네게 큰 포상을 하실 거야!

-관심 없어.

-폐하가 이대로 죽게 놔두겠다고?!

-난 못 들은 거야.

-펠슨!

-형도 정신 차려. 날 이용해서 출세하겠다는 생각인 거 모를 거 같아?

-너, 진짜!

브록은 황제가 폴디아퀸에 중독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델리아가 폴디아퀸의 해독제를 요구했을 때, 황제의 해독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족과 엮이면 그 끝이 좋지만은 않을 거라고, 펠슨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는데.’

형인 브록에게는 딱 잘라 거절해 놓고, 공작가의 유물 창고에 넘어가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자신이 조금은 한심했다.

‘덕분에 저 꼬맹이를 만나긴 했지만…….’

그렇지만…….

하아……. 펠슨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곁에 머물면서 지켜보는 게 낫겠어.’

아직은 모르겠다. 확신이 없어.

저 꼬맹이가 꿈속의 여기사와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

“저어, 펠슨 선생.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신 거예요?”

갑자기 펠슨이 고개를 푹 숙이자 아델리아가 걱정하듯 물었다.

아델리아의 목소리에 다시 펠슨이 얼굴을 들었다.

“제 조건은……. 제가 떠나고 싶을 때까지 공작저에 머무는 겁니다. 그럼 해독제를 만들어 드리죠.”

“……네?”

아델리아가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 공작저 유물 창고에 있다는 그 희귀한 약초들도 내어주신다고 하셨으니 약속 지키시고요.”

“…….”

아델리아가 데릭을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응, 내가 다 준다고 그랬어.”

하하, 데릭이 태평하게 웃었다.

펠슨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는 했지만, 정말 데릭은 간이고 쓸개고 떼어 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아, 그리고 저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조제실도요.”

펠슨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마도 지금 급한 것은 아델리아 쪽이라는 걸 이미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델리아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게 웬 횡재야?’

[펠슨은 돌팔이에다 바보예요! 전부 누님의 계획인 줄도 모르고!]

낄낄, 리그하르트가 키득거렸다.

아델리아는 고심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펠슨 선생을 모셔 온 것도 저희 가문이고, 펠슨 선생의 그 능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죠.”

아델리아가 턱 끝을 매만지며 다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손뼉을 짝, 치며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머무시는 동안 공작저 창고에 있는 약초는 물론, 조제실까지 제공해 드리겠다고 약속할게요.”

“오! 정말이죠?!”

펠슨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영애께서요?”

“네. 설마 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을 방치하리라 생각하신 건 아니시겠죠?”

아델리아가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

오러를 말하는 거구나.

펠슨은 그제야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약을 만들지 못하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라는 말입니까?”

펠슨이 파리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후후, 음산하게 웃더니 말했다.

“어린 저에게 오러가 발현되었다는 사실은 이 공작저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답니다.”

“…….”

“아시다시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저희 가문은 엄청난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거고요.”

펠슨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펠슨 선생께서도 한동안은 비밀로 해 주셔야겠어요.”

“……한동안이라고요?”

“네, 제가 스스로 오러를 밝힐 때까지는 공작저에서 공작가의 사람으로 지내 주세요.”

“뭐라고요?! 그게 언제일 줄 알고요?”

“에이,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대충 4년? 5년? 아델리아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펠슨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4년이든 5년이든. 그렇게 되면 내가 원하는 날까지 있게 해 달라던 내 조건이 무용지물이 되잖아! 저 꼬맹이가 원하는 날까지 있게 되는 거라고.’

안 되지, 이렇게 주도권을 빼앗길 순 없지.

“아니, 그건…….”

펠슨이 다시 입을 열자, 아델리아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휙 돌려 데릭에게 물었다.

“오빠, 연구실과 조제실은?”

“네가 말한 대로 준비해 뒀어. 집기들이 아직 모두 들어오진 못했지만, 거의 완성했어. 당장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는 돼.”

뭐? 펠슨의 눈이 동그래졌다.

준비해 뒀다고? 벌써?

‘뭐야. 그건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그러자 아델리아가 손뼉을 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빠 대단해!”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더니 펠슨에게로 훌쩍 뛰어갔다. 펠슨이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얼마나 다행이에요! 선생께서 바로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게 되어서!”

“바, 바로요?!”

“아, 구경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어휴, 물론이죠! 이제 그곳은 펠슨 선생만의 작업실인걸요?”

“뭐라고요?”

“성격도 급하시지. 말이 나온 김에 가시죠?!”

“자, 잠……!”

펠슨은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다 곧장 별관의 작업실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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