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공작저의 본관에서 빠져나와 별관과 이어진 돌길을 걸어, 본관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별관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더 끌려갔을까.
데릭이 걸음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조제실의 내부가 드러났다.
‘우와. 이게 뭐야!’
펠슨이 눈을 크게 뜨고 내부를 살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조제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제실 내부는 고급스럽고 중후한 공작저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단정하면서도 깔끔한 분위기에 작업대 위로 정갈하게 준비된 도구들 하며,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로 잘 닦아 놓은 집기들이 그의 혼을 쏙 빼 놓았다.
집기 몇 개 빼고는 모든 게 마련되었다던 데릭의 말대로였다.
아니, 사실 당장 약을 조제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조제실이었다.
‘뭐야. 이건 또 여기에 왜 있어?’
벽 선반 위로는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플라스크가 종류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마석을 갈아 유리와 섞어 만든 거야.’
황궁에서도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여긴 종류별로 있잖아?!
가루약을 만들 수 있는 기계에서부터, 물약을 제조할 때 쓰이는 증류기.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약재 수납함까지.
‘황궁 약제실도 이것보단 덜 화려할 거야!’
유백색의 절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펠슨이 아델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길 혼자서 다 쓰란 말입니까?”
“네!”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펠슨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의혹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저더러 공작저의 주치의로 눌러앉으란 겁니까?”
“아뇨?”
아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공작저에는 이미 훌륭한 주치의가 있어요.”
그러자 펠슨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치의가 있는데 나더러 공작저에 4년이고 5년이고 머물라고 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주치의로 머물라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럼요?”
“하고 싶은 연구를 하세요.”
“……연구?”
“희귀한 재료, 구하기 힘든 의학서를 찾느라 대륙을 떠돌지 마시고요. 그런 건 이제 우리 공작가에서 다 준비해 드릴 거예요.”
펠슨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약만 만들어 주면 끝날 사이에.”
“그렇게 끝나기 싫으니까 이러는 거죠.”
“…….”
천진한 아이의 대답에 펠슨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됐다. 말자.’
어차피 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그것 때문에 붙잡고 있는 걸 테니까.
‘재료랑 책을 다 구해 준다면 나야 편하지.’
없는 신세에 대륙을 여행하는 것도 지쳤고 여행하며 재료와 책을 사는 것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이참에 공작가의 재력을 이용해 주겠다, 이거야.’
펠슨이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펠슨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표정을 보며 아델리아가 웃음을 참았다.
‘이제 겨우 남기로 정했나 보네.’
[황태자에 비하면 수월하게 넘어왔어요!]
아델리아는 리그하르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아델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펠슨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그러죠.”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데, 뭐가 부족하겠어.
펠슨은 조제실의 약초와 도구들을 쓸 생각에 벌써 손끝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부탁드리려는 약은 폴디아퀸의 해독제예요.”
아델리아의 목소리에 펠슨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폴디아퀸이라…….”
턱 끝을 만지작대던 펠슨이 물었다.
“상태는요?”
“한 사람은 겨우 중독된 걸 알아차릴 만큼 미미한데, 한 사람은 앞이 보이질 않는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펠슨이 무심하게 말했다.
“시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곧 죽겠네요.”
“…….”
그의 말에 아델리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펠슨 선생이 만든 약을 먹으면 목숨만큼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틀렸습니다.”
“네? ……틀리다뇨?”
무슨 뜻이지? 못 만든다는 뜻인가?
잠깐 아델리아의 얼굴로 그러한 걱정이 스쳤다.
“해독제를, 만들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그러자 펠슨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 말의 뜻은. ……제가 만든 해독제를 먹으면 시력까지 돌아올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역시!’
아델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며 속으로 흐뭇해했다.
아델리아가 가지고 있던 상자를 펠슨에게 내밀었다.
“아, 그런데 재료가 이것밖에 없는데 괜찮을까요?”
펠슨이 자연스럽게 조제실의 의자에 앉으며 상자를 건네받아 뚜껑을 열었다.
폴디아퀸의 잎사귀를 손끝으로 비비적거리더니 다시 뚜껑을 닫았다.
“충분하겠네요. 더 적어도 가능은 한데,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지니까.”
약 효과도 더 좋아지고.
펠슨이 당장 필요한 도구들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모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리아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최대한 빨리 만들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늦어도 이틀 안에 가능할까요?”
황궁의 주치의들은 재료만 넉넉하게 준비된다면 일주일 안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은 너무 길어. 펠슨이니까 이틀이면 되지 싶은데…….’
