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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됐어요, 은퇴라면 몰라도 (50)화 (50/161)

50화

끙, 아델리아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릭, 오늘은 더욱 조심해야 해. 오빠도 없으니까.’

[네, 누님. 오러는 어쩌죠?]

‘……그러게, 그게 좀 걱정이야.’

아델리아가 애석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델리아 에스테르가 프레이르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편안하셨는지요.”

“하하, 덕분에.”

황궁이 폐쇄된 상태다 보니 황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신전에 온 것 같았다.

황태자는 황궁 폐쇄를 명령하며 황제파 세력인 에스테르 가문의 출입만 허락한 상태였다.

당연히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귀족파인 악시덤은 황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필 지금 마주치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지.

악시덤이 아델리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데릭 경도 없이 혼자서 신전에는 무슨 일로?”

그러자 아델리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아는 아이가 신전에 있어서요.”

“오호, 영애의 친우가 신관이 되었단 말이오?”

“음, 비슷해요.”

“대단하군. 영애는 기사로서 실력이 뛰어나고, 친우는 신관으로서의 재능이 뛰어난 모양이오.”

악시덤이 각진 턱을 어루만지며 가느다란 시선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하하, 아델리아가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그때.

“그 상자는 무엇이오?”

악시덤이 폴디아퀸의 해독제가 든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가늘게 뜬 시선이 한순간 매서워졌다.

당장이라도 상자를 빼앗아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그럴수록 더욱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이거요? 친구한테 줄 선물이에요. 숙녀들끼리 주고받는 선물이죠.”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말고 보여 달란 소리는 더더욱 하지 말라는, 아델리아식의 경고였다.

악시덤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군.”

악시덤은 숙녀들끼리 주고받는 선물치고 중후하고 투박한 상자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호위도 없이 영애께서 혼자인 것을 보니 걱정이 되는군요. 친구가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 드리겠소.”

그러자 아델리아가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내리고 미소 지었다.

“제가 호위를 데리고 다닐 만큼 나약하지 않아서요, 대공 전하.”

“아아, 아카데미 시험을 최연소로 통과하신 분이셨지.”

하하, 악시덤이 잊고 있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말입니다, 영애.”

웃음을 그친 악시덤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법이라오.”

“그렇습니까?”

“그렇지. 영애보다 뛰어난 실력자들은 많소. 자신의 실력에 자만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그의 말에 아델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한 시대를 주름잡으셨던 영웅다우십니다!”

“……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맞는 말씀이세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죠.”

아델리아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눈매를 접어 웃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자신이 가진 것을 모조리 잃게 될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죠.”

“…….”

“저같이 어린아이에게까지 마음을 써 주시고. 그 충고, 겸허히 받아들여 조심하겠습니다!”

악시덤이 어금니를 짓이겼다. 그러자 이마의 핏줄이 불뚝거렸다.

고작 일곱 살짜리가 뭘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고작 두 번의 만남으로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걸 보면 상성이 몹시도 나쁜 존재라는 것은 확실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하게 거슬리더니…….’

아델리아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때.

‘음……?’

악시덤의 눈동자에 불현듯 의아함이 스쳤다. 채도 낮은 은회색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살피기 시작했다.

[누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어요.]

으, 소름 끼쳐. 리그하르트가 치를 떨었다.

‘오러 때문이야.’

얼마 전, 악시덤과 신전에서 마주쳤을 때는 데릭이 곁에 있었다.

아델리아의 오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하더라도, 데릭의 기운에 묻혀 느끼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데릭이 없다.

‘오러 큐브가 완벽하지 않아. 시간 날 때 강화하는 훈련이라도 해야 했는데…….’

아델리아는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기면 오러 큐브를 단련시키겠다 마음먹었다.

당장은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 순간, 악시덤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이상하군.”

그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아델리아를 응시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게 말이 안 되는데.”

아델리아는 일부러 더 맑게 미소 지었다.

“뭐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는 말을 이어 하려던 찰나, 악시덤이 또 한 걸음 다가왔다.

