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래, 아델리아. 아빠다.”
아델리아는 겨우 반쯤 눈을 뜨고서 테오스를 쳐다보았다.
“데오나한테……. 해독제를, 줘야…… 해요.”
숨소리가 나빴다. 그럼에도 아델리아는 자신의 몸이 왜 이러냐고 묻기 전에 데오나의 몸 상태부터 걱정했다.
테오스의 눈꼬리가 절로 내려갔다.
“걱정 마라. 지금쯤 전해졌을 거다.”
아델리아를 안고 신전을 빠져나온 뒤, 테오스는 해독제를 데릭에게 넘겼다.
-직접 대신관을 만나 전달해라. 그리고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보고 돌아와. ……아델리아가 깨어나면 걱정할 테니까.
-네, 아버지…….
아직 데릭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데오나라는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테오스의 말에 아델리아가 바스러질 듯 옅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에요……. 고맙습니다……, 아빠.”
그리고 아델리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스르륵 감기는 눈을 바라보던 테오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아델.”
***
깜깜한 밤. 아델리아가 눈을 떴다.
작은 램프 덕분에 시야는 금세 밝아졌다.
‘내 방…….’
맞다. 나 신전에서 갑자기 쓰러졌었지.
‘어린 시절의 내가 이렇게 허약했었나?’
성검의 기사로 활약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체력이긴 했다.
‘체력을 키워야겠어.’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은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끙, 아델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님! 누님! 누니이이임!]
쁘허어엉! 리그하르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지잉지잉 진동하며 아델리아를 불렀다.
‘릭, 조금만 조용히…….’
머리 울려, 릭. 아델리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왜 쓰러지신 거예요? 제가 있어서 어지간하면 아프지 않으실 텐데요!]
아, 그렇네?
성검의 주인은 성검의 영향을 받아 어지간한 병에는 잘 걸리지 않는다.
특히 아델리아의 경우, 오러까지 가지고 있었다.
성검의 기운과 오러의 힘 때문에라도 이렇게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때, 리그하르트가 속상해하며 말했다.
[역시……. 제 힘이 반쪽이라서 그런 걸까요?]
“……릭.”
리그하르트의 목소리는 한껏 주눅이 든 상태였다. 아무래도 아델리아가 쓰러지고 나니, 자신의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아델리아가 목걸이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리그하르트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자책하지 마. 원래 내 몸이 엄청 약했어. 어릴 때는 죽을 뻔했다고도 들었거든.”
아, 지금도 어리지? 어쨌든.
“그러니까 네 탓이 아니라는 소리야.”
[누니임…….]
리그하르트가 감동이라도 받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아마 눈이 있었다면 눈물도 그렁그렁 맺혔을 법한 그런 목소리였다.
“맞다.”
불현듯, 한 생각이 아델리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데, 네 힘 반쪽은 어디에 있는 거야?”
아델리아의 질문에 리그하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신전이죠.]
“응? 신전?”
[네!]
리그하르트는 시간을 돌아온 그 날, 자신의 힘과 같은 기운을 지하에서 느꼈다고 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신전에 갔을 때 말했으면 내달라고 했을 텐데.”
[안 물어보셨잖아요?]
“…….”
[그리고 제 힘이 반밖에 안 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못 듣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셨잖아요?]
“…….”
아델리아가 뜨끔해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거야…….”
[그래서 필요 없으시구나 했죠!]
제 말이 틀렸어요?! 네?!
리그하르트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서운해하며 따지듯 말했다.
아델리아는 아니라고 하지도 못하고 그저 웃었다.
‘아니, 네가 흥분하면 목소리를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니까 하는 소리지.’
[흥! 몰라요!]
리그하르트가 빛을 번쩍거리며 토라졌다.
‘전장만 다녀서 다행이지.’
성검이 그토록 경박한 어투를 사용한다는 것이 제국민 사이에 알려지기라도 했다면, 영웅으로서 위상을 높이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또! 또! 제가 언제 그렇게 말을 많이 했다고요!]
아델리아가 과거를 회상하자, 리그하르트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릭,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야 좋은 쇳덩이가 될 수 있다고 했어? 안 했어?”
[기선 제압! 기선 제압 모르세요? 제가 그렇게 떠든 덕분에 적들이 귀를 막고 바닥에 쓰러졌던 거라고요!]
“아군들도 쓰러졌었어. 기억 안 나?”
[…….]
그러자 리그하르트가 조용해졌다.