아델리아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짓자, 펠슨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틀은 무슨. 내일 아침에 찾으러 오세요. 그때까지는 완성되어 있을 테니까.”
뭐……? 내일 아침?!
아델리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환해졌다.
“그렇게 빨리요?”
“이 정도는 식은 죽 먹…….”
“우와! 정말요?! 진짜 대단해요! 펠슨 선생!”
역시 펠슨 선생이야! 이 복덩이!
아델리아가 기쁜 마음에 그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자 펠슨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뭐, 뭐야…….’
천연하게 웃는 아델리아의 미소에서 그제야 아이다운 모습이 엿보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애가 애 같지 않아서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는데.
‘뭐……. 어쩌면, 생각보다……. 귀여운 것 같기도.’
꿈속의 여기사와 같은 은발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만 집중해서 그렇지, 얼핏 보아도 아이는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사랑받고 자랐을 부유한 가문의 귀족 영애.’
딱 그런 느낌이 났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광석을 갈아다가 정성껏 뿌려 놓은 듯한 은빛 머리카락과 초식 동물의 순수함을 담은 커다란 눈동자, 티끌 하나 없이 맑은 피부는 마치 전설 속의 요정을 떠오르게 했다.
‘다른 귀족 아이들도 저랬던가?’
기억을 빠르게 헤집어 보아도, 모조리 희미했다. 저토록 강렬하게 뇌리에 꽂히는 얼굴은 없었다.
‘웃을 때는 고양이 같기도 하고, 눈을 땡그랗게 뜨고 쳐다볼 때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귀찮게 구는 징그러운 남자 형제 말고, 이런 여동생 하나 있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때 데릭이 아델리아를 조심스레 붙잡아다 뒤로 빼내었다.
“아델. 그렇게 뛰면 다쳐. 이리 와.”
“아, 어. 맞다. 깜빡했어.”
데릭은 웃으며 아델리아를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펠슨을 내려다보는 눈은 전혀 웃질 않았다.
아델리아를 따라 슬그머니 웃고 있던 펠슨도 데릭의 시선에 뜨끔했는지, 큼, 크흠, 크흐흠, 연거푸 헛기침했다.
‘보아하니 나랑 나이도 비슷하겠구만, 눈빛이 왜 저래?’
펠슨이 다시 몸을 돌려 도구들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그만 나가 주시죠. 내일 아침까지 완성하려면 지금부터 집중해야 할 것 같으니까.”
“네, 그럼 부탁해요.”
“네네.”
펠슨은 대답한 즉시 약 제조에 집중했다.
그러자 아델리아는 데릭을 데리고 조용히 조제실을 빠져나왔다.
“조제실 근처에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줘.”
“괜찮겠어? 조금 전까지 달아나려 했던 자야.”
입구에 기사를 세워야 하지 않겠냐고 데릭이 물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자신 있다는 어투로 말했다.
“괜찮아. 이제 달아나려 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알아?”
“펠슨 선생은 명예 욕심도 없고, 권력이나 재력에도 욕심이 없어.”
그러자 데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것 같더라. 골드를 엄청나게 퍼 주겠다 해도 비웃더라고.”
“응, 대신. ……도구 욕심은 엄청나거든?”
“아……. 그래서 조제실의 도구를 구하기 힘든 물건들로 채우라고 했던 거구나.”
데릭이 그제야 이해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델리아는 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아빠의 유물 창고를 뒤져서 나온 거라면 펠슨 선생의 눈이 뒤집힐 거라고 생각했어.”
아하, 그렇구나. 밝게 대답한 데릭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기어이 멈춰 섰다.
“오빠?”
함께 걷던 데릭이 갑자기 뒤처지자, 아델리아가 뒤를 돌아 그를 불렀다.
대낮인데도 복도는 어두웠다. 그 어둠을 밝히는 램프의 여린 불빛이 살랑, 흔들리며 짙은 그림자가 데릭의 웃는 얼굴 위로 일렁거렸다.
“아델.”
“으, 응?”
데릭의 웃는 모습은 익숙한데, 지금 데릭의 미소는 어쩐지 서늘하기까지 했다.
데릭이 느슨하게 뜬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궁금한 게 있어.”
“어, 뭐가?”
항상 아델리아의 말에 수긍하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던 평소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데릭이 느릿한 걸음으로 아델리아에게로 걸어오며 물었다.
“……대체 그 괴짜 의사의 취향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응, 아델? 하고 묻는 목소리에 아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