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완성!”
아으으으! 어깨야! 허리야! 엉덩이야!
깊은 새벽. 마치 깨어 있는 사람은 저 혼자뿐인 것처럼 적막한 밤이었다.
펠슨은 완성된 약을 각각 상자 두 개에 나누어 담았다.
암흑뿐인 창밖을 잠시 응시하던 펠슨은 상자 두 개를 겹쳐 들고서 낑낑거리며 조제실을 나섰다.
“어? 지키는 기사들이 없네?”
이것 봐라? 내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나 본데?
‘진짜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취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약 조제실은 눌러앉고 싶을 만큼 완벽에 가까웠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은밀한 취향인데 말이야.’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면서도 펠슨은 은발의 꼬맹이를 떠올렸다.
‘꿈이 조금만 더 선명했더라도.’
아니, 그 여기사의 이름이라도 나왔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텐데.
펠슨의 꿈은 무척이나 불친절했다.
기껏해야 여기사의 머리카락 색, 그리고 아주 가끔 등장하는 미소가 깃든 입매라든가, 잔소리하는 목소리가 전부였다.
‘일단 말투나 행동은 비슷한 거 같은데.’
처음, 자신을 펠슨 선생이라 부를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돌팔이!]
어……?
가만. 그러고 보니 그 여기사 근처에 또 누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아, 너무 흐릿해.’
펠슨이 투덜거렸다.
어느새 펠슨은 별관을 빠져나와 본관과 이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 본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데릭을 발견했다.
“어……? 깨어 있었습니까?”
그러자 데릭이 펠슨을 향해 걸어와 마주 보고 섰다.
데릭은 펠슨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사과요?”
“동생의 부탁으로 모셔 오긴 했는데, 그 과정이 평화롭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아. 난 또 뭐라고.”
“죄송했습니다. 모셔 오는 방법이 썩 지혜롭지 못해 불편하게 만들어 드렸습니다.”
펠슨이 눈썹을 끌어 올렸다.
펠슨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귀족들은 만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했던가.
정작 펠슨이 겪었던 귀족들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펠슨에게 귀족이란, 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양심 없는 짓거리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머리 숙이는 귀족은 처음이네.’
그 은발의 꼬맹이도 그렇다. 선생, 선생. 하면서 한참이나 신분 낮은 자신을 윗사람 대하듯 굴었다.
‘이 가문은 어떻게 된 게, 귀족다우면서 귀족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괜스레 머쓱해진 펠슨이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됐습니다. 경의 말대로 이곳까지 온 것은 제 판단이었으니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누구의 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자 데릭이 씨익 웃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데릭이 펠슨의 물약 상자 하나를 나누어 들며 말했다.
“에스테르 공작가의 가족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펠슨 선생.”
어라,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이 또 늘었네.
펠슨은 한결 가벼워진 상자를 들고 데릭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가족이라…….’
확실히, 에스테르 공작가의 사람들은 다 이상해.
펠슨은 가볍게 올라간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완성된 약을 받아 든 아델리아는 대충 세수만 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카르세스는 눈빛이 시커멓게 변한 아델리아를 보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괜찮겠어?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저도 신전에 들러 약을 전달해야 해서요. 그리고 같이 가야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아델리아는 약상자 하나를 품에 끌어안고서 말했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저에서 출발한 마차는 황궁과 제법 떨어진 골목에서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카르세스는 마차가 멈춰 선 뒤, 루드의 신호에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아델리아가 그의 손을 잡고 바닥에 발을 디디자, 카르세스가 조용히 말했다.
“황궁과 이어진 비밀 통로가 여기에 있어.”
‘네, 알아요.’하며 자연스레 대답하려다 아델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카르세스의 호위 기사였던 시절, 황궁에서 몰래 나와 ‘테트 도르’로 향할 때 사용하던 비밀 통로였다.
아델리아도 셀 수 없이 자주 이용했던 곳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돌고 돌아, 골목의 끝에 다다르면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운하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운하 위로 둥근 아치형의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 아래 숨겨진 돌문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아델리아는 검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벽면을 바라보았다.
카르세스는 벽면 오른쪽 상단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벽돌 하나를 쿡 누르자, 콰르르르— 돌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문이 열리는 장치도, 비밀 통로의 입구도 모두 벽돌과 흡사한 모양이었던 탓에 언뜻 보아서는 입구를 찾기도 힘들었다.
아델리아가 입구를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이런 기밀을 저한테 말씀해 주셔도 되는 거예요?”