“어쨌든, 찾을 건 찾아야지. 그런데 당장은 말고.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지금 네 반쪽 힘까지 찾으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아으! 아델리아는 애써 세운 몸을 다시 침대에 누이며 앓는 소릴 냈다.
하아……. 편하다.
아델리아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침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눈만 깜빡이던 그녀가 읊조리듯 말했다.
“빨리 크고 싶다.”
이번에는 잘 먹어서 키도 쑥쑥 커야지.
그리고…….
‘아빠…….’
아델리아가 몸을 뒹굴거리며 리그하르트에게 물었다.
“저기, 릭. 내가 열이 많이 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네?]
“아빠 말이야.”
[아버님께서 왜요?]
“내가 드린 선물을 하고 계셨던 거 같은데.”
[아, 맞아요!]
그러자 아델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맞아? 맞다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그렇다니까요? 저도 속으로 생각했죠. 잘 어울리네? 하고.]
뭐? 하물며 잘 어울렸어?!
기억이 희미했다. 데오나의 해독제를 부탁하며 잠시 눈을 떴을 때, 테오스의 망토에 붙어 있던 자신의 선물이 얼핏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델리아가 침대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어디 가시게요? 지금 돌아다니시면 혼나실 텐데.]
“직접 볼래.”
아델리아는 슬리퍼를 챙겨 신고 방을 급히 빠져나갔다.
***
“폐하께서는 반나절 있다가 정신을 차리셨고 시력도 되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행이군.”
보고를 듣고 있던 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으로 갔던 데릭이 돌아왔다.
데오나는 대신관이 돌봐 준 덕분에 신력이 안정을 되찾았고 걸어 다닐 정도로 회복이 된 상태였다.
몸속의 폴디아퀸 독성 때문에 파리했던 안색 또한, 해독제를 마신 뒤 말끔히 사라졌다.
“폐하께서 건강을 완벽히 되찾기 위해서는 꽤 시일이 소요될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 약을 오랫동안 먹어 왔으니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그때였다.
누군가가 테오스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빠, 저예요.”
아델리아가 집무실을 찾아왔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테오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문까지 걸어가 문을 직접 열었다.
정말 아델리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테오스는 놀란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
“네?”
“왜 네가 여기에……. 아니, 어째서 방을 나왔지? 그러다 또…….”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들릴 듯 말 듯 흘러나온 테오스의 마지막 말에 아델리아의 눈이 조심스레 커졌다.
‘아빠가 지금 내 걱정을 하시는 거야?’
아델리아는 테오스의 반응에도 놀랐지만, 순간 시야로 들어온 물건에 또 한 번 놀랐다.
‘내가 선물한 체인이야!’
[그렇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보란 듯이 하고 있었다고.]
아델리아는 테오스의 망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델리아가 테오스에게 선물한 것은 망토를 고정하는 체인이었다.
체인을 살 때만 해도 테오스가 착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테오스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커프스 링크도, 허리띠도, 최대한 작고 단순한 디자인의 것을 사용했다.
다른 귀족 남성들이 애용하는 팔찌나 반지, 귀걸이나 목걸이도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그런 테오스를 위해 아델리아도 간소한 선물을 고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그 가게에는 단순한 디자인의 장신구가 없었어…….’
[유행이 그렇다니 어쩌겠어요.]
리그하르트가 당시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어휴, 요즘은 그런 단순한 디자인의 장신구는 나오지 않습니다! 찾는 이들이 없으니 만들더라도 돈이 될 만한 놈들을 만들게 된 거지요.
가게 주인의 말에 아델리아는 고민했다. 그런 아델리아를 위해 가게 주인이 색다른 물건을 내어놓았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커프스 링크나 반지보다 수요가 적어 한동안 팔리지 않던 물건이긴 한데, 말씀하셨던 수수하고 단정한 선물로는 안성맞춤일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희 가게 물건은 똑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수제로 만들어 희소성 또한 높지요!
가게 주인이 꺼내 놓은 것이 망토를 고정해 주는 체인이었다.
보자마자 테오스가 떠올랐다.
햇살 같은 금색 체인은 테오스의 밀색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했다.
체인을 고정해 주는 버튼은 깊이감이 느껴지는 채도 낮은 붉은 루비가 중심을 잡아 주고 있었는데, 그 어두운 빛깔의 루비가 테오스의 눈동자와도 닮아 있었다.
‘생각대로 아빠랑 잘 어울려!’
잘 샀다, 정말!
아델리아가 뿌듯한 시선으로 테오스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델리아의 시선을 느낀 테오스가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 체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