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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48)화 (48/161)

48화

[누, 누님. 형님이 왜 저러시는 거죠?]

‘몰라…….’

하지만, 데릭의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회귀 이후 지금까지, 데릭은 아델리아의 부탁이나 수상한 점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데릭은 달랐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넘어가 주지는 않겠다는 거야.’

[어, 어쩌죠?]

‘어쩌긴. 또 널 팔아야지.’

[네?]

판다니, 무슨……. 하고 말을 이어 가던 리그하르트의 말을 자르고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성검!”

“……성검?”

데릭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응. 성검이 알려 줬어.”

[누니임…….]

그러자 데릭이 미심쩍은 듯 물었다.

“성검이 그런 것까지 안다고?”

“성검은 오랜 시간을 살아왔잖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겪어 왔고.”

“……그랬겠지.”

“그동안 펠슨 선생 같은 사람도 많이 만나 봤나 봐.”

“그 경험을 듣고 생각했다?”

“그렇지!”

아델리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고 데릭의 표정을 살폈다.

‘먹혀라. 먹혀라. 먹혀!’

그러자, 데릭이 환하게 웃었다.

“성검 녀석, 흔해 빠진 쇳덩이가 아니었구나?”

“그, 래! 맞아. 대단한 녀석이지!”

하하! 아델리아가 평소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데릭 역시 그녀를 따라 웃으며 식견이 대단한 쇳덩이라고 리그하르트를 칭찬했다.

[칭찬인지, 욕인지…….]

‘넘어가는 거 같지?’

[네, 일단은 믿는 눈치예요.]

후우. 아델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씩 저렇게 치고 들어온단 말이지.’

물론, 아델리아 역시 데릭이 마냥 순진해서 넘어가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아델리아는 자신의 손을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데릭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조금씩 한계가 느껴져.’

아델리아는 가라앉은 얼굴로 데릭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응접실로 내려오니 카르세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세스는 책을 읽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카르세스는 아델리아가 들어오자 책을 덮은 뒤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에스테르 경은?”

아델리아가 혼자 응접실로 들어오자, 카르세스가 물었다.

“연무장에서 기사들끼리 싸움이 났대요. 그래서 그쪽으로 갔어요.”

아델리아가 한심하다는 듯, 쯔쯔 혀를 차며 말했다.

“원래 혈기 왕성한 기사들끼리는 그렇게 싸웠다가 친해지고 그러는 건데 말이죠.”

대수롭지 않다는 아델리아의 말에 카르세스가 조용히 웃었다.

“가까이에서 겪어 본 사람처럼 말하네.”

“저희 가문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며 자랐으니까요.”

아델리아가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자랑스레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했었지.”

카르세스가 옅게 웃자, 아델리아가 눈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2층 손님용 방을 치워 뒀어요. 거기서 눈 좀 붙이세요, 전하.”

그러나 카르세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야.”

“며칠 동안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잖아요.”

마차에서도, 야영을 할 때도.

디크레드 영지에 도착했다가 돌아오는 길에서도, 카르세스는 잠든 적이 없었다.

‘난 졸기라도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잤다기보다 기절에 가까웠지만.

아델리아가 카르세스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세스는 처음과 같았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다. 고귀한 황족, 그 자체였다.

기다란 남청색 소파 가운데 앉은 카르세스의 위로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쏟아졌다.

황금빛 햇살과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저토록 조화로울 줄이야.

살랑살랑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그의 앞머리가 흔들리며 보랏빛 눈동자가 언뜻거렸다.

‘햐. 그림이네.’

[……제발 그 말만큼은 입 밖으로 내시면 안 돼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한 번씩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시거든요?]

‘내가?’

[……그랬다고요.]

흥. 알았어. 조심하면 될 거 아니야. 아델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때, 카르세스가 덮었던 책을 다시 펼치며 말했다.

“난 괜찮으니 올라가서 쉬도록 해.”

그러자 아델리아는 소파로 걸어와 카르세스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투덜거리는 자그마한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전하를 여기에 두고 잘도 자겠네요.”

카르세스가 책장을 넘기다 말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영애는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 놓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

[거봐요. 제 말이 맞죠?]

리그하르트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괜히 머쓱해진 아델리아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것도 제 장점 중 하나죠.”

확실해? 장점인 거? 카르세스가 웃으며 묻자, 아델리아도 그를 따라 장난스레 웃으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아, 편안하다…….’

잠깐의 적막이 찾아왔다.

카르세스는 책장을 넘기며 다시 독서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째깍째깍, 벽난로 위에서는 시곗바늘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하암. 아델리아가 입을 막으며 작게 하품했다.