“아니다 싶으면 죽여서 입을 막아도 되니까.”
“네?”
“농담.”
카르세스가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짧게 대답했다.
“…….”
농담으로 사람을 그리 쉽게 죽이지 마시라고요…….
하하, 카르세스가 옅게 웃으며 통로의 입구로 들어갔다.
어째서 저렇게 짓궂어지셨을까?
‘이것도 다 악시덤 때문일 거야.’
그렇게 괴롭혀 대는데 성격이 삐뚤어질 수밖에!
아델리아가 그를 따라 들어가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통로를 빠르게 지나 황태자 궁으로 나왔다.
“신전으로 바로 갈 건가?”
“제가 폐하께서 누워계시는 곳에 있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그래도. 약을 구한 사람은 영애잖아.”
“우리죠.”
“…….”
“전하와 전하의 사람들.”
그러자 카르세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말은 잘하지.”
카르세스가 왼쪽 복도 끝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복도 끝으로 쭉 걸어 나가면 신전이 보일 거야. 행운을 빌어, 영애.”
“전하께서도요.”
아델리아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서둘러 복도를 뛰어갔다.
그런 아델리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카르세스도 황제가 있는 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
“온몸으로 퍼졌던 독을 해독하려면 반나절의 시간이 더 걸릴 것입니다.”
“반나절이나?”
“예, 전하.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현 황제의 주치의 세니얼이 침대에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오랫동안 독을 드셨습니다. 여태껏 버티신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자 카르세스의 시선도 아버지를 향했다.
“그러나 해독제를 드셨으니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시력은……. 깨어나신 뒤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요.”
“시력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했어.”
“예?”
카르세스는 황제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해독제를 만든 의사가 자신이 만든 약이라면 시력까지도 되찾을 수 있다고 했거든.”
“…….”
세니얼이 놀란 눈을 뜨고 카르세스를 쳐다보았다.
폴디아퀸의 중독 증상 중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 실명이었다.
그렇게 한 번 손상된 시력은 해독제를 복용한다 해서 쉽사리 돌아오지도 못했다.
‘신경이 죄다 녹아내렸을 텐데, 그것을 어찌 되돌린단 말인가…….’
게다가 재료가 없어 황궁의 조제실에서조차 만들지 못한 해독제였다.
‘사실, 재료가 있다 하더라도 시력까지 돌아오는 해독제를 이렇게 빨리 만들 수 있었을까.’
세니얼은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카르세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저 해독제를 누가 만…….”
그때, 황제의 침실로 테오스가 들어왔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세니얼이 테오스에게 인사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테오스는 카르세스 앞까지 걸어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하.”
“에스테르 공작.”
테오스는 카르세스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 보였다.
아아, 카르세스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영애는 신전으로 갔습니다.”
“아.”
짧게 대답한 테오스가 침대에 누워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해독제를 구해 오셨군요.”
“그렇습니다, 공작.”
카르세스는 잠시 뒤를 돌아 세니얼을 바라보았다.
“자리를 좀 비켜 주게.”
“예, 전하. 그럼, 전 이만.”
세니얼이 침실을 빠져나가자 카르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스테르 영애가 아니었다면, 해독제를 절대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델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테오스의 눈동자가 카르세스를 향했다.
“대단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공작.”
“…….”
아델리아를 향한 칭찬에도 테오스는 당연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크게 감흥이 없어 보였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러자 카르세스가 웃으며 물었다.
“나 말입니까? 아니면, ……따님 말입니까.”
“…….”
테오스가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카르세스가 대답했다.
“약속드렸지 않습니까. 결코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영애는 무사합니다.”
그제야 테오스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전하.”
“아닙니다. 오히려 재밌는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경험? 테오스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그저 묵묵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테오스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카르세스는 알겠다며 짧게 대답한 뒤 황제가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가져가 앉았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테오스는 황제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신전이라…….’
대신관에게 단단히 경고를 해 두긴 했다. 성검과 아델리아의 일은 관여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마음은 초조했다. 아델리아 홀로 신전에 갔다는 사실이 못내 걱정되었다.
테오스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
같은 시각.
신전의 대강당에서 신관을 기다리고 있던 아델리아는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만나 당황하고 있었다.
“신전에서만 두 번째 만남이군요, 에스테르의 작은 별이여.”
[으아아! 저 누렁이가 진짜!]
리그하르트의 비명을 들으며 아델리아도 소리 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여기서 또 저 인간을 만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