[히익! 누, 누님! 차라리 도망가요!]

아델리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출구를 훑었다.

‘그러자. 차라리 의심받더라도 도망가 버리자.’

괜히 붙잡혀서 오러가 발현되었다는 확신을 주느니.

‘화장실 가야겠다고 나가 버려야지.’

일곱 살은 갑작스레 화장실이 급해질 수 있는 나이거든.

아델리아가 마음의 준비를 하던 사이, 악시덤의 눈꼬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꿀꺽.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은 계속 미소를 유지한 채였지만, 상자를 붙잡고 있는 손끝은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고 다리는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악시덤의 오른발이 다시 신전의 바닥 위를 디뎠다.

“혹시…….”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 순간, 아델리아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어?’

아델리아가 시야를 올리자, 남청색 망토가 시야로 들어왔다.

“아빠……?”

테오스였다.

“에스테르 공작……?”

테오스가 나타나자 악시덤 역시 놀란 듯 서너 걸음 물러섰다.

악시덤은 테오스 앞에서만큼은 다정하고 상냥한 가면을 내던졌다.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테오스를 적이라 인식한 모양이었다.

악시덤은 하하, 어색하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짓이라니, 공작. 오해는 거두시오.”

“오해?”

“아무리 공작이 제국의 영웅이라고는 하나, 작위로는 내가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인데……. 듣기 거북하군.”

“그것이 불만이시거든 폐하께 고하시면 됩니다.”

“이런, 공작.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시다시피 지금 황궁은 폐쇄되어 있소.”

“그러니 하는 소립니다. 황궁이 폐쇄되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실 텐데요.”

황궁이 폐쇄되었다는 것은 황궁 내부에 중대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다.

하지만 평소 황제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고, 황궁 폐쇄를 명령한 사람이 황제가 아닌 황태자라는 점에서 황제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위 계승권을 가지신 대공이 황궁 근처를 배회하시다니요.”

“배회라. 보시다시피, 난 지금 신전에 있지 않소?”

악시덤이 어깨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테오스는 그런 그의 능청을 뚝뚝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예, 황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신전이죠.”

“오해라니까.”

하하하, 악시덤이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악시덤은 그 와중에도 테오스에게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공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희미하긴 했지만, 오러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약하게 흘러나오던 그 오묘한 기운은 테오스가 나타나자마자 그의 오러에 감쪽같이 가려졌다.

저 나이에 오러는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마력인가. 신전에 온 걸 보면 신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고.

‘공작의 오러 때문에 더는 확인할 방법이 없군.’

악시덤이 항복한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 올리며 선한 미소를 지었다.

“내 진심이 의심받는 것이 아쉽지만, 조금 전 내 언행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소. 단지 나는 기도를 올리러 왔다가 에스테르 영애를 우연히 만났을 뿐이라오, 공작. 반가운 마음이 다소 지나쳤던 모양이오.”

악시덤은 상냥한 목소리로 테오스 등 뒤로 가려진 아델리아를 향해 말했다.

“내 언행이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오, 에스테르 영애.”

그러자 아델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대공 전하. 제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다 보니 낯을 가려 그렇습니다.”

낯을 가려……?

그렇게 할 말 못 할 말 다 해 놓고?

악시덤이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소. 사과하오. 다음에 또 마주치는 날이 오면, 조금 더 조심스레 다가가겠소.”

웩. 리그하르트가 끝내 헛구역질을 했다.

‘그냥 딱 이 정도의 거리가 좋은 거 같은데, 뭘 다가오겠대.’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저 누렁이 놈! 황제였을 때도 누님더러 황비가 되라느니, 아니면 숙소를 내어줄 테니 황궁에서 지내라느니. 막 그런 헛소리를 했었죠!]

‘아, 그건 장난식으로 던진 말이었다니까?’

[그건 누님 생각이고요!]

리그하르트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자 잊고 있었던 기억 몇 개가 불현듯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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