카르세스는 책에 시선을 둔 채 피식, 작게 웃었다.

“올라가서는 잠이 안 온다더니, 내 앞에서는 잠이 오나 보네.”

꾸벅꾸벅,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아델리아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항상 그렇더……라고요?”

이상하게 전하랑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다시 시간이 흘렀다. 평화로운 적막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앞에서 들리는 잠꼬대 같은 소리에 카르세스가 고개를 들었다.

“영애?”

아델리아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가 꼬옥…… 만들어, 드릴…….”

서서히 수마에 깊게 빠져드는 아델리아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뭐라고?”

카르세스가 물었다. 그러자.

“제가, 꼭.”

“꼭?”

“……폐하로 만들어 드린다고요오.”

“…….”

“……이번에는, 반드시.”

책장을 넘기던 카르세스의 손끝이 멈칫했다.

카르세스의 시선이 아델리아의 입술을 응시했다.

‘대체 뭐라는 건지.’

‘제가 꼭.’ 그다음 말은 발음이 죄다 뭉개지며 알아듣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흠냐. 중얼중얼 잠꼬대하던 아델리아가 기어이 소파 위로 기다랗게 드러누웠다.

나 참.

카르세스가 다시 책을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접어 놓았던 담요를 펼쳐 아델리아에게 덮어 주었다.

“고집하고는. 그냥 올라가서 편하게 쉬라니까.”

카르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다리를 꼬아 앉은 뒤 덮어 두었던 책을 펼쳤다.

그러기를 잠시, 책으로 내려갔던 시선이 슬쩍 아델리아에게로 향했다.

‘미련하긴.’

색색, 잠든 아이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린 카르세스는 평소보다 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카르세스의 입가로 은은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

“모두 즉사입니다.”

앞서가던 사내가 일곱 구의 시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검은색의 복면과 망토를 걸친 사내는 시체를 발로 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들은 허리에 장검 하나와 단검 세 개를 차고 있었다.

암살에 특화된 용병단, 에이블화이트였다.

“정확히 급소를 노렸습니다, 단장.”

그러자 말에 타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땅으로 내려오며 혀를 찼다.

“하 씨, 골 아프게 됐네.”

에이블화이트 용병단의 단장, 킬리어드는 자신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에스테르 공작령의 경계에서 제법 떨어진 ‘빌렌스’ 산맥.

빌렌스 산맥은 디크레드 영지로 들어가기 위해서 꼭 지나쳐야 하는 길이었다.

‘어차피 다 죽어 가는 영지라 지나가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뢰 내용은 간단했다.

그저 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면 처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엄청난 선수금에 비해 난도가 높지 않아 여유 있는 의뢰였다.

그런데…….

“길목을 지키라고 보냈더니, 여기서 뒈져 있을 줄이야.”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던 3조가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왔더니 죄다 죽어 있었다.

킬리어드는 시체의 턱을 잡고 오른쪽, 왼쪽으로 돌려 가며 상처를 살폈다.

“솜씨 좋네……. 탐이 날 정도로.”

시체 한 구당 치명적인 상처 하나씩이라. 무척이나 간결하고 깔끔한 솜씨였다.

“단장.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의뢰인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

“그래야지.”

빌어먹을. 그래, 그게 제일 큰 문제지.

킬리어드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시체들을 발로 툭툭 찼다.

“모자란 새끼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갔어야지.”

미련하게 버티다 뒈지고 난리야.

암살자 하나 키우는 데 들어가는 골드가 얼마인데…….

킬리어드가 구겨진 미간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때, 따라온 수하가 말했다.

“의뢰인에게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킬리어드가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아니, 내가 간다. 네가 가면 죽어. 그자들의 성미가 어디 보통 성미여야지.”

의뢰인 중 사내 쪽도 문제였지만, 여자 쪽도 문제가 많았다.

사내는 불같은 성미가 있어서 기껏해야 팔이나 다리 하나 부러지고 말 테지만, 여자 쪽은 목덜미를 섬뜩하게 하는 남다른 서늘함이 있었다.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았어.’

처음 의뢰를 받고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이미 의뢰에 실패했던 다른 용병단의 용병들이 바닥에 피를 토하고 죽어 있었다.

-잘해 봐요. 이런 꼴이 되기 싫으면.

여자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용병의 입안으로 독약을 부어 넣었다.

아주 자연스러웠고 몹시도 능숙했다.

“단장…….”

“먼저 숙소로 돌아가라. 난 의뢰인에게 다녀올 테니.”

“네…….”

킬리어드는 곧장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방향을 틀었다.

‘그 여자가 저택에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킬리어드가 탄 말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산길